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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이 돌아오게 하려면 (요 11: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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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돌아오게 하려면 (요 11:32-44)  

옛날 로마제국 시저에게 한 병사가 청원하였다. “제발 자살하게 해주세요.” 그 때 시저는 그 병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더니 “네가 자살을 하겠다고 하는데... 네가 살아있단 말이냐? 너는 정말 살기는 살아있는거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병정과 같이 이 세상에는 자기가 살아있는 줄 알고 있는데 실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닌 사람이 많다. 정말 살아있는 자라면 자살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생명을 지닌 자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호흡하는 이는 생명을 지닌 자다. 그 생명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명은 그저 의학적 소견의 생명만이 아니다. 참생명이란 다른 차원이다. 주님을 가진 자인가? 주님이 없는 자인가? 요일5:12의 말씀처럼 주님을 모셨으면 그는 영생이 있는 자다. 참생명이 있어 믿음과 소망, 사랑을 향해 사는 자다. 주님이 없다면 영생이 없는 자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자는 참생명을 받지 못했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자다. 

예수님은 살았다고 산 것으로 보지 않았고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았다. 주님의 안목은 달랐다. 나사로가 병들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요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였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하였다. 주님에게 죽음이란 잠에 불과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원수 앞에 굴복하는 우리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소식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죽음을 모두 잠으로 받아들였다. 

마27:52 “자던 성도의 몸”이라 하였다. 행7:60에서는 스데반이 순교하여 운명할 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즉 ‘잔다’라고 하였다. 

고전15:6, 18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 “어떤 이는 잠들었다.”고 하였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이 죽음을 잠이라고 하신 것처럼 잠자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장례식 집에 “깨우러 가노라.”는 말씀은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지닌 이임을 알려준다. 

깨우시는 예수, 그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오셨다. 구경꾼들이 보고 있다. 그 구경꾼들을 뒤로 하고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은 무덤 문이 돌로 막혀 있는 것을 보신다. 그리고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선포는 정말 죽음을 잠으로 여기고 단잠을 깨우려는 듯한 태도다. 그때 마르다가 오빠의 이야기를 꺼낸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 때 예수님은 요11:40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이 말씀을 듣고 돌을 옮겨 놓는 역사가 나타났다.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주님은 일하신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왜 직접 돌을 옮겨 놓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아닌 마리아가, 주님이 아닌 내가, 말씀을 듣는 내가 돌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역사는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덤 입구를 열어 죽은 자의 생명이 돌아오게 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1. 의심의 돌문을 열라. (요11:39上)

의심은 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요11:39에서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죽으면 끝이다. 죽었어도 하루가 지난 것이 아니다. 나흘이 되었다.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우리는 주님이 말씀해 오셔도 의심의 돌문이 마음의 문을 가로막고 있을 때 아무런 역사도 볼 수 없다. 약1:6~7에도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의심은 믿음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의심은 아예 주님이 행하시는 능력의 부스러기조차도 수용하지 않는다. 도마는 의심쟁이였다. 무엇이든지 손으로 확인해보고 눈으로 확인해보아 만져지는 것이 아니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의심의 돌을 굴러 내어버려 주님이 일하시게 하라. 

부흥회에 가서 기도하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본 교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믿음의 기대가 없어서이다. 의심의 돌문을 닫아 둔 체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의심의 돌문을 열라. 이어령 전 장관의 딸인 이민아 씨는 「땅끝의 아이들」이란 간증집을 냈다. 자폐증이 있는 자기 아들이 12살에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치유 사역자 에릭이 예언을 한다. “6년 후 17살이 되었을 때 깨끗하게 고쳐지리라.” 정상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화가 났다. ‘하나님이 왜 지금 고쳐주지 않는가? 지금 기도하는 이 시간에 응답해 주지 않는가?’ 그런대도 그 자폐증에 걸린 아들이 6년 후에 완전히 치유되었다. 의심할 것 없다. 그 돌문을 열면 기적이 일어난다. 죽은 인생도 영생을 가진 인생으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생으로 회복된다.
  

