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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롬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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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롬 8:1-4) 

  
시골 어느 마을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혼자된 여인이 있었다. 아들은 잘 장성해서 어른이 되어, 가난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마을을 떠나, 외국으로 갔다. 여인은 교회에 가서 아들을 생각하며, 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동네 사람들은 여인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아들에게서 잘 있다는 소식은, 자주 오나요? 돈은 부쳐 오나요?" 그럴 때마다 혼자된 여인은,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을 했다. "예 그저, 잘 있다는 소식밖에는 없었습니다." 혼자된 여인의 몸은,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점점 야위어갔다. 
목사님이 그 모습이 너무 딱해서, 하루는 쌀 한 말을 사들고 심방을 갔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아들이 집을 떠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돈을 부쳐오지 않았어요?" 그 소리를 듣고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목사님은 혹시나 하면서 물었다. "혹시 편지 속에, 다른 것이 들어있지는 않던가요?"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 편지 속에 종이조각이, 늘 하나씩 들어있기는 했다." 목사님은 '그러면 그렇지!'하면서, 여인에게 종이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것은 아들이 외국에서 보낸 수표였다. 영어로 잔뜩 쓰여있으니까, 엄청난 돈임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다. 

여인은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한 푼도 쓰지 못하고,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신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다. 그것을 깨달아 알아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유대인의 민담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등에 업고서, 길을 걸어 가다가, 친구를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가 물었다. "여보게, 자네 등에 업고 가는 아이는 누구인가?" "우리 아들일세." 짓궂게도 그 친구가, 이번에는 등에 업혀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너를 업고 가는, 이 사람이 정말 너의 아버지냐?" 그러자 아이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땅에 내려놓고 "내가 지금 너를 등에 업고 가는데, 너의 아버지인줄 모른다니 무슨 말이냐?"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나를 등에 업고 간다고,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나요? 일군들도 나를 등에 업어주고, 옆집아저씨도, 업어주지 않나요?"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먹여 살리겠느냐?" 그러자 아들이 또 이렇게 대답했다. 

"먹여준다고, 무조건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삼촌도 나를 먹여주고, 다른 사람도 먹여줄 수 있어요?" 그러면서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 아버지라면, 보다 확실한 증거를 대보세요." 혹시 이것이, 우리 모습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에, 지극히 사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기까지 사랑하셨다. 지금도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고, 풍성하신 복을 주신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면 '아멘'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하고, 놀라우신 복을 주셨는데, 과거의 죄에 매여 계속 살아가면, 십자가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결코 정죄함이 없다(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이 한 번 선언하시면, 취소할 수 없다. 

왜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가?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아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난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유죄판결이 있기에, 하나님의 심판,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지나갔다. 애굽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죽음이 있어 큰 울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죽음의 사자가 피해 갔다(출12:23, 30). 어린양의 피가 칠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리고 성을 멸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살았다. 창문에 붉은 줄이, 매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줄이 매어 있으면, 그 집을 멸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라합의 창에 매어진 붉은 줄을 보고서, 그 집은 멸하지 않았다. 그 외에 여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수2:18-21, 6:25).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피난처가 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서도,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말이다. 

마귀는 간교해서, 과거에 지은 죄를 자꾸 생각나게 만들어서, 죄책감 가운데 몸부림치게 만든다. 그래서 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야 한다.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이 되면, 악한 마귀의 간계를 물리칠 수 있다. 

