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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아디라 교회에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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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에게 (계 2:18-29)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18. . .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크리스천이 많아져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까요?

종종 사람들이 ‘믿음’의 문제와 ‘행위’의 문제를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좋은데 영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쉽게 말을 바꾸고, 그런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좋은 게 좋다!” “상황이 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태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의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꽃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7개의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이 가장 따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질책이 무섭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지켰던 행위들이 그럴 듯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꽃같은”이라는 표현은 23절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 .every church will know that appearance don't impress me. I x-ray every motive and make sure you get what's coming to you."
무서운 심판의 말씀인데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겉모습으로 예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x-ray를 통해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은밀한 죄, 부끄러운 죄, 부지중에 지은 죄, 의도적인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무서운 말씀이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urnace-fired bronze or burnished bronze"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발로 여기저기를 밟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버가모 교회에서 칼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불같은 발로 진멸하시는 무서운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와 동일한 칭찬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편지에도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 말씀인데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이곳 두아디라 교회에 상당히 실천적 사랑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굳건한 믿음과 소망과 인내를 가졌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내가 네 사업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업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전도하고 봉사하고 교육하고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끼리, 어쩌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도 관용하고 사랑하는 그런 교회였을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황이 결코 평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이런 도시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겠지요.

넷째,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섯째,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두아디라에 대한 칭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섯째,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바로 에베소 교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셨던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점점 더 나아졌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칭찬의 정도가 거의 완벽하지 않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또 두아디라 교회는 순교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켰지만, 나중에는 유혹을 당하여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버가모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잘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몰아치는 형편에서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에 살면서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님을 더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열심을 다 하느라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우리 신앙의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희생과 인내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2011년 3월 5일 조선일보에 재미있는 “인지 심리학 실험”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 보면 실험을 하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실험 동영상 있음)

‘보이지 않는 고릴라’ 책에 쓰인 내용은 과연 한국에서도 그대로 통할까.
조선일보에서는 2일 오후7시 인천 삼산 월드체육관에서 1997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된 심리 실험을 그대로 재현해봤다.
이날 경기는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와 서울 SK 전. 하프타임 때 이벤트 사회자 한세이씨가 관중들에게 문제를 냈다.
“지능 측정 이벤트입니다! 전광판 동영상을 보세요. 흰 옷 입은 사람 3명과 검은 옷 입은 사람 3명이 뒤섞여 각자 자기네끼리 패스를 주고받습니다. 흰 옷 입은 사람들끼리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세요.”
교정기 낀 초등학생부터 백발 할아버지까지 관중 2280명이 열심히 패스를 셌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패스 횟수가 아니었다. 

“방금 본 동영상에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나왔나, 사람만 나왔나”가 문제였다.
동영상 길이는 36초로, 하버드 실험을 설계한 대니얼 사이먼스와 대학원생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직접 만든 것이다. 
학생 6명이 패스를 주고받는 동안, 온몸에 검은 털이 숭숭 난 고릴라가 9초에 걸쳐 어슬렁어슬렁 지나간다. 학생들 복판에서 두 차례 가슴도 두들긴다.

이날 삼산 체육관 관중 가운데 주최 측에 문자를 보낸 사람은 총 580명이다. ‘고릴라를 못 봤다’는 사람이 315명 (54.3%)에 달했다. ‘사람 말고 뭔가를 봤다’는 사람들 (265명 45.7%) 중에서 고릴라라고 정확히 맞춘 사람은 205명, 개와 곰을 봤노라 주장한 사람은 60명이었다. 패스 세는 데 주의가 쏠려 코앞에 있는 고릴라를 놓친 것이다. 

하버드 실험에서도 “고릴라를 봤다”는 사람은 50%에 불과 했다. 97년 미국과 2011년 한국에서의 실험 결과가 거의 유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대로 확인됐다.
고릴라 실험의 주역 차브리스 교수에게 “한국에서 똑같은 실험을 해보겠다”고 하니 “결과가 궁금하니 꼭 알려달라”고 했다.

아마도 여자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고속도로 휴게실이나 공공 화장실에 보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아마도 오늘 말씀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을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이후의 흔적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 가운데 선한 영향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책망이 있었습니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앞에서 하셨던 칭찬이 무색하게 긴 책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상실한 그 어떤 덕목도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그 도시에서 영향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를 하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십니다. 
제가 요즘 한국교회 언론에 가서 설교한 것이 바로 “거룩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거룩함을 상실하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것이죠.
아마도 환경의 영향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칭찬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섭게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거룩함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팀 라헤이가 쓴 글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라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어느 부인 곁에 턱수염을 기른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기내 식사가 나왔는데 이 청년은 음식 먹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의 부인은 청년에게 몸이 불편하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고 금식 기도하는 날이기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그가 기독교인인 줄 알고 자신도 예수를 믿노라고 밝히면서 청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오, 나는 사탄 숭배자입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 목회자들과 크리스쳔의 가정과 결혼생활을 파괴하기 위해 사탄 교회 지도자들이 매주 화요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덧붙여 "우리 가운데 몇 명은 지금 달라스에 살고 있는 목회자와 크리스쳔들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두아디라 지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55km 떨어진 소아시아의 내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루커스 니카토 1세에 의해서 건설되었고,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디라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군인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어서, 두아디라시는 군사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시는 비록 소도시였지만 양모, 세마포, 의류, 염료, 피혁제품, 청동제품, 등을 취급하는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오는 빌립보교회의 첫 번째 성도였던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 비단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동업조합이 아주 성행해서 조합원이 되어야 취직도 되고, 은행거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이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더 나아가 종교에 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섬기는 수호신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들이 섬기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진탕 놀았는데, 이때 여인들을 불러 들여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실명인지 아니면 구약에 등장하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비유하여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망의 핵심은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일어난 교회의 일, 즉 "거룩함의 훼손"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동사 "용납함이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사랑의 수고와 인내와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무감각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도시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두아디라에는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드' 즉 조합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거기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소속이 된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부도덕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러한 사회적 환경가운데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때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아니면 은유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고 "용납하라고" 제안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음을 편하게 하므로 양심을 무디게 하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 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두아디라에는 걸출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지요. 자주장사 루디아로 알려진 여인, 그래서 사도바울을 돕고 자신의 집을 내주어 교회가 설수 있도록 했던 한 여인입니다.

