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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리가 있습니까?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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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진다고 느낄 때에 평안을 느낀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에 실망하고 불안하고 화가 나게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거부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한신 대학교 상담학 교수인 정태기 목사님의 경험이다. 정목사님이 자주 가는 우체국이 있었는데 창구의 여직원이 항상 굳은 얼굴로 화가 난 표정으로 목사님을 맞이하곤 했다. 무척 기분이 나쁜데도 참고 있다가 어느 날 “왜 나면 보면 항상 화가 나 있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그 여직원은 깜짝 놀라더니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면서 대답했다. “아저씨의 인상이 너무나 무서워서, 올 때마다 무서운 표정으로 대하기 때문에 자기도 얼굴이 굳어지고 긴장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너무 놀라서 집에 돌아와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니 정말로 자기가 보기에도 무서운 표정이었다. 지금까지는 자기 인상이 그런 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다. 마음에 상처가 많아서, 그 상처가 치료되지 않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탓만 한 것이다. 나중에 마음의 상처를 고침 받은 후에 비로소 얼굴이 펴져서 무서운 인상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얼굴로 변했다고 한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나를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도 나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는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어느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 받은 환상과 계시의 말씀이다. 그리고 2장과 3장은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일곱 교회들 중에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았고 어떤 교회들은 칭찬만 받았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예수님께 책망만 받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중의 하나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예수님께 칭찬은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았는가? 이들의 영적 현실 즉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왜인가? 이들의 신앙은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믿음이었다.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그들의 신앙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불분명한 신앙이었다. 예수를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16절에서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다. 신앙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안 믿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으려면 몰라도 이왕에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불쌍한 존재인데도, 자신들은 부자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죄를 지은 죄인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존재인데도, 영적 안목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도 아무 부족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들이었다.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다. 한 번 택하신 백성은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과 부족과 죄를 지적하시면서 회개하라고 하셨다. 식어진 믿음에 불을 붙이고 열심을 내라고 하셨다. 사랑하지 않으면 책망도 하지 않는다. 잘못을 지적하고 벌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고치게 하기 위해서 책망하신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20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구절이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함께 먹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기쁨의 잔치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회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회개가 무엇인가? 회개란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를 믿는 모습만 있지 내용이 없는 형식적 신앙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기중심적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4절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중요하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골로새서 1:15-17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시며 창조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분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에게 복종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맘대로 살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고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죄요 또한 모든 죄의 원인인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고 있는가? 내 마음의 주인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가? 그분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가?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과 뜻을 그분에게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사는가?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나눈다고 하셨다.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기쁨으로 교제하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내게 이런 주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있는가?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가? 생각날 때만 주님을 찾고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지는 않는가? 주일에만 와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서는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나의 인생에 모셔 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잠언 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고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또한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사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을 의식하며 느끼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확신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고 나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느끼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기에 그 말씀과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주님의 뜻을 물으며 산다. 그리고 그 주님의 뜻에 내 뜻과 생각을 복종시키고 그분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것이다. 나는 쇠하고 예수님이 흥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22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자기 생각에는 잘 믿고 있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내게 주신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내가 들으라고 내게 주신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그 몸에 붙은 지체들이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듯이 모든 성도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다. 오래 믿은 사람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철저하게 주님이 주인 되시게 해야 한다.

오늘 우리 교회에 예수님이 주인이신가? 우리 모두는 교회 일을 하면서 모든 일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는가? 혹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을 의식하고 생각하면서 교회 일을 하는가? 혹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가? 혹 예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말을 더 무겁게 여기고 사람의 말에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과 명령보다 내 생각과 내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은가? 과연 오늘 우리 교회에서 누가 주인인가? 예수님인가 사람인가? 하박국 2:20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고 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예수님이 머리이시므로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잠잠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소리는 낮추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어느 교회에서 당회실에 당회장 자리에 의자를 두개를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항상 왼쪽 의자에 앉고 오른쪽 의자는 비워 두었다고 한다. 왜인가? 언제나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고 회의의 의장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회를 할 때마다 그 의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교회의 머리시오 주인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며 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고 회의를 할 때마다 무슨 일을 결정하든지 주님의 뜻에 맞는가, 주님이 이 결정을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내 가정에도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의 가정에 주인이 되셔야 한다. 주님의 자리를 비워 놓아야 한다. 가장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지 말고 주님께 내드려야 한다. 내가 내 가정을 책임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내 가정을 책임지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에 오래 동안 계속되던 좋은 전통 중에 사라진 것이 하나가 있는데 성미를 드리는 것이다. 이 성미는 예수님께서 내 가정의 한 가족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밥을 지을 때마다 예수님 몫으로 쌀 한 사람 분을 따로 퍼놓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져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미를 드리는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 때는 경제가 어려울 때여서 성미를 주로 목회자에게 주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모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썼으면 좋겠다. 어쨌든 가정생활에서도 예수님이 실제적인 주인이 되셔야 한다. 모든 가족들이 예수님을 의식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사명의식을 가지고 산다.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 돌리기를 힘쓴다.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만족과 평안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있다. 예수님과 함께 먹으며 교제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여유와 공간이 있다.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겸손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출 안다.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존재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사랑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힘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기를 힘쓴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의 빈 자리가 있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다. 남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의 공간과 여유가 있다. 남을 받아들이고 배려할 줄 아는 여유가 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 내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섬기려는 사랑의 마음과 여유와 공간이 생기게 된다. 

