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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긴과 보아스 2 (히 13:17, 벧전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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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2 (히 13:17, 벧전 5:1-4) 
 
 
❚문제가 생겼을 때

지난 9월 청주 상당교회에서 개최된 본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6회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몇 차례 교단총회를 참석하면서 누가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되실까를 비롯해 매번 이슈가 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번 총회에 가장 큰 이슈가 된 문제는 서울에 있는 한 대형교회의 분쟁 문제였습니다. 이 교회의 분쟁에 있어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단에서 좋은 일, 발전적인 일로 이슈가 되지 못하고 교회분쟁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 느꼈습니다. 

우리 교단을 대표하는 대형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니 이렇게 총회까지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특히 총회 장소인 청주 상당교회에 들어가는 입구에 수많은 사람들이 좌우에 도열하여 한 쪽에서는 “삯꾼 목자는 물러나라!” 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고, 또 반대편에는 “우리는 담임목사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니 총회 기간 내내 제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늘에는 “누구누구 물러가라” 하고 쓰인 대형 애드벌룬까지 떠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물론 교회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오면 “천사들만 날아다니는 줄” 알고 왔다가 나와 똑같은 사람인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천사가 사는 곳이 아니라 다 똑같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때론 실수도 있고 부족한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성도도 완전하지 않고 목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좀 서로 마음 상하는 일도 생기고 불편한 일도 생깁니다. 사람이니까요. 문제는 그런 일이 생긴 다음입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문제 생기는 것은 똑같은데 문제가 생긴 다음에 해결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문제 생기면 서로 잡아먹듯 달려들고, 수단방법 안 가리고 저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라면, 성도들이라면 세상의 방법과는 좀 달라야지요. 그런데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세상 사람들도 안 쓰는 방법까지 쓰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아무리 서로 싫고 미워도 이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교회나 우리 성도들 사이에는 아무 어려움이나 나쁜 일이 안 생기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도 부족한 사람이다 보니 어려운 일, 힘든 일 생길 수 있습니다. 서로 마음 아픈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도’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거룩할 성(聖), 무리 도(徒),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문제 생겨도, 또 아무리 미워도 세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고, 그래야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혹시 어려운 일, 미운 일 생기면 교회답게, 성도답게 해결하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선한 목자

지난 시간,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야긴과 보아스처럼 교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 교회의 기둥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성전의 아름다운 기둥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교회를 받치는 또 다른 야긴과 보아스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야긴과 보아스, 기둥은 바로 양과 목자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하고 목회자들을 목자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성도들과 목회자의 관계,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아름답고 좋아야 교회가 평안하고, 그 교회가 진짜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참된 목자,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선한 목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월급 받고 양을 돌보는 삯꾼 목자는 이리나 사나운 짐승이 양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면 양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왜요? 그야 ‘내 양’이 아니니까 괜히 그 양을 위해 목숨 걸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선한 목자는 다릅니다. ‘내 양’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목숨 걸고 맹수와 싸웁니다. 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죽을 죄인 우리를 살리려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또 다른 ‘작은 목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내 양들을 네가 좀 잘 돌봐줘라.” 하고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 21장) 하신 것처럼 작은 목자들에게 주님의 양들을, 생명 걸고 지킨 성도들을 맡기셨는데 그것이 바로 목회자들입니다. 저 같은 목회자를 목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양을 치듯 주님이 맡기신 성도들을 돌보고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맡기신 양들을 잘 쳐야 합니다. “양을 치라”고 하니까 가끔 양을 정말 ‘치는’(때리는) 목자들이 있어요. 아닙니다. 양을 때리라는 것이 아니라 양을 잘 돌보고,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선한 목자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참 부담스럽네요. 목자가 사나운 짐승이 달려들면 내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것처럼 성도들이 힘들 때, 어려울 때, 위기에 처했을 때 내 모든 것을 내놓고 아낌없이, 그야말로 생명 걸고 지키고 도와야 선한 목자입니다. 여러분도 제가 그런 목자가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세요. 저도 이런 선한 목자 되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양들에게 좋은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요 10:9). 성도들에게 먹이는 좋은 꼴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입니다. 목회자들은 심방도 중요하고, 교회 행정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성도들에게, 양들에게 말씀의 좋은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저도 늘 말씀의 좋은 꼴을 먹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받을 상

