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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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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시편 23편은 기독신자는 물론이고 불신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진 유명한 다윗의 시인데, 제가 결혼식을 주례할 때에 '성시낭독'으로 쓰는 시편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제가 고른 것이 아니고 원로목사님께서 결혼 주례 때마다 그렇게 하시던 것을 저도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새 삶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 시편 23편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축복의 말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운수대통' 따위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의 평생을 통하여 늘 꾸준하고도 풍성하게 넘치게 해 주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제일 중요한 축복들인 것입니다. 
  
이 시편 23편을 지은 다윗은 바로 그런 '일상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고마운 것인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온통 사울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평범하게 보이는 의식주나 생명의 안전보장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요긴한 축복을 바로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날마다 누리고 있었던 까닭에 그 체험을 바탕으로 이 아름다운 시편을 지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온갖 '일상의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이 시편 23편을 통하여 함께 되새기면서 그에 대한 마땅하고도 충만한 감사를 주님께 돌리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일용할 것들을 항상 넉넉히 공급해 주신 축복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1절과 2절에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것은 어릴 적에 목동이었던 다윗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목자가 베푸는 사랑과 정성 때문에 생존할 수 있는 양과 같은 존재임을 절실히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그리고 자기는 그 목자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양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란 단순한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목자는 오로지 '양의 생명을 돌보아 주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이며, 양은 자신의 생명 전체를 그 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양은 일단 목자만 잘 만나면 그야말로 아무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양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자가 다 알아서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황량한 산지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푸른 초장" 즉 양의 먹이가 되는 푸른 풀이 풍성한 곳이 어디 있는지는 목자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철을 따라서 풀이 많이 나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양떼를 먹였습니다.
"쉴만한 물가"란 '잔잔한 물가'라는 뜻입니다.
골짜기의 급류가 흐르는 곳은 양들에게 위험하므로 목자는 물을 마시기가 쉬우면서도 안전한 물가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은 그런 '초장'이나 '물가'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거나 염려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자가 잘 알아서 하는 일이었고 양은 오로지 그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꼴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양 가운데서 자기 목자가 자기를 어떻게 돌보아 줄지를 두고 불안해하거나 자기를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두고 염려하는 양이 있겠습니까?
단 한 마리도 없을 것입니다.
양은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대로 오직 자기 목자만을 신뢰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절대로 굶어 죽지는 않게 되어 있으며 양은 바로 그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를 '먹여 살려 주시는' 목자가 되심을 정말 뜨겁게 체험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며칠을 굶은 끝에 놉 땅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간청해서 '진설병'을 얻어먹었던 적도 있었고,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도망할 때에도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조달해 준 '떡과 건포도와 여름 실과와 포도주' 덕분에 비상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윗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초장'과 '물가'를 만나게 된 적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다윗은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자기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와 같은 '일용할 것'을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양이 꼴을 먹게 되고 물을 마시게 되었다면 그것은 100퍼센트 목자의 덕인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매일의 의식주 역시 100퍼센트 하나님의 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사실 목자에 대하여 감사드릴 줄은 모르고 그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럴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매일의 일용할 것에 대하여 이런 감사를 드릴 줄 알게 되면 자연히 '내일 일'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근심 걱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목자가 있는 양'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더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굶겨 죽이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목자'되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 '지극히 사랑하시는 양'들에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를 '공중의 새'보다도 더 잘 먹여 주시고 '들의 백합화'보다도 더 아름답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인생의 온갖 위험 가운데서 안전한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 축복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3절과 4절에 기록하기를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초장에서 꼴을 먹고 물가에서 물을 마신 양은 자연히 육체적인 생기를 얻게 됩니다.
바로 그처럼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여기서 '소생'이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회개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할 때에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목자가 단순히 '일용할 양식'으로 먹여 살려 주실 뿐 아니라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해 주시는 분인 것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목자께서 자신을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거듭난 신자답게 평생토록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다시 말해서 '하나님 당신의 성호에 동반되는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즉 다윗이 그토록 온갖 시험과 역경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의인의 길'을 지키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성'을 높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처럼 자상하신 목자가 되어 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실족을 하거나 실패하게 된다면 불신자의 눈에 '다윗이 목자처럼 의지하고 따르던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이라는 개인만 비웃음을 받고 끝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당신께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에 손해를 당하실 분이 결코 아니신 까닭에 다윗을 끝까지 '의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영적 애프터서비스'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매순간 "안위"해 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서로 다른 도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쓰이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불린 이름들입니다.
