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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보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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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보라 (행 3:1-10)


다하라 요네코(田原米子)는 18세 때에 찾아온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오는 전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죽음대신 두 발 및 왼손과 왼팔,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른쪽 팔과 손가락 세 개뿐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절망적인 환난과 근심이 찾아 왔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녀는 자살을 계속 시도했으나 남아 있는 세 손가락으로 죽는 것조차도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선교사 지망생 아키도시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키도시가 요네코에게 청혼을 한 것입니다. 

그와 결혼한 그녀는 꿈에서조차 상상 못할 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요네코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을 평생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부유하지만 예수를 모르는 자들, 힘은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 건강하나 참 생명을 지니지 못한 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네코의 섬김과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게는 손가락이 세 개나 있습니다.” 한 팔과 두 발, 일곱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잃었기에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세 개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었노라 말합니다. 세 손가락으로 죽어가는 영혼, 환난과 근심 속에 빠진 이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후에 요네코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수기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면 삶이 달라집니다. 변화되어진 삶을 보이며 당당히 간증하게 됩니다. 다하라 요네코는 우리를 향해 ‘나를 보라, 우리를 보라’ 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선포한지 494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루터는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가까이 계신 하나님, 생활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외적인 제도나 구조를 개혁하기 이전에 자신의 개혁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었습니다.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개혁이 우선되지 않고는 바른 교회의 개혁이 없으며, 교회의 개혁이 없이는 사회, 정치의 개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니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가는 길에 성전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계집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였으며 또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의심하였던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가 ‘우리를 보라’고 공개적으로 외친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주일에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우리를 보라’ 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어떠한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까? 
 
첫째로 정하여 기도하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 병사를 구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동료 병사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부상당한 병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모습을 본 지휘관이 놀랍니다. 지휘관은 두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동료병사가 구출해 내는 겁니다. 두 병사가 모두 살았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이 총에 맞은 병사를 구출해 온 병사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전투 중에 왜 시계를 보고서 병사에게 달려갔는가?” 그러자 병사는 대답합니다. “예, 제가 전쟁터에 나가려고 할 때에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매일 12시가 되면 정기적으로 기도를 할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시계를 보았을 때가 바로 12시였습니다.” 병사는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동료를 구하러 갔던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전에는 특별한 능력이 없었지만 베드로는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습관은 본 받아야할 모범입니다. 고넬료 백부장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9시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9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움직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영혼을 주목하는 

9.11 테러당시 브라이언 브릿드웰(Brian Bridwell)은 국방부 복도에서 비행기 폭팔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의사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브릿드웰은 전신의 40%가 불에 탄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생명을 건지기 위해 수없이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대통령 영부인 로라 부시가 브릿드웰의 병실을 방문하여 멜(Mel)부인을 포옹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누군가 브릿드웰 부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습니다. 잠시 후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들어 왔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브릿드웰 중령에게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브릿드웰이 답례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데 20초 정도 걸렸습니다. 팔에 입은 화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경례한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브릿드웰이 손을 내리자 비로소 내렸습니다. 부하가 상관에게 하는 거수 경례 예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영혼에게 주목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대통령이 한 영혼에게 배려를 보였듯이 우리도 불행한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거리에서 누구를 보았습니까? 늘 그랬듯이 그냥 무심결에 불쌍한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을 스쳐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한 영혼이 돌아오려면 그 영혼을 주목해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여기의 ‘주목했다’ 는 말은 무심하게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로 '아테니사스' 인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 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영혼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주목해 보았습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불쌍한 앉은뱅이를 향한 자비심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면 주목해서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죽어가는 영혼들입니다. 미용사는 머리를 보고 제화공은 신발만 바라보듯이 교회는 불신자의 영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는 영혼은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가 받고 싶은 것과 베드로와 요한이 주고 싶은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앉은뱅이는 물질을 얻고 싶었고, 사도들은 회복과 구원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일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빌어먹는 사람을 벌어먹는 사람으로 일으키고 싶어 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목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름을 선포하는 

성 프란시스코(Saint Francis)는 무소유로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걸식성단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아주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다 보여준 후에 프란시스코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은과 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는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고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문제이든 예수 이름을 선포할 때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습니다. 부해졌습니다. 교회가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우고, 기도원도 세우고 묘지까지 만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 걸으라고 자신 있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교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간구하기보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었기에 과연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자신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한 능력이 현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길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절망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 희망의 삶을 살아가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에 기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도무지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자기 개혁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패션모델은 새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처럼 옷을 입으라고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패션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부디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목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선포하여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성도들로 다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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