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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자랑 (고후 11: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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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자랑 (고후 11:16-33)

 
오늘 말씀 고린도교회 문제점 중의 하나 거짓선지자 출연의 골칫거리로 지금 바울이 사도적 변명을 하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바울이 하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특징이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자랑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도 “나도 자랑하겠다.” 맞서서 반박 성명을 내고 있는 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도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우리가 분간해야 합니다. 이기적 목적으로 위선적 표현을 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당한 자기표현이나 필요한 설명은 그러한 자랑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우리 기독교 진리가 이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이 일부러 못난이 행세를 하라는 말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은 자기 PR 문화에서는 자신에 대한 표현 설명을 필요 적절하게 잘해야 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런 윤리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한테 편지가 많이 옵니다. 

오는 내용을 보면 거의 다 갈보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어 하는 전도사님이나 목사님들이 보내옵니다. 제가 관심 있게 늘 읽어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보고 그 내용에 의해서만 내가 평가를 할 수가 있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를 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나한테 보내온 내용을 읽어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 학력 배경을 모두 이야기 합니다. 학교에서 성적도 A플러스만 받았다고 하면서 목사님이 필요하시면 성적 증명서도 첨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 해온 경력은 이런 정도로 이렇게 해왔습니다. 내 사진은 최근 3개월 이내에 찍은 것이며 가족은 어떻게 있고….” 이렇게 자기 설명을 표현합니다. “나는 은사가 이렇습니다. 어떤 일에 내가 자신감이 있으며 열정의 사역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장점을 모두 설명을 합니다. “나는 외국어에도 능통합니다. 최소한 영어와 스페인어를 통역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만약에 선교를 하러 가시면 제가 다 따라다니면서 통역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부 썼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자랑입니까? 이것은 아주 훌륭한 자기표현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랑이 아닙니다. 기독교 선교에서 “자랑하지 말라.” 그런 것은 이런 게 아닙니다. 자기표현은 아주 잘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남보다 우수한 게 하나도 없으며 은사도 내세울 만한 게 없고 경험한 것도 미미하고 그러나 사역자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을 때 여러분이라면 회사에 직원을 뽑는다면 누구를 뽑겠습니까? 그런 것은 자기표현이지 그것을 자랑이라고 규정하고 “자기 자랑 잘한다.” 이러면 안 됩니다. 자랑은 할 것이 있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또, 하면 무익한 것이 있도록 되어 있는데 자기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위선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자랑입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구분을 해야지 표현의 문화는 개방적 사회에서는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TV에서는 공개적으로 사람을 선택해서 뽑잖아요? 그런 곳에 가서 자기표현을 잘해야 뽑히지 않습니까? 우리 늘푸른 대학에 나오시는 학생 한분이 KBS에 나오셔서 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됐습니다. 

잘하시더라고요. 요즘에는 사장이나 경영자에게 가서 나를 사원으로 써달라고 신청한 사람이 마지막의 질문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내가 결정하면 당신을 뽑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라고 질문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점수를 많이 따는지 아십니까? “만약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자신감입니다. CEO들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정주영 씨 책에 나오잖아요? 이기적인 목적을 두고 위선적 표현을 하는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자기표현을 정확하게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가 괜히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도 지금 그 점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와 양해를 구하잖아요? “내가 하는 말은 거짓 선지자들이 하려는 그런 자기표현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하도 나를 그렇게 비방을 하니까 나도 나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너희들이 용납해 주기 바란다.” 그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이렇게 16절에 말하잖아요?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이런 말을 하고 지금 자기표현에 대해서 본론에 들어가려고 양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려는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한번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 자랑을 자꾸 해서 그 자랑이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바울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깎아버리려 하는 육신적 자랑을 자꾸 하니까 “그러면 나도 자랑하겠노라.” 자기표현을 하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바울이 거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데 족보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세상 모든 종족 가운데 족보 자랑을 가장 뚜렷하게 하는 종족이 유대인입니다. 신약 성경에 절대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것이 뭐가 필요해서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족보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는 것인가? 유대인들은 그렇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은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의 시초는 어디이며 뿌리가 어디인가? 이것을 아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족보가 아주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족보 이야기를 끝없이 하고 하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족보이야기가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리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끝없이 계속 나오잖아요? “이 나사렛 예수는 아브라함의 혈통, 족보가 아브라함이다. 족보가 아브라함이다. 예언된 메시야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으며 무슨 열매가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이 나사렛 예수는 누구 혈통이냐? 그래서 그 족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심이라.” 그러면서 족보가 끝나잖아요? 누가복음에는 더 강조점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소급해서 올라가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 위는 누구요 그 위는 누구요”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올라가지요? 맨 마지막 구절에 가면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담까지 올라가서 하나님까지 연결되는 족보이야기를 합니다. “이 계통이다. 할 말 있냐?” 이렇게 족보를 좋아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그 족보 이야기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족보 계열에 들지 아니한 사람들은 말도 꺼내지 못할 만큼 아주 취급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족보 이야기를 하겠다.” 그러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는 다른 말로도 부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언어 중심의 명칭입니다.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 히브리인이라, 혹은 유대인이라 이렇게 몇 가지 말로 부릅니다. 

