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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찬미의 노래 (시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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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의 노래(시편 150) 

마틴 루터는 한번은 “세속의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위대한 시와 아름다운 노래가 있는데 교회에는 썩고 생명이 없는 예술로 가득하다” 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는 1529년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네” 라는 곡을 쓴 위대한 작곡가/작사가이기도 합니다. 이곡은 개혁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그는 시편 46편에 기초해서 이 곡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46:1)

오늘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개혁교회들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은 많은 개혁들 중에서 예배의 개혁을 희망하며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1.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배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예배하는가” 입니다. 고대에 사람들은 자연을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예배하였습니다. 강과 바다를 예배하였습니다. 나무와 식물을 예배하였습니다. 땅에 기어 다니는 동물과 하늘을 나는 새를 예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손으로 만든 조각상을 예배하였습니다. 어떤 물체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성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지 더 이상 예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자연을 이긴 인간에게 외부세계는 더 이상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서운 적은 오히려 인간 내부에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게 된 인간에게 이제 남은 예배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은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시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로 끝납니다. 7일 동안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 “좋았더라” 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창세기의 3장도 넘기지 못합니다. 3장에는 인간의 첫 번째 범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 17)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현대인은 자기애가 가장 강한 세대입니다. 현대인들은 미신적으로 자연을 예배하지 않지만 대신에 자신을 예배합니다. 자기애가 강하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고, 세상이 내 주위를 공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태양이라면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어느덧 인간이 태양이 되었고, 하나님, 우주, 그리고 옆에 있는 이웃이 내 주변을 공전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애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예배(self-worship)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편은 음악에 맞추어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일종의 찬송가라고 보면 됩니다. 다윗은 시편 150편중에서 73편을 직접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그의 삶이 평안할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경책을 보고 싶을 때 무심코 피면 보통 시편이 잘 나옵니다. 위치적으로 시편이 성경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이 여러분의 삶에서도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찬양이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2. 할렐루야!

본문 말씀은 “할렐루야 시편”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146-150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이 납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 한다는 히브리어입니다. 시편 150편은 겨우 6절로 되어 있지만 할렐루야가 13번이나 나옵니다. 

본문에서 “찬양하라” 는 모두 할렐루야의 번역입니다.시편은 의도적으로 할렐루야 시편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렐루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문구로 시작됩니다.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즐거움보다는 의무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율법은 아주 딱딱한 규칙으로 된 의무조항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입니다. 찬양은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다윗처럼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겨내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상황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나 자신을 바라보기 이전에,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아도, 나 자신을 바라보아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에 앞부분에서는 고난의 상황에 대한 한탄과 울부짖음이 중심을 이루지만,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신뢰의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잊는 접속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nonetheless)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찬양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고백이 없으면 찬양할 수 없습니다. 찬양은 대중가요 콘서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다릅니다. 일반 음악이 자기중심적(self-centered)노래라고 한다면, 찬양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중심적(God-centered) 노래입니다. 

1) 1절: 성전과 궁창에서 부르는 찬양

말씀은 찬양이 불리는 두 개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다른 하나는 궁창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임재하시는 땅, 곧 성소와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궁창(하늘)이 찬양의 장소입니다. 궁창은 하늘이라는 말보다는 우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표현할 것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주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배에서 찬양은 아삽(지휘자)을 포함하여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대상 16: 4-6)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솔로몬 시대에 성전에는 성가복을 입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200,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궁창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수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계 6-11-13) 신약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 성령이 거하시는 당신이 부르는 찬양은 어느 곳에서든지 성전에서 부르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소우주이다. 당신의 찬양은 하나님의 보좌를 울리는 찬양이다. 

2) 2절: 하나님의 능하신 행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능하신 행하심이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출애굽입니다. 모세 5경은 창세기, 즉 창조와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는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이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계기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찬양합니다. (예: 시편 78, 136편)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능하심과 광대하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처럼 죄의 땅을 떠나 구원의 물(세례)을 지나서 약속의 땅, 즉 구원의 하늘나라까지 오게 된 사건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건은 한 번의 축제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일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영원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이것은 우리가 불러야 할 영원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가정, 자녀로 인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3) 3-5 모든 악기로 찬양하라

마이클 카드라는 CCM 작곡가는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앞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반응하는 삶이며 그러한 반응을 창조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에는 다양한 악기가 사용됩니다. 나팔(트럼펫)소리는 찬양을 알리는 시작입니다. 비파(하프)와 수금(7현으로 된 악기)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소고(탬버린)는 음악에 리듬감을 살려주는 타악기입니다. 그리고 퉁소(플루트)와 같은 목관악기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높은 소리가 나는 제금(심벌, 징)과 같은 악기도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악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한 악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형태의 악기가 동원될 수 있으며 우리는 최고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에는 성악과 악기뿐만 아니라, 춤이 포함될 수도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성전으로 옮겨질 때에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신나게 춤을 추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삼하 6: 14)149편은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하라” 고 합니다. 또한 박수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 1) 이사야는 만물이 찬양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사 55: 12) 

탈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했던 일이 바로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는 홍해를 건넌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15장에는 구원의 노래가 따라 나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를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1-2) 바로 이 때에도 악기가 동원되고 춤추며 찬양한 모습의 흔적이 보인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 20)

4) 6절

시편의 마지막의 표현은 놀랍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호흡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호흡하는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시편 148은 찬양을 해야하는 모든 종류를 언급합니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7-13) 

즉,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호흡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타면 찬양이 없는 삶은 곧 의미 없는 삶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호흡이 있다면 찬양해야 합니다. 숨이 다하기까지 찬양해야 합니다. 

사람은 건강할 때 자신이 호흡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호흡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신체기관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생기면 호흡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몸이 아프고, 호흡이 어려워질 때,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 그 때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솔로몬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 1)고 말합니다. 호흡이 가빠질 때 자신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이미 너무 늦습니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이 복된 사람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하나님을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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