당시 사회적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여인이 그런 사업을 하고,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을 내어놓는 단순한 희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어쩌면 단순한 자주장사가 아니라 당시 패션을 주도하는 사업가 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한 걸출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게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생각되는 것은,

우리 교회와 민족가운데 루디아와 같은 여인이 많이 나오기를, 그리고 이세벨과 같은 유혹가운데서 이기는 자들, 그런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이세벨'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거룩함이 훼손된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한국 교회를 바라보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한국교회에 사랑이 없어서, 봉사와 섬김이 없어서, 믿음이 없어서,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거룩함이 상실되어 가면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된 어떤 수고와 활동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룩함"이란 진정한 교회와 교인들이 가져야할 또 하나의 표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 곳곳에서 거룩함이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거룩함을 막으려고 방해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되는 곳에는 틀림없이 사단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용납하는 것과 죄인을 용납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죄를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그들의 나약함, 죄에 대한 그들의 관대함이 역사 속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권면하십니다.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오늘 본문 18절의 "불꽃같다"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계실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 '눈빛'이 아니었을까요?
마가복음 3장 5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완악함으로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불꽃같은 주님의 눈빛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불꽃같다"라는 말 보다 "섬광 같다"라는 말이 어떨까요?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불빛이 번쩍합니다. 그 순간 우리의 모든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고 명확하게 찍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은 22장 60-61절을 보면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길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은 질책이 아닌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의 눈빛은 평생 가슴속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뿐 아니라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보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 분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 ."
그 주님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악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면 심판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4장 13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그 눈이 불꽃같고 또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경고가 무섭고 중합니다. 오늘 본문 21-23절을 보세요.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중요한 것은 이 여선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은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죄를 짓는 것 보다 죄 지은 다음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합니까?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범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꾸짖는 이유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인 것처럼, 오늘 무서운 심판의 말씀역시 협박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바로 그 분이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21절), 그들이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징계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음입니다.
그들을 침상에 던지고.. .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 무섭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누구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되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무서움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큰 환란 가운데 던지고. . .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고. .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소름끼치게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는 음란죄를 저지르고 그의 남편 우리아까지 살해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나중에 침상이 젖도록 눈물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짓고 회개한 사람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 없고, 회개하여 사함 받지 못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부르셨을 때, 즉각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숨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성만찬을 할 때,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요13:30). 
사도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라고 물었을 때,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 이 뿐입니다.“(행5:8)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이 거짓 여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잘못을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기회까지 주셨는데도 이 거짓 여선지자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심판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면 심판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침상에 던지겠다’고 하는데, 여기 ‘침상에 던진다’는 말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 것을 의미하는데, 범죄한 자들의 건강을 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치 않으면 환난이 기다린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의 자녀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의 자녀라는 말은 이세벨주의를 따르는 영적 자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병을 주고, 환난을 주고, 자녀들을 치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말씀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중요한 것은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권세를 주리라" 그리고 "새벽 별을 주리라"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거룩함을 지키는 자를 위한 약속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끝까지 거룩함을 지킨 성도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권세란 헬라어로 "엑수시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지배권, 통치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악에게 승리하는 사람은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여기 ‘새벽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새벽별이란 바로 우리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사람에게는 주님 자신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악에게 승리하는 사람에게, 음란에 빠지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에게, 비록 음란한 행동을 했다할지라도 그것을 회개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회복하는 사람에게는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과, 주님과 같이 동행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데 전술을 배우거나 무술을 연마하게 하거나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고, 성결의식을 치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가나안은 극히 세속적이고 타락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문화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결'의 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문화는 가나안 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이고 반(反)기독교적 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목사님은 세 가지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혀 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임을 떳떳하게 밝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No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No!"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No!"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노우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과 성결을 위해 단호하게 "No!"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소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형성하라’고 합니다. 개인이 혼자 거룩해지려는 노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서로 체크해주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하며, 거룩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믿음을 떨어뜨리고 나의 성결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오늘 당장 절교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주님의 신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성결의 동역자, 구별됨의 동역자를 여러분들의 옆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거룩함이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 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결함을 통해 주님과 동행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과 권세를 주십니다.
오늘 두아디라교회에 주시는 경고가 심판이 아니라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와 한국교회를 향해 바라보시는 불꽃같은 주님의 눈앞에서 심판이 아닌 권세를 누리는 거룩함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그 교회의 터, 아니,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왕국을 통해 세상을 지배했던 민족이 지금은 가난하고 황폐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나오면서 구걸하는 어린이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1달라 씩을 주면서,
그 땅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땅의 부흥이 오기를,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기를. . .
버려진 땅이 회복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버려진 교회의 터가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 우리 교회에, 그리고 한국 땅에 진리의 강물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부흥"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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