바울 때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 많은 이 히브리인들이 헬라 문화에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이 히브리인들은 본국에서 사는 숫자보다 해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인구 분포를 가진 특수한 민족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십시오. 헬라파, 히브리파라고 했잖아요? 헬라파는 무엇입니까? 유대인이지만 헬라 문화권에서 출생해서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파는 헬라 문화와는 상관없이 유대 땅에서 낳아서 유대 땅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숫자가 거의 비슷합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그러는데 옛날 고대부터 그럽니다. 지금도 그럽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외국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약 7백만으로 계산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조그만 나라이기 때문에 인구 전체가 유대인 500만에서 520만입니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서 살고 있는 유대인이 몇 명이냐 하면 몇 배가 됩니다. 미국에서만 620만이 삽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하도 성공하고 하도 잘나가고 숫자가 많아지니까 가끔 유대인 핍박 역사가 유럽에서 자꾸 일어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유대인이 거의 없습니다. 

왜 없는지 아십니까? 너무 거리가 멀어서 못 왔습니다. 그리고 와봤자 얻어먹을게 없어서 안 왔습니다. 그러한 분포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바울은 헬라 문화권 출신입니다. 유대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 땅에서 낳지를 않았습니다. 길리기아 다소라고 하는 헬라 문화권에서 출생해서 거기서 살아서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는 히브리인이 아니잖아? 너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따집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도 온 세상에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중남미에 살고 있는 한국인 2세들은 자연히 자기가 출생한 나라 언어가 자기 국어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2세들은 영어가 자신의 국어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 고려인들은 러시아어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국어가 되었습니다. 인종은 한국이지만 언어는 러시아어를 씁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은 현상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생의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에 능통하고 헬라어를 국어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만을 사용하고 있는 전통 유대인들이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는 유대들을 조금 차별했던 것입니다. 멸시를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너는 전통 유대인이 아니잖아.” 유대인들의 민족 특성!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서든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말을 하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싸웠잖아요? 그래서 어린 아이를 한명 갖다 놓고 “이렇게 되는 자가 큰 자다.” 이런 실물 교육을 예수님이 시킨 적이 있잖아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그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성경에 많이 나오잖아요? 더군다나 성전에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옆에 있는 다른 기도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기 기도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에서조차 자신의 우월감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유대인인 것을 어떡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더 낫다.” 거기서 기도하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거든요. 여러분! 지금 기도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 나는 옆에 있는 김 집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이게 있을 수 있는 기도입니까? 그런데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지적하셨잖아요? 유대인의 성격이 그런 것을 어떡합니까? 뭐든지 조금이라도 나아야지 하는 우월감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좋은 것이 없는데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립니다.” 하는 이 말은 “이 사람보다 내가 얼마나 잘났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우월감으로 자기도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랑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전통적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유대 땅에서 출생한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 헬라어를 국어로 쓰는 유대인, 그리고 유대나라 땅에서 낳지 아니하고 다른 헬라 문화권에서 출생한 유대인은 “너희와 우리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거기에 딱 걸려들잖아요? 길리기아 다소 헬라 문화권에서 출생해서 거기서 자랐지요? 헬라에서 태어났으니까 헬라 언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무시를 당한 바울이 지금 “그러면 내가 말하겠다.” 하고 22절에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여기서 유대인이냐는 말을 쓰지 않고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이것은 “내가 거기서 빠지는 것이 뭐냐?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이 바울은 헬라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히브리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율법학교를 졸업하면서 율법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를 최고로 잘하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적 용어를 써가면서 “하나도 떨어질 것이 없고 족보 따져볼래? 

