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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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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질 수 있나? (고전 2:1-5)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비상한 결단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목회자로서 부담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의 기독교는 세상을 초월의 방향으로 견인하기는커녕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교회는 지금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34살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의 그 비장한 마음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시 절대 권력인 교황과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은 비상한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적당히 엉너리를 치거나 변죽만 울려대지 않았습니다. 그의 언어는 심장을 겨누는 칼처럼 날카로웠습니다. 그에게는 교황보다도, 교회보다도 더 큰 권위가 있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이라는 입각점에 서서 바라보니 당시의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권위의 아성에 도전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예레미야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의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쳤기에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9) 내면에 불이 붙은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일러 예언자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도 역시 예언자입니다. 

오늘의 교회를 생각해보면 참 암담합니다.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목회자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 비친 기독교는 지금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오늘의 교회는 부와 권력에 도취되어 예수를 침묵시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길 잃은 목사들의 죄가 큽니다. 하지만 평신도들도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1928년 12월 11일에 행한 강연에서 “그리스도는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추방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는 주일 오전으로 추방되었고,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그리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자기의 일터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삶속에 깊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저하지 못한 믿음이 문제입니다. 일상과 분리된 신앙이 오늘의 한국기독교의 원죄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정과 학교와 일터, 교회, 벗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적 혹은 사적 공간 어디에서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명심하고 살아가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은 근본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는 날이어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할 것은 제도로서의 종교뿐만이 아닙니다. 그 제도의 일부분인 우리 삶이 개혁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지경으로 사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 말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입니다. 

• 위협 앞에서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그 지평을 유럽까지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그리스 사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에서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논리를 채택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그저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이 왔구나 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삶으로 반응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참담했습니다. 

그는 좌절의 땅인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항구도시인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공방에서 천막 노동자로 일하면서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뒤흔들어놓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동족들의 반대와 비방에 직면하여 이방인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반대자들의 싸늘한 눈을 의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도 인간인지라 두렵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비전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행18:9b-10)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내 자기에게 맡겨진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제거하거나 몰아낼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총독 갈리오가 부임해왔던 것입니다. 그는 스토아철학의 대가인 세네카의 형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임 총독에게 바울을 제소했습니다. 현지 실정에 어둡거나 채 지역 사회에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총독은 유력한 지역민들의 선심을 사기 위해 사람들의 민원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범죄나 악행에 대한 문제라면 자기가 개입해야 마땅하지만 종교에 관련된 것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면서 고발자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습니다.

총독을 이용해 바울을 몰아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들은 바울에게 협조적이었던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일종의 시위인 셈입니다. 이런저런 위험에 직면하여 바울이 꼭 붙들었던 것은 공교한 말이나 철학이 아니라 십자가였습니다. 

• 십자가 정신

십자가는 우리를 지켜주는 부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자체였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험 앞에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만 꼭 붙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지 않고는 그 난감한 상황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두려워 흐물흐물해지려는 마음을 곧추세우도록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예수의 피맺힌 십자가를 볼 때마다 바울의 가슴에는 어떤 기운이 차올랐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2)

강력한 말입니다. 바울에게 예수는 관념도 사상도 아닙니다.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의 삶의 중심이요, 우주의 중심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요한은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선언했습니다(계5:6)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속을 아는 게 진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그 비상한 마음, 죽음을 통해서라도 전해야 했던 그 진실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놀라운 말입니다. 그 집중된 마음에서 능력이 나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 말입니다.

오늘 교회가 그리고 신자들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주님께 맡기고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우리가 누리려다보니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고백에 부합하는 삶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피가 한 방울도 돌지 않는 사람처럼 삽니다.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일에 바치셨지만, 우리는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일할 사람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변명합니다. 이웃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잘 알지만 가련한 이웃들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은 습관일 뿐,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장시 <흰 손>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영원의 문이 열리고, 영광의 보좌가 보입니다. 그날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어 장막에 사는 동안에 그가 한 대로 갚으시는 날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믿고 왔다는 이에게 보좌에 앉으신 분은 “피는 들었다면서/네 손이 희구나./네 입술이/그늘에 시드는 나뭇잎 같구나” 하고 책망하십니다. 

자기 피 흘릴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예수의 피가 구속한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재차 물으십니다.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넋이 빠진 채 ‘우리가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까?’라고 변명하는 이들에게 보좌에 앉으신 분은 말씀하십니다.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내 뜻대로 살았느냐?/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흰 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믿음을 놀음으로 바꿔놓는 흰 손의 안일교도(安逸敎徒)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 기백 되찾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둥그런 사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입니다. 참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피 흘리는 것입니다. 그 근본정신을 잃은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건 우리가 가짜라는 말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화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엎드려 울 때입니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참상을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놓아야 합니다. 모든 새로움은 자기의 참상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기준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나 좋을 대로’ 살던 삶에서 ‘주님 뜻대로’사는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일러 회심이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 배어들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살과 근육 그리고 뼈에 배어들 때 우리는 진리를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적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치열한 공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Sovereignties)과 권세자(Powers)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어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의 지배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의 권세들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곤 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믿음처럼 덧없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백을 되찾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꼭 붙들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 다가서야 합니다. 자기 지갑을 열어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라는 감옥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감옥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어 지금까지의 모든 발언을 취소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비상한 각오입니다. 거대한 교회당을 짓고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치장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것은 우리 가슴에 예수의 피가 감도는 것입니다. 우리의 흰 손에 그분의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고백은 자기기만이 되기 쉽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은 루터 이야기나 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교우들의 가슴에 예수의 십자가 정신이 깊이 새겨지기를, 그래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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