과거에 지은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이 말씀을 외치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때 악한 마귀는, 물러갈 것이다. 인도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다. 어떤 마술사가, 쥐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하루는 마술사가, 쥐를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계속해서 벌벌 떨고 있다. 그래서 마술사는 쥐에게 물었다. "쥐야! 너는 뭐가 그리 무서워서 벌벌 떠느냐?" 쥐가 대답했다. "예. 고양이 때문에 그래요. 언제 고양이가 나타나서, 나를 물어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마술사는 그 쥐를 불쌍히 여겨, 마술을 부려, 그 쥐를 고양이로 바꾸어주었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계속 떨고있었다. 마술사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떠느냐?"고 물었다 "개 때문에 무서워서 떤다. 언제 개가 나타나서, 내 목덜미를 물어 나를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술사는 고양이를, 개로 바꾸어주었다. 그런데도 계속 떨었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떠느냐?" 개는 "호랑이 때문이다. 눈을 감으나 뜨나 계속해서, 호랑이가 어른거려 무서워 견딜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마술사가 이번에는, 개를 호랑이로 바꾸어주었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을 텐데, 호랑이가 되어서도, 벌벌 떨었다. 포수가 나타나서, 총으로 쏘아 죽일까봐 떨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그래서 마술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쩔 수 없이 구제불능이니, 다시 쥐가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는 다시, 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으면, 아멘 하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라. 더 이상 과거의 죄에 얽매이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복된 삶을 누리기를 바란다. 

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2가지 원리가 나온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또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똑같은 말씀을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은혜와 법으로 대조했다. 우리가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법 아래 살았다.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한 마음으로 섬겼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었다. 우리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100%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안에 산다. 해방되었다는 말은, 신분이 변했다는 말이다.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는 영의 새로운 것과, 의문의 묵은 것으로, 대조하고 있다. 똑같은 말씀이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억지로 섬겼다. 문자에 매여서 살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문자에 매여 섬기지 않는다. 영의 새로움으로 섬긴다. 기쁨이 충만해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섬긴다. 

법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산다.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눅15장)에 탕자가 나온다. 탕자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재산을 다 없앴다. 이제 뉘우치고 돌아온다. 그때 탕자는 "내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한, 큰 죄를 저질렀으니,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가!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씀을 드려야지."(눅15:18)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다 용서하시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온다. 아직도 거리가 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쉽게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겨 뛰어갔다.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었다. 가장 좋은 옷을 갈아 입혔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인가? 아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다 용서하고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잠시 뒤에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들어왔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줌을 보고 원망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위해서 지금까지, 뼈빠지게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심이 가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 이와 같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눅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신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싸울 때, 누가 우리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말로는 용서해 준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나중에 한 번 써먹으려고,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되, 깨끗하게 용서하신다. 두 번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다윗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죄를 저질렀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내보내서, 죽게 만들었다. 

간음죄 위에, 살인죄까지 지었으니까,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가?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깨달았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두손들고 처절하게 회개했다. 다윗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시고,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셨다. 다윗은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복 주셨다. 이스라엘의 성군,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다. 다윗의 뒤를 이어서,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과 밧세바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산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는 죄, 미래에 짓는 죄까지라도, 이미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부르신다. 

악한 마귀는 간교해서, 우리를 자꾸, 죄의식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죄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것이 마귀의 간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하게 시험을 이겨야 한다. 

3.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다(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일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단코 의롭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어떤 잘못도 없다.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 연약하기에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셨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은 죄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인간으로 보내서, 그 육신에 우리 죄를 정하셨다. 그래서 우리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하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바를, 다 지불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니"하면서, 죄를 범한 우리를 요구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범한 우리를 내어주지 아니하시고, 그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니 율법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율법은 죄 범한 우리를 요구했는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으니, 깜짝 놀랐다. 율법은 우리 죄를 드러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해결해 준다. 그러니 율법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온 천지 만물도 모두 놀랐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 한들 나의 아들까지 죽이면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결코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셨다.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다. 그런데도 아직 죄책감에 빠져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아직도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하신 그 엄청난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는가? 

우리는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기에, 육신대로 즐기면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잘못된 사람이다.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신 목적은,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라고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겠는가? 죄에서 떠나라고, 우리를 은혜 아래 살게 하셨는데, 은혜 아래 산다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있겠는가? 

탕자가 집을 떠날 때는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육신의 향락을 취하면서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아버지! 잘못했어요, 이제는 제 뜻과, 생각대로 살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며 살겠다." 

이런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삶을 성령께 맡기며 살기 바란다. 더 이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면서 살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해주셨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성령님께 맡기면서 살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으니까, 의롭게 살 각오를 하자.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불의의 병기로 쓰임 받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자. 이런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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