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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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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하나님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I. 본문해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호칭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누구든지 단지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만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체로 믿는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여러분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II. 하늘에 계신 하나님 

A. 유대인의 하늘개념 

오늘은 하나님을 수식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먼저 유대인의 하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단수로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호 엔 호 오우라노스’(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삼중의 하늘로 생각했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이 있고 어떤 악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가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한 것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에 계시지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과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악의 하늘도 주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도할때마다 명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나님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유대교적 표현은 하늘 영광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나라의 기원이 하늘과 관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앞에 기도하는 우리는 땅에 있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인간도 그 범주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B.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서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를 이 질문에 비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편견과 아집에 강력하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렷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기뻐하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성격들을 성경 계시의 빛으로 해석해서 올바른 지식으로 드러내어 누구든지 그 지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모두 합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남아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정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든 인간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연속성을 이루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질적인 격차를 성경은 거룩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빽빽한 구름과 천둥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들려주신 율법속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선언이 묻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까지 백성들을 탄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택 받은 백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위기를 만나고 핍박을 당할 때 매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룩하심이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사도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신명을 바쳐 가르치려 했던 교훈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갇힌바 된 몸임에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거룩하심은 피조물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한적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과 제도, 물건과 도구들에게까지 이 거룩하심을 분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이후 거룩함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실 때 우리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임이 거룩할 리가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거룩하신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한 성도의 무리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거룩하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며 나의 지성을 넘어서는 무한히 광대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의 벼락을 맞고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무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은 곧 가치의 크기와 위대함과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후’하고 부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도 드러나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당신의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십니다. 

한 가지 예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사랑도 있고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아도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랑 받는 것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율법을 통해 자신이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차마 인간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며 바로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고 자신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도 죄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얼룩으로 물든 자신의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생각과 기대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3.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각을 하나님을 높이면서 표현하는 정수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건으로 경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건성의 삶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끝나도 종류만 다르지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문제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나도 해결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문제들에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수록 눈을 들어 위에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땅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우러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충만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주권을 앙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릴 수 있게 됩니다. 

IV. 결 론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이 땅에서 생겨났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도록 그 분을 앙망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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