한 번은 졸업식에 맞추어서 이사회가 열렸고 졸업식 전날에 교수들과 졸업생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서자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한국 사람은 혼자였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느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손을 들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그 테이블에는 동양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저를 부른 사람은 그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John Hesslink 박사였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분은 일본의 Union 신학교에서 13년 동안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 동양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을 해서 한국을 잘 알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을 얼른 알아보고 부른 것이었다. 

그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만약에 그분이 부르지 않았으면 전혀 낯선 사람과 앉아서 어색한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느라고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사랑의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앉아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을 알아보고 불러 주었던 것이다.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있는가? 그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낯선 사람, 처음 보는 사람, 다른 사람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는가? 내 마음에, 구역에, 기관에, 부서에, 교회에 다른 사람을 향해 문을 열어 놓았는가? 그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여유가 있는가? 혹 문을 꽉 닫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교회에서는 구역예배 때에 전도할 태신자의 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한다. 그러다가 그 자리의 주인이 오면 크게 환영하고 반갑게 맞아들인다. 새로 온 사람들이 거기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아직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지 않고 그냥 왔다가도 마음을 정하게 된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고 열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내 맘에 안 드는 사람, 부족하고 허물과 잘못이 많은 사람도 기다려 주고 참아줄 수 있는 여유, 그런 사람도 받아 주고 가슴에 품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로 나와 다른 점이 많은 사람들과도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자매로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연히 이런 사랑의 공간, 사랑의 자리, 사랑의 여유가 생기게 되어 있다. 내 안에 다른 사람을 위해 비어 놓은 자리가 없다면 예수님이 온전히 나의 주인이 되시지 못한 것이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이라. 주님이 오셔서 앉으실 자리를 마련해 놓으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 문을 열라. 그 문이 내게 축복의 문이요 그 자리가 너와 나의 축복의 자리이다. 마음 문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다른 사람을 향해 열어 놓는 문이 주님이 내게 들어오시는 문이다.

Halman Hunt라는 사람이 이 20절의 말씀을 근거로 그림을 그렸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시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에 손잡이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렇게 그렸을까?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려면 우리가, 내가 안에서 문을 열어야 한다. 내가 일어나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야만 주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 

어떤 아이가 이 그림을 보고 아빠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시는데도 문을 열지 않을까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지.” “계속 두드리시는데도 왜 못 들을까요?” “아마 집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럴거야.” 

나는 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는가? 왜 여유자리가 없는가? 내 생각, 내 감정, 내 욕심, 내 자존심 때문에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내가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가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자신의 믿음과 삶을 착각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나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 처지를 발견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의 모습과 현실의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 삶에 새 일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새로운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주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아온 것을 회개하라. 내가 인생의 주인인 듯, 내가 교회의 주인인 듯 착각했던 것을 회개하라.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 눈치를 보며 살고 사람 눈치를 보며 일한 것을 회개하라. 나의 삶의 주인 되시고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 않고 나를 기쁘게 하려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던 것을 회개하라.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라. 사랑이 식어진 것을 회개하라. 

첫 사랑과 첫 믿음을 회복하라.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다시 내 안에 모셔 들여서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라.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라.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 기도의 열정, 전도의 열정, 봉사의 열정을 회복하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믿음에서 벗어나서 뜨거운 믿음이 되라. 주님을 섬기는 일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 

변화는 내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일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는 내가 열어 놓은 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사귀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고 날마다 승리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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