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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화속에 화목하는 교회로 사명 감당합시다 (엡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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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장2절로3절 조화속에 화목하는 교회로 사명 감당합시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증거하는 공동체"라는 책에는 "현대인은 웅성거리며 복잡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보다 더 고독한 삶도 일찍이 없었습니다.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 모두가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에 의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정신생활이 날로 공허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서든지 사람들은 '공동체'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전정한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에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소명과 책임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발된 공동체요 증거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으로 다시 파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스위스 보세이 인스티튜트 성서연구원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여사 저)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합니다. 그러므로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소망도 하나이기에 성령 안에서 신자들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자기주장과 아집과 이익에 얽매여 당파를 짓고 나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고들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한 분인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소망으로 서로 일치하고 하나가 되며 조화속에서 화목할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준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회원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단체의 회원들 보다도 가장 친밀하고 화목하며 하나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엡 4:3-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2:13-16)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같이 교회의 회원들은 동일하신 하나님과 주님을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동일한 피로 구속,곧 죄사함을 받았으며 동일하신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임의 말씀 안에서 동일한 구원의 약속을 받아 동일한 소망 곧 하늘나라의 기업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 사회의 어떤 단체를 하나로 만드는 요소들인 사업의 공동 목적,우정,혈연들보다 더욱 강력하며 확고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회원들은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또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사랑하며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유형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이런 현상들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정욕에서 나온 산물임을 성경 말씀합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7살 난 아이가 5살 난 자기 동생을 얼마나 때리고 못살게 구는지 모르는데 어느 해 성탄절이 되어 아이가 자면서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것을 부모가 보게 되었다합니다. “산타 할아버지 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년 빠지지 않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산타할아버지를 참 사랑합니다. 제가 갖고 싶은 것은 팽이와 야구게임CD 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이 편지를 본 부모는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가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디서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준다는 말을 들었는지 “그런데 한 가지 죄송한 것이 있습니다. 제 동생을 때리지 않고 사이좋게 나누어 갖고 잘 지내겠습니다. 저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맨 아래 별표로 강조하면서 쓴 말이) ★ 흰 조끼를 입고 있는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라는 글이었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 회개해 놓고 혹시 동생에게 그 선물이 갈까봐 자기 존재를 산타할아버지께 알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이자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을 동조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당파를 짓고 연합합니다. 
예수 당시에도 율법과 의식에 매여 자기들의 교리를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질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외식적 율법주의와 당파적 교리 싸움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며, 불신자들로 기독교를 불신케 하며, 신자로 낙망케 하는 엄청나게 악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피차 멸망 할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스스로 분쟁하여 나뉘고 다투는 것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패망과 자멸입니다. 그 원리는 개인에게도, 집안에도, 나라에도, 또한 신앙 안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 합니다.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도, 믿음도, 성령도, 소망도 하나이기에 우리가 분열과 나뉨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게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불신앙을 가슴 깊이 통회하며 조화 가운데 화목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명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 넷이 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아!' 라고 불렀다면 네 아들 중에 어느 아들이 대답하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네 아들 모두가 '예!'하고 아버지께로 달려갈 것입니다. 아버지는 네 형제 모두를 낳았고 사랑으로 양육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시며, 네 형제 모두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요 자매 된 성도들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신바 되었습니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그 부르심에 응답할 의무가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의 부르는 음성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정녕 불효자식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한 형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딴청 부린다면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목전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조화되고 화목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먼저 희생하는 정신이 요구됩니다

(요 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동그라미 선생님”이란 글은 경북 경산에 사는 이영주 님이 쓰신 글이라 합니다. 학생 시절 말수가 적고 자신감이 없었던 그녀는 교실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특별히 수학 선생님을 싫어했었다고 회고합니다. 답이 틀렸을 경우 다른 아이들은 야단 한번으로 끝났지만 그녀의 경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서 있는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벌을 받다 마침내 눈물을 흘린 어느 날 선생님은 그녀에게 “네가 유독 맘이 약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여 자신감을 키워 주려고 했다“고 말씀했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선생님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졸업 후 어느 날 그녀는 친구로부터 그 수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만 미워하던 선생님이어서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도 마음이 오히려 냉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그때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영주야, 돌아가신 선생님 책상 유리아래 우리 반 학생들 사진이 발견되었는데--영주야 네 얼굴이랑 몇몇 애들 얼굴에 동그라미를 쳐 놓으신거야 지금도 왜 그리하셨을까 궁금해“ 이 영주라는 분은 무심코 ”선생님이 나를 말썽 많은 아이로 찍으신 것이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영주라는 분은 자기 책상을 정리하다가 여고시절 학교 신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뜻 밖에 학교 시절 신문을 뒤적이다가 고인이 된 선생님의 에세이 글을 읽는 도중 그만 그녀의 눈은 흐려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게 되었다 합니다. 그녀는 동그라미의 해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의 에세이는 이런 말로 끝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동그라미를 제일 좋아합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많은 동그라미 제자를 만들어 내는 교사이고 싶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선생님이 자신의 모나고 거친 성격을 다듬어 동그라미로 빚어내고 싶어 하셨던 선생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그녀는 방바닥에 엎드려져 흐느끼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큰 동그라미가 될게요. 동그라미 제자가 되겠습니다.”(이동원 목사 설교중)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한 형제 된 성도들과 교회는 조화 가운데 일치되며 화목하여야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주님의 명령이요, 주님이 교회를 향하여 지금도 행하시는 간절한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사실 교회도 조화와 화목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였습니다. 왜입니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따르는 실천적 사랑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주장을 버리고 겸손히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어느 교회에서 있은 일이라 합니다. 교회에서 피아노를 새로 하나 사다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 예배실 앞에 오른편에 놓았다고 합니다. 한 주일 지난 다음 한 장로님이 오른편에 놓으면 미관상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왼편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 와보니 피아노가 왼편에 있으니 오른편에 놓게 했던 장로님이 보니 자기한테 묻지도 않고 왼편으로 옮겼거든요. 