2. 포기의 돌문을 열라. (요11:39下)

요11:39下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나사로의 몸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늦었다는 것이다. 과연 썩은 냄새가 진동하면 살아나지 못하는가? 우리는 시간상, 여건상을 내세워 포기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상식을 내세워 포기한다. 포기는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포기의 돌문을 열지 않으면 기적을 볼 수 없다. 내가 단념해 버렸는데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포기는 낙심과도 통한다. 낙망은 응답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그래서 포기의 돌문을 열라고 하신다. 이 돌문을 열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포기하는 것이 옳아도 주님이 말씀해 오시면 돌문을 그냥 두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돌을 옮겨야 한다.

멜 테리가 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에 실린 간증을 보면 인도네시아의 아툼바 마을에서 한 아주머니의 죽음을 목격한다. 첫 날은 그 여인을 위해 기도하면 생명으로 일으키시리라고 말씀을 전하지만 멜 테리는 이미 포기하였다. 그 여인을 위한 기도가 포기의 돌문에 막혀 결국 매장의 장례식을 치르고 말았다. 그 후 암호앙이라는 마을에 갔는데 장례식이 있었다. 그 곳에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여 있는데 매우 부패한 남자의 시체를 안치하고 있었다. 열대 지방은 죽은 지 6시간이면 부패 냄새가 난다. 그런데 말씀이 임했다. “저 죽은 사람 관 곁에 서서 찬송하라. 저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리라.” 그래서 포기의 돌문을 닫아 둔 체 그 돌문을 열기 위해 망설이며 싸웠다. 

사탄은 속삭였다. 썩는 냄새가 30미터 밖에서도 나는데 이런 일은 미친 짓이다. 그런데 어떡하랴 포기의 돌문을 열어버렸다. 찬송을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님 어서 일으켜 주세요. 저희는 이 시체 주위에 서 있기가 어려워요. 악취 때문에 찬송을 부르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다시 찬송을 하는데 두 번째 찬송, 세 번째 찬송, 계속해서 다섯 번째 찬송을 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찬송을 부르는데 시체의 발끝이 움직였다. 그때 더 가까이 가서 찬양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죽은 사람이 깨어나면 관 근처의 사람을 껴안고 다시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공포가 밀려왔지만 더 가까이 갔다. 일곱 번째 찬송이 끝나고 여덟 번째 찬송이 시작되는데 그 남자가 깨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시신은 살아나 누구도 껴안지 않았고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이 죽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지옥과 천국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생명이 주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지방의 2만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였다.
  

3. 원망의 돌문을 열라. (요11:6)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늦게 오셨다.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요11:6을 보면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하였다. 요11:17을 보면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집에 늦게 오신 것이다. 

요11:32을 보면 마리아가 원망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보고 깨우러 오셨는데 마리아는 원망한다. “여기 계셨다면, 일찍 오셨다면” 하고 달려오지 않은 심방을 원망한다. 그러므로 원망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는 것은 원망의 돌을 열라는 것이다.

원망은 생명을 갉아먹는 악한 기운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원망의 돌문을 치워야 한다. 마리아는 돌문을 열었다. 돌을 옮겨놓으니 주께서 나사로를 부르셨다. 그때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는 살리시고 예수는 수건과 베를 풀어주셨다.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문을 인봉하고 있는 의심의 돌을, 포기와 원망의 돌문을 열라. 마리아와 구경꾼들이 보게 된 영광, 바로 지금 주님의 새롭고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된다. 죽은 자를 깨워 일으키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놓는 변화의 영광, 살려내고 풀어놓아 자유케 하는 회복이 돌아온다. 기적의 영광, 참생명의 영광을 보게 된다. 

믿음으로 돌문을 옮겨라. 
순종으로 돌문을 옮겨라. 
하나님이 영광을 보려는 기대로 돌문을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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