나는 아브라함의 직계손이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나를 무시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족보, 가문 자랑 문화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사상은 없어진 거 같습니다. 옛날 노인들은 사람 만나면 우선 가문부터 물어봤습니다. “어느 가문이냐?” 그것부터 그 사람을 평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뭔지 아십니까?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조상 덕을 본 적은 없습니다. 29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시골에 개척교회를 하러 갔더니 그 동네에 이 씨들이 많이 살고 있더라고요. 제가 이필재라고 하니까 금방 나한테 질문합니다. “宰(재상재)자가 돌림자이십니까?” “그런데요.” “우리 집안이시구먼!” 그러더니 그때부터 족보를 가지고 놓고 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성계 후손 가운데도 이렇게, 이렇게 내려와서 이렇게 되어서 일곱 개 대군이 있었는데 어느 대군입니까?” “효령대군입니다.” “맞다. 그러면 효령대군부터 일곱의 군이 있었는데 어느 군입니까?” “의성군입니다.” “맞았네!” 아주 나와 하나도 안 틀리는 어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와 조카뻘이 되는 겁니다. 나이가 많으신 데도 그런 겁니다. 그 순간부터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겁니다. “아저씨를 만났네요.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안에서 목사님이 나오셨나요?” 그러더니 어느 날 자기 집에 오시라고 초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집안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아저씨야! 너희들 다 큰 절해!” 그래서 그 집안사람들에게 모두 큰 절을 받았습니다. 조상 따지는 사람들을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모셔!” 그래서 제가 조상 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개척교회를 했는데 그 사람들의 반대를 받지 않고 “아저씨 오셨어요?” 그렇게 도움도 받았습니다. 이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서열을 중요시하는 문화! 그런데 유대인이 한국 사람보다 더 심합니다. 뼈다귀도 괜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좀 잘했을 때 우리나라에 생긴 말이 있지요? 내가 지금 뭐가 잘되었을 때 이것을 무슨 영광이라고 하지요? “가문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가문을 빛내야 하는 영광입니다. 무엇을 잘못하면 가문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아주 심한데 유대인은 더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 뼈다귀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도 뼈다귀 자랑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아주 정통 골수의 뼈다귀 후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사명적 위치를 잘못 이해해서 하나님을 독점한 민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잘못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대인이 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로마서 2장 28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우리 믿음 안에서는 혈통적 유대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유대인 아브라함의 후손, 진짜 택한 백성이 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영적으로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으신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는 뜻인데 그것을 안 하니까 촛대를 옮겨서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런 정의를 바울이 내렸잖아요? 그래서 싸움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자랑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 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자기 사역을 소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일을 했다고 자랑할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한 것을 한번 자랑할 테니 들으라.”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 있는 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한번 비교해 보시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나의 이 믿음생활의 역사 가운데서 내가 겪은 핍박이나 고난의 종류가 바울과 같은 점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없었는가? 여기 9~10가지가 나와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따져보면 바울이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한 분이라도 나와야 할 텐데 한분도 없잖아요? 저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제일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병입니다. 제가 교도소에 심방을 가잖아요? 화병을 못 견디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없는데….’ 이것을 정말 못 견딥니다. 이것은 사형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화병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매를 맞아보신 분! 39대를 맞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39대를 때리는 매를 5번 맞았다고 하고 3번 태장으로 맞았다고 했는데 이 태장은 십자가로 된 형장으로 우리나라에도 있었잖아요? 엎드려서 엉덩이를 까버리는 것입니다. 피가 줄줄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아보신 분 손 들어 보십시오. 또 없나요? 왜 그렇게 때렸는가? 노예를 그렇게 때렸습니다. 노예가 도망을 갔다든지 죄를 지었다든지 하면 그렇게 때렸습니다. 그런데 40대를 맞으면 안 된다고 율법에 있기 때문에 39대 때리고 쉬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또 39대를 때리니 39대를 그렇게 맞아보십시오. 사람이 살겠나…. 그 다음에 여기 보니까 “한번 돌로 맞고” 루스드라에서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사도행전에 보십시오.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끌어다 성 밖에 내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깨어났잖아요? 그 다음에 “세 번 파선하였으며” 바울의 선교지 여행은 바다가 많았잖아요? 목선을 타고 가다가 세 번 파선했습니다. 전도하러 가다가 바다에서 파선해보신 적 있습니까? 옛날 배는 아주 위험합니다. 지금 고기잡이배도 나가다가 침몰하는데 옛날의 이 목선들은 발동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운명적으로 다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 번 파선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밤낮으로 사망적 분위기에서 꼼짝 못하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강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이런 것들은 자연에서 겪은 위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방인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결사대 조직한 게 몇 명이요? 40명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완성시키기 전에는 밥도 먹지 말자.” 결사대, 특공대를 조직해서 40명이 바울 죽이기에 나서서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끝까지 밥을 안 먹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신체적으로 당한 고통!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주님을 위해서 나만큼 일한 사람 손들어 봐! 너희가 나한테 뭘 자랑하느냐?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주님을 전한 사람 나와 봐.” 그래서 이렇게 열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이유 중에서 저는 내 자신을 놓고 비교해볼 때 바울과 똑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런 것은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게 하는 일, 또 억울한 말을 들은 일, 가난도 그 중에 하나는 됩니다. 또, 외로움을 심하게 경험했던 일, 배반당한 일은 아주 많습니다. 이런 정도로 고난을 당했지 이 바울과 같이 파선하고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은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매우 비겁스러운 일이 하나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32절, 33절을 읽어보십시오. 시작하겠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것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나가서 성벽을 내려가서 몰래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지요? 비겁하게 나가서 순교 당하면 순교 당할 것이지 왜 몰래 도망을 가나? 바울은 자신의 모든 일을 솔직하게 다 고백합니다. 담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도 때로는 지혜롭게 처세해아 되는 것임을 여기서 말하기 위해서 이 성경은 기록된 것입니다. 