마음 속에 퍽 불쾌하게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 날 예배당에 와서 피아노를 오른편쪽으로 또 옮겨 놓았습니다. 아무개 장로도 나한테 묻지 않고 옮겼는데 내가 의논할 것이 뭐 있나? 이래서 피아노는 매주일 자리를 바꾸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매번 옮기다 보니까 피아노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장로 사이에 서로 말도 하지 않게 되었고 피아노를 매주 일 끌고 다니다 보니 앞에 깔았던 주단도 다 해지고 말았다합니다. 그러니 그 교회는 무엇이 되었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박조준 목사 설교 중)

이러한 일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옛날 어느 숲속에 공작새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에게 예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딸 공작새는 곱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숲에 살고 있는 공작새 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간지 채 한 달도 안되어서 딸 공작새가 풀이 푹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왔습니다. 어미 공작새는 걱정이 되어서 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얘, 왜 그러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딸 공작새는 어미 공작새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도무지 외로워서 살 수가 없어요. 숲의 새들이 다 나를 따돌리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딸 공작새의 말을 들은 어미 공작새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얘, 너 아무데서나 네 꽁지를 활짝 펴 보이면서 뽐내었지? 어때? 내 말이 틀림없지?" 딸 공작새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듯이 어미 공작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이 아름다운 꼬리는 우리 공작새에게만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새들에게 그것을 조금 펼쳐 보여주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되었나요?" 그때 어미 공작새는 딸 공작새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얘야, 내가 한 번은 숲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단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이렇듯 점잖게 타이르더구나! '여보게, 자네의 대화 가운데서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좀 빼게나. 영국의 골퍼들 사이에서는 젠틀맨 골프 상식이라는 말이 있다네. 만일 좌중에 한 사람이라도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절대로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지 않는다는 걸세.' 얘야,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딸 공작새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집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뒤 그는 다시는 풀이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숲속에 있는 다른 새들과 잘 어울려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치와 하나되어 조화속에 화목됨을 명령하시는 주의 음성을 시행해야 합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데이빗 리빙스턴의 전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영국의 기자 가운데 스탠리 라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1871년에 아프리카로 데이빗 리빙스턴을 찾아갑니다. 취재하기 위해서 찾아갑니다. 그 당시 영국에는 유명한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루머가,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 뭐냐하면 리빙스턴은 성자다. 그가 아프리카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한 쪽에서는 데이빗 리빙스턴은 사기꾼이다 그는 선교비의 많은 돈을 가로챘다 그리고 심지어는 원주민들 가운데서도 그의 지도를 받지 않고 지금 이탈하고 있다. 엇갈리는 두 개의 보도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자는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밀착취재를 합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3개월 이상 밀착취재를 하면서 데이빗 리빙스턴의 일거수일투족의 생활을 추적하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났습니다. 4개월 후 이 스탠리라는 기자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 당신이 리빙스턴한테 전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리빙스턴은 나에게 예수 소리 한 번도 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느냐?고 묻자 내가 가만히 보니까 정말 리빙스턴은 엄청난 오해를 받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안팎으로,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도 모든 선교사들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그를 배신하고, 그는 엄청난 코너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지켜보면서 놀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어려운 고난을 엄청나게 참을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참게 만드는가?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인내만은 아닐 것이다. 신앙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데이빗 리빙스턴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하나 됨의 생활 곧 조화와 화목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 됨'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조화와 화목을 이루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매는 줄'(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조화와 화목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Calvin, Bruce).
'힘써 지키라'(스푸다존테스)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리킵니다(Blaikie). 이것은 평안을 통해서 조화와 회목을 이루는 것이 매우 급박한 것이며 단호한 결심이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일임을 나타냅니다(Wood, Lincoln).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 하며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명 감당 하되 조화속에 화목하는 교회로서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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