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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대인의 한계 - 용서 (마 18:21-28,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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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한계 - 용서 (마 18:21-28, 34-35)
  

가곡 가운데 “이별의 노래”가 있습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이 시인이 어느 날 여대생과 눈이 맞아 함께 가출을 했습니다. 부인이 소문을 듣자니까 제주도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갔을까요?. 분명 눈에서 불이 튀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채를 잡아야 하나?’ 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활이 얼마나 어려우냐며 보태 쓰라고 돈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을 보내려면 추울텐데 입으라고 남편과 그 여인을 위한 겨울옷이 담긴 보따리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 안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았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헤어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인이 배를 타고 떠나갑니다. 눈앞에서 여인을 실은 배가 멀리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인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입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때로는 갈등의 일, 분노의 일, 감정 상하는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 감정들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다보면 싸울 일이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때로 물질 때문에 싸울 때도 있습니다. 물질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상도 되고 영적 걸림돌도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서 무섭게 절제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살다 보면 용서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감정이 앞서고 분노와 복수심만 가득 찹니다. 용서하려면 내 마음과 심각하게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우리는 매일 그 싸움에 지곤 합니다. 제주도에 갔던 시인의 아내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감정의 상함이, 복수심과 분노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내는 분노와 복수심의 감정을 한수 높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한방에 고꾸라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매일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마주하며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갈등과 불화, 감정의 대립을 하게 되고 그것이 원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불화함으로 마음과 감정이 상하게 되어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부부간에도 일어나고 형제간에도 일어나고 교회에서 교우 간에도 일어납니다. 그때 오는 타격은 감정의 상함으로 끝나지 않고 영성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삶에 기쁨을 잃게 되고 마음 문이 닫혀 지옥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하던 중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21-22)” 사실 베드로는 내심 칭찬을 기대하고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수는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35절부터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임금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일만 달란트가 얼마만큼의 돈인지 아십니까? 1달란트는 노동자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6천배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임금이 10만원이라면 10만원의 6천만배의 돈이 일만 달란트입니다. 혹자는 오늘 돈으로 10억 달러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시 온 유대 땅에서 거둬들인 한해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큰돈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고 왕궁을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빚진 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르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임금이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네 빚도 당장 갚으라” 하고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35절 끝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이 세상은 당장이라도 심판받게 될 것이고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중심은 긍휼과 은혜와 용서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5장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나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서 젖을 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의 복음과 용서의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6절부터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용서의 신학이 성경 전체에 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도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하시며 용서의 신학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용서의 진수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우리에게 어찌 이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신학을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본문이 이 시대에 주시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갈등의 이유 

옛날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이웃도 몇 명 되지 않아 갈등의 요인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삶이 복잡해졌습니다. 사람들도 많아졌고 서로의 이해관계도 아주 첨예해졌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문제로 갈등하고 불화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이것은 친구와 이웃뿐 아니고 부부와 형제와 부모 자식 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우끼리 자주 만나다 보니까 성격 차이로, 질투심으로, 물질문제로 불화한 관계가 되기도 하고 사역하다가 불화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과 바나바도 사역우선순위 문제로 심각하게 다투다가 일시적으로 갈라서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는 갈등, 불화, 원한 관계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이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핍박은 그냥 욕하고 비웃는 수준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이 있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영적으로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든 상황에서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 같아서는 용서는커녕 복수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큰 것입니다. 용서할 능력은 없는데 용서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과 투쟁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투쟁하고 싸우지 않으면 용서를 흉내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투쟁하고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용서의 한계 

오늘 본문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즉 무제한의 용서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어디까지 입니까. 사고 친 사람들도 불법을 행한 사람도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말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라는 것은 마치 오늘날 무제한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웃을 돕고 나누고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이웃을 돕고 나누고 구제하는 복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도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지란 구제대상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거나 힘들거나 실패해서 지금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들은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정신이고 복지정신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나서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지의 개념이고 성경의 정신입니다. 저 북한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 북한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척교회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개척교회도 스스로 유지하기에는 힘이 모자랍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큰 교회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도움이고 구제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만 명 모이는 교회까지 다 도와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빚을 탕감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해서 사기치고 불법을 자행하고 강도질 한 사람까지 다 용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것 까지 용서하지 못해서 마음으로 갈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받고 고난당하며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용서의 대상들입니다. 모르고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죽이고 조롱하는 군인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용서의 기도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용서하라는 의도와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에는 세 가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용서 이유

하나는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원래 상처를 준 사람보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훨씬 괴로움이 큰 법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그때부터 삶의 기쁨을 잃게 되고 사람들이 싫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오래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를 잃게 되어 삶이 지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하고 싸워야 합니다. 빨리 용서하기 위해서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때 잃은 기쁨을 회복할 수 있고 내 마음에서 지옥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치유나 회복은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같은 용서는 나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무장공비에게 잃었습니다. 무장공비는 두 아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아비 된 마음속에는 공비를 죽이고 싶은 복수심에 불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득 ‘공비를 죽이고 원수를 갚으면 죽은 내 두 아들이 살아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은 그 공비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내가 평화로워지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다. 불화와 갈등이 생기면 나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기쁨도 잃게 되고 영적으로 균형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동체가 심하게 훼손됩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면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균열이 생기고 파괴되기도 합니다. 교회의 경우도 그 안에 갈등이 생기면 교회공동체가 흔들리고 모두가 시험에 들게 됩니다. 나라도 갈등하면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서로 불화와 갈등의 문제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감정이 상하게 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라서고 형제가 원수가 되며 가정이 파괴됩니다. 또한 교회도 분열되고 찢어지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고 실제로 죽임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원수를 갚고 싶고 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기독교 공동체와 복음전파의 길에는 심대한 훼손을 입게 됩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용서의 신학은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이고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갈등이 많고 용서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교회가 갈등이 없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모두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한 여러분들의 노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조용히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 자신이 용서받을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핵심 신학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00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임금으로부터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본문은 이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러운 죄를 탕감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즉 여기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구원받았으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고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왜 고민도 하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고 질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제도를 고치고 구습을 뜯어 고치는 혁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의 문제를 털어내기 위해서 내안의 나와 무섭게 투쟁하는 일이 신앙개혁입니다. 내안에는 구태가 들어 있습니다. 고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보고 용납하고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안에 엉킨 감정을 풀지 않고 원한과 증오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도 용서해야 하지만 먼저 나를 위해서 입니다. 용서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힘겨운 싸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마침내 내안에 잃어버렸던 기쁨을 회복되고 천국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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