'지팡이'는 양떼를 인도하는 도구로 쓰일 때의 이름인데, 양들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거나 혹은 '제 길'로 마음대로 가려는 양들이 있을 때에 그것들을 바른길로 방향을 잡아주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늑대 따위의 사나운 맹수가 양떼를 공격해 올 때에는 그 '지팡이'가 '막대기'라는 무기로 바뀌었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막대기'를 휘둘러서 그 못된 짐승들을 쫓아냄으로써 양들을 안전하게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목동으로 살았던 다윗은 목자의 손에 있는 '지팡이'의 이런 두 가지 용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자 되신 하나님 역시 '인도'와 '보호'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을 '안위'해 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가 길을 잃은 양이 되어서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지 않도록 '지팡이'를 가지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고, 또한 때로는 원수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 들 때에는 '막대기'로 그 원수를 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바로 이런 '안전보장'의 축복을 지금까지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막대기'를 휘둘러서 우리를 구출해 주시지만, 양들의 입장에서는 아예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며 그것은 바로 평소에 자기 목자의 '지팡이'가 인도하는 대로만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목자가 천 길 낭떠러지가 바로 곁에 있는 위험한 골짜기 길로 인도할 리도 없고 사나운 짐승에게 노출되는 곳에서 잠을 자게 할 리도 없으니까, 모든 위험으로부터 사전방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오늘날 그런 목자의 '지팡이'로 인도 받는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목자의 '말씀', 곧 성경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따라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평소에 매사에 그저 말씀대로만 다니고 행동하고, 말씀대로만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음침한 시험의 골짜기 근처에도 아예 가지 않게 되고 사망의 위험을 야기시키는 온갖 유혹에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안전한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한번 택하심을 입고 중생함을 얻고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받고 그 하늘 아버지의 양자가 된 성도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망하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의 선한 목자로서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명성을 결코 스스로 먹칠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 받은 택자로 하여금 남은 인생의 온갖 위험 속에서도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전보장해 주시는 가운데 끝까지 말씀중심으로 '의의 길'을 따라가게 하시는 은총에 또한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원수 마귀에 대하여 영원히 승리하게 해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5절과 6절에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가 목자 되신 하나님을 통하여 누리게 된 최고의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다"는 실로 통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상'이란 'reward'(賞)가 아니라 'table'(床)을 가리킵니다.
'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것'은 당시의 잔치 자리에서 주인이 특별히 귀중한 손님들에게 베풀어 주는 호의와 환대의 표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결국에 가서는 왕으로 삼아 주시고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셨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상첨화격인 일은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다윗의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평생토록 얼마나 많이 만났습니까?
사울 왕에게 쫓길 때에 그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모함하거나 잡아 죽이려 했던 원수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도 자기의 신하나 친구 중에서조차 그를 배반하고 돌아선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개인적인 원수들에 대하여 그 어떤 원한도 품지 않았고 보복 같은 것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통쾌한 복수를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울의 잔당들의 눈앞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고, 또 그 압살롬에게 가담한 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권을 도로 찾게 해 주심으로써 그 자체가 이미 그 원수들에게 충분한 복수가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어 속담에 "Living well is the best revenge."(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그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께서 '철철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잔'을 받는 '축복의 상'에 앉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통쾌한 일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고백이 뒤를 이어 나옵니다.
다윗은 자기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와 같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의 "평생에" 계속 자기를 "정녕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울 왕의 위협에서 벗어나 끝내 이스라엘의 왕권을 얻게 되고 압살롬의 반역도 극복하여 결국 왕위를 되찾게 된 것만이 자기가 받은 축복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앞으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통하여서도 그와 같은 목자의 돌보심과 인도와 보호와 축복이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무한한 축복을 다윗은 어떻게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까?
바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사실을 통해서였습니다.
양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그 목자가 인도하는 '우리' 안에 들어가 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일일이 찾지 않아도, 스스로 챙기지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아도 그저 우리 안에만 있으면 양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 바로 그 안에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양의 축복을 '여호와의 집' 안에서 발견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어디로 가든지 '정녕 나를 따른다'고 해서 우리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가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양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중심으로 목자의 돌봄을 받고 살 듯이 성도는 어디까지나 '교회'를 중심으로 그 목자의 '선하고도 인자하신' 은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야말로 신자가 원수 마귀의 핍박과 공격 앞에서도 끝내 승리하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박해하는 불신가족들에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축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통쾌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를 비난하는 불신사회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이 세계를 받은 경향교회가 더욱 왕성하고 부흥하는 축복'을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함께 나누게 되는 것보다 더 시원한 복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영광스러운 축복은 '교회 밖에서 맴도는 아웃사이더 교인'은 절대로 누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은 곧 목자의 보호와 인도 아래에서 벗어나는, 위험의 골짜기로 직행하는 길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는 여전히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이 곳곳에서 미혹하며 위협하는 이 말세에도 바로 이 '여호와의 집'을 중심으로 그 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더욱 뜨겁게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부모는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이 선물을 줄 때에는 꼭 인사를 하면서 받도록 철저히 가르칩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의 기본예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자라게 되면 그처럼 '남이 가끔 한 번씩 주는 선물'보다는 자기 부모님을 통해서 늘 받고 있는 의식주와 보호와 사랑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많고도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부모의 은혜를 정말 소중한 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진정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양'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일상의 은혜와 축복'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며 절대로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제목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기본적인 의식주'는 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공급해 주시는 '일용할 축복'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숱한 위험들이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우리 곁을 스쳐 갔겠지만 그 순간순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강한 산성과 요새 같은 경향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마귀로부터 지켜 주시고 영적으로 연전연승하면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이지 '항상 받고 있으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축복'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삶에 넘치고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심으로써 지금까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생존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가운데 또한 우리의 남은 평생을 통해서도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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