마지막 셋째,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개의 본문 중 하나인 베드로전서 5:1-4에 나옵니다. 함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여기 나오는 ‘장로’란 말씀을 전하는 장로, 즉 목사를 뜻합니다. 그러나 치리를 담당하는 장로인 우리 교회 장로님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 즉 주님이 맡기신 성도들을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기꺼이 그 직무를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또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목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목사직이, 장로직이 명예직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죽도록 섬기고, 손해 봐가면서, 줄 것 다 줘가면서 희생으로 감당해야 할 자리입니다. 그래서 힘든 자리입니다. 여러분, 목사직이, 또 장로직이 화려해 보이십니까? 아니요. 천만에요. 오히려 힘들고 서러운 자리입니다. 가장 많이 참아야 하고, 가장 많이 손해 봐야 하고, 가장 많이 희생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하나님, 내가 왜 이렇게 손해 봐야 합니까? 왜 나만 참아야 합니까?” 하고 불평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목사야! 너 그런 줄 모르고 목사 됐니? 그런 줄 다 알면서도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하고 가지 않았니? 그런데 왜 딴소리냐?” 하십니다. 나 참... 그러니 할 수 없지요. 나를 위해 하지 말고 절대 내 유익이나 편리를 위해 하지 말고 그저 맡기신 목양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밖에요. 그래서 본문에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문제 생기는 교회를 보면 예외 없이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자기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고(=주장) 고집 부리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그리고 장로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맡은 자들, 주님 맡기신 양들에게 주장하는 자세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고집,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지 말고 오직 방법은 하나, 양무리들의 본이 되어 그들을 감화시키고 스스로 따라오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힘들지요. 저도 그렇고 우리 지도자들 꼭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그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4절을 읽을까요?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목자의 사명을 힘들어도 어려워도 감당할 이유는 단 하나, 세상에서 갚아주고 사람이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목자장, 누굽니까? 바로 원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재림해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기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저는 바로 이 상급만 바라보고 오늘도 양을 돌봅니다. 장로님들도, 또 교회의 지도자들도 다 이 소망만 붙잡고 맡으신 일 감당하기 바랍니다.

❚양들이 할 일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그게 바로 또 하나의 본문인 히브리서 13:17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성도들에게, 양들에게 너희를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들은, 목자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성’이란 “깨어서 지킨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고 지키느라 잠도 못자고 깨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은 양떼인 성도들을 돌보고 지키느라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필요로 한다면 밤도 낮도 없습니다. 늘 긴장해 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부르면 내 일 만사 제쳐 놓고, 가정과 자녀들까지 제쳐두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떤 날은 정말 잠도 못 이루며 근심하고 아파할 때가 있습니다. 이게 목자의 심정입니다. 또 ‘청산한다’는 말은 ‘결산보고’라는 뜻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말입니다. 

앞서 베드로전서 5:4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아무 목자나 다 면류관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철저하게 결산보고를 듣고 상급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결산보고겠습니까? 우리 교회 커피밀은 하루 영업을 마치면 반드시 결산을 합니다. 오늘 얼마 팔았고, 총수입이 얼마고 반드시 결산을 해야 그날 영업이 마치는 것입니다. 결산은 철저해야 합니다. 결산하다가 10원이라도 틀리면 맞을 때까지 계산하고 또 해야 합니다.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 재림하신 목자장 주님 앞에 서서 마지막 결산보고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게 맡기신 양 중에 몇 마리가 살고 몇 마리가 죽었습니다. 몇 마리가 도망치고 행방불명되고, 몇 마리가 새로 오고, 몇 마리가 아프고, 몇 마리(여러분보고 자꾸 ‘마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총 결산이 이렇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목자장은 그 결산보고를 듣고 목자에게 뭘 줄지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목자는 시들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야고보서 3:1에 그 답이 나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최종 결산보고에 따라 목자는 더 큰 심판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야긴과 보아스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장이신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양 여러분,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성전을 받치는 것처럼 교회에는 두 개의 기둥이 튼튼하게 서서 교회를 떠받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양떼인 성도들과 목자인 목회자입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아름답고 귀해야 그 교회가 삽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자는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숨도 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참고, 어려워도 잘 견디며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즐겁게 목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7 뒷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성도들은 목자가 즐겁게 행복하게 목회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 유익이 되고 성도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젖소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유 맛이 쓰고 질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힘들고 스트레스 받으면 거기서 나오는 말씀의 꼴이 좋을 리 없습니다. 목회자가 즐겁고 행복하면 저절로 가장 좋은 말씀의 꼴이 나올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한 간구가, 축복의 기도가 절로 나올 것이고 그 기도는 자연히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은 목자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최종 결산보고를 해야 함을 잊지 말고 그 보고를 잘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성도들보다 더 큰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시들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셔야 합니다. 이렇게 목자와 양이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서로 도우며 배려하고 세워주면 됩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형성되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늘 평안합니다. 화평하고 은혜롭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부흥과 성장이 뒤따르게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목회지로 효자교회를 만나게 하신 일입니다. 세상에 힘든 교회도 많고, 어려운 교회도 많다는데 효자교회 같은 좋은 교회를 목양지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세상에 힘든 성도도 많고 힘든 당회도 많아서 “회 중에 제일 맛없는 회, 목 먹을 회가 당회”라는 말도 나오는데 저는 정말 좋은 성도들을 만나고, 좋은 장로님들 만나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어디 가나 우리 교회와 성도들, 장로님들 자랑을 합니다. 정말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라고 부른 것이 실감이 갑니다. 그렇게 자랑을 하면 약 오른 다른 목사님들은 “이제 교회 자랑 좀 그만 하라”고 “팔불출 같다”고 핀잔을 줍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더욱이 성전 건축 후 교회 분위기가 더 좋아지고, 성도들과 장로님들이 더 저를 사랑하고 도와주셔서 제가 더 행복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아무쪼록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목회하겠습니다. 더 성실하게, 그리고 정말 목숨까지 바쳐 양들을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늘 주의 종들과 장로님들과 지도자들 위해 기도하고 도와 그들이 더 즐겁게, 더 행복하게 목회하고 여러분을 이끌 수 있도록 돕는 성도 되셔서 우리 교회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협력하고 도와 튼튼히 서는 아름다운 교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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