무모한 죽음을 피해서 장래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선한 노력의 지혜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몸싸움 하는 곳에서 피해서 빠져나가시느니라.” 복음서가 있지요? 바울도 “이거 도망가야 되겠다!” 그래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타고 내려가서 몰래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볼 때는 좀 비겁해 보이는 일이 그대로 기록된 것은 사역자도 때로는 처세 지혜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모한 것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이 났습니다. 

빨리 죽으면 천국 가잖아요? 그런데 왜 고칩니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루 빨리 죽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야 믿음의 기도이지요. 다들 천국 가기 원하잖아요? 그런데 왜 고치려고 합니까? 바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복음을 전하실 때 환자들을 많이 치료해 주셨죠? 그런데 환자 치료하고는 그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복음서의 많은 반응은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랬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치료를 받고 지혜롭게 처세하는 것입니다. 

어떤 더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 병을 치료하고 그런 지혜가 필요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결론은 바울의 자랑은 모두 주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절대 수치스러운 고난들이 영적으로는 화려한 이력서가 되어서 바울은 그 고난을 자랑했습니다. 역사에 보면 “킹 아더”라고 하는 임금님이 있었는데 전쟁을 했거든요?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여인들은 다 물러가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잖아요? 전쟁에 직접 참여한 병사들만 모아놓고 “너희들 다 옷을 벗으라.” 하나도 옷을 입히지 않고 다 벗겼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뭐하시는 것인가?” 그랬더니 신하들을 데리고 그 많은 병사들을 일일이 몸을 검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일이 “가장 상처가 많은 순으로 포상을 해줘라.” 옛날에는 칼로 전쟁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몸에 상처뿐입니다. 총알을 맞으면 죽지만 칼은 맞아도 상처뿐이지 죽지는 않을 수가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몸을 검사해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의 순으로 포상을 해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난 상처는 하늘나라의 상급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상처투성이여야 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노라. 상처투성이의 사람이 되어라. 괜찮다.” 바울 사도의 자랑이었습니다. 이런 자랑은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 나하고 한번 자랑을 해보자.” 바울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의 자랑을 바울이 자기 자랑을 갖다 대니까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나라를 위한 상처는 영광입니다. 모두 그렇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일할 때 얻었던 이 수없이 많은 고난들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을 위한 상처는 상 받을 일의 흔적이 됨을 깨닫고 바울 같이는 못해도 우리 주변에서 주어지는 주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사역들을 훌륭하게 잘 해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아버지의 사역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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