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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마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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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마 6:5-6)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한 한 학기동안 그랬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심리적인 이유였습니다. 모든 종교, 특별히 기독교는 인간의 약함을 커버하기 위한 지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열등의식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약자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나는 강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없이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지적인 이유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 유독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을 요구할까? 하나님이 없는데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윤리적인 이유였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윤리적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먹히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서 윤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해야만 사람들이 착하게 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여러 가지 의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할까, 얼마나 세상이 무서울까? 이런 느낌을 가졌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의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느냐. 직접적인 계기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기도원에 찾아간 것입니다. 토론토에 있는 작은 기도원. 기도원이라고 하기 보다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산에 있는 기도원이 아니고 도심 한 가운데 있는 교회입니다. 

그날 마침 여름 수련회를 마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해산하기 전에 기도원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기도받기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저도 기도를 받아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앞으로 나갔는데 학생들이 제 주위에 모이더니 와글와글 대면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더니 한 학생이 저를 보고 밝게 웃으면서 ‘형님에 대해서는 저의 어머니를 통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저의 기분을 좋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당신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듣는 저보다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더 기뻐보였어요. 정말 기쁨이 충만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그런데 당신이 의심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저에게 예언을 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마치 레프트 훅을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저에게 확인시키셨습니다. 어떤 이론적인 방법으로 설득시키신 게 아니고 성령의 은사와 나타남으로 이론보다도 더 강력한 방법으로 당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날 그 기도원에는 저만 간 게 아니고 제 교회 친구도 자기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는데 그 친구가 교회에 온 이유는 자명했습니다. 묻지 않아도 뻔했습니다. 메디컬 스쿨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토론토에서는 학부 2학년을 마치면 메디컬 스쿨에 지원할 수 있는데 그 친구는 공부를 그렇게 잘한 게 아니었습니다. 성적이 아주 아슬아슬한 상태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위하여 그 기도원에 온 것입니다. 몇 달 후에 들은 얘기지만 그 친구가 합격했어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지요. 그날의 기도회는 참 소득이 많은 기도회였습니다. 저는 잃어버렸던 믿음을 회복하고 그 친구는 소원을 이루고. 물론 저의 영적인 회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날이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저의 모든 의문에 답을 얻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습니다. 

첫째로 저의 심리적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는 먼저 내면적인 치유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심리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의심했던 이유는 제 안에 상처와 열등의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만져주심으로만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약하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람이 강해보이는 것은 약함을 숨기기 위한다는 것, 그리고 저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저의 허영 ․ 저의 죄 ․ 교만 이런 것을 회개하면서 어두운 생각이 저를 떠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저의 지적인 의심, 왜 세상의 다른 것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만 믿음을 요구할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현실은 육신의 감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소위 오감, 보는 것 ․ 듣는 것 ․ 냄새 맡는 것 ․ 맛보는 것 ․ 만져보는 것, 이것이 인간의 육신의 오감인데 인간의 오감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소위 육감이 필요합니다. 

Sixth Sense. 식스 센스라는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육신의 오감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기능이에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위대한 기능,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성숙하게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이 위축되고 사람은 짐승처럼 동물처럼 육신의 감각에만 의지하면서 살게 되니까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없는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사용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졌던 세 번째 의문, 도덕적인 의심, 하나님의 존재를 설정해야 도덕적인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고 사람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 이것은 사실 이론적으로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초 인류의 문명이 시작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건 오래된 과거이고 윤리와 종교가 어떻게 서로 발전했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종교적인 제재, 윤리적인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야만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고, 따르려고 하지도 않고, 어떤 것도 믿지 않고 자기의 욕심대로 자기의 본능대로 살아요. 그런데 그런 야만인이 과연 제일 행복한 인간이라는 말인가. 그런 야만인이 우리는 부러울까. 그게 제일 바람직한 존재양식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야만인은 일단 일찍 죽습니다. 그의 인생이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정글의 법칙대로 삽니다. 삶이 불안정합니다. 누군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를 죽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삶입니다. 오늘날도 약육강식으로 사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교도소입니다. 

우리나라의 교도소는 그래도 점잖은 것 같은데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교도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런 사회가 좋아서 교도소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어떤 규칙을 따라 사는 것이 안전하고 평안하고 생존에 도움이 되고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많이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인류는 오래전부터 뭔가 신앙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신다는 것. 그러니까 오래전에 어떤 강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윤리와 도덕의 규칙을 정한 다음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하게 된 게 아니고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인류가 규칙도 없고 법칙도 없고 야만인처럼 살았더니 영혼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또 그처럼 미련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필요를 느끼고 돌아왔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찬송가 가사와 비슷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외롭고도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아멘’ 이 위대한 실험, 인류의 great experiment-인류의 위대한 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런 규칙 없이 아무런 제재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보는 경험은 실패로 끝났어요. 마치 공산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하나님 없이 아무런 규칙이나 법규에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려는 실험은 실패로 끝났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생각에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주제는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건 이미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미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은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의심이 있고 차라리 안 믿는 사람의 의심보다는 믿는 사람의 의심이 더 무섭고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답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것이 신앙생활 전체에 힘과 확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중에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것뿐만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은밀한 중에 계십니다. 안 계시는 것 같은데 계십니다. God who is in secret. 은밀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복음성가 가사처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이 가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이 실존적인 방법으로 경험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안히 길을 갈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다가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 그때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실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마는 더 정확히 말하면 평소에 우리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방법을 좇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우리의 영혼과 영성을 사용하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은밀히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방법으로 그분을 예배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우리도 그러므로 신령,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가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고 영성과 영혼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기도원과 수도원의 차이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도원은 시련 중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수도원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러 찾아가는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원은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수도원 운동은 기독교 전통에 있어 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동네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세상동네로 와주시기를 기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좀 더 기존의 세상에서 당신을 드러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좀 더 보이는 세상에서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면 나도 하나님을 믿기 쉽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따를 텐데 왜 하나님은 좀 더 정치, 경제, 세상 이런 데에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 이건 정당한 질문이에요. 

이 정당한 질문은 정당한 답변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실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얼마든지 하실 때가 있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상에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동네에 오시기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하나님 게신 곳으로 가야지 왜 하나님이 자꾸만 내가 있는 곳으로 오시기를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삐지고 시험에 들고 의심에 듭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그렇게 많이 행하시면서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기적 위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믿음이 따로 필요 없어요. 그냥 눈앞에 기적이 나타나는데,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어요. 

‘하나님을 믿으라. 너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할지라도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리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감각에 의존하는 인간은 어린아이와 같아요. 아기들은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웁니다. 아기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른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친구와 가족과 또 나가서 하나님과 진리를 믿을 수 있는 그런 담대함과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자신의 감각만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지극히 어린 인간입니다. 유치한 인간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키우고 영적인 면을 발전시키는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더 너그럽고 더 의롭게 행할 수 있고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통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골방의 경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골방이 있어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과 주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 예배, 영성, 성령, 말씀, 묵상, 교회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어떠한 기술도 이러한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 어떤 애플리케이션이 나의 영성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내 골방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내 은밀한 골방이 필요합니다. 성령운동은 좀 무식하게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간파했어요.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적인 방법으로라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인간이 하나님을 놓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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