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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릴 것을 기다리라 (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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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것을 기다리라 (마 3:1-3)


“호모 모빌리쿠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휴대폰 사용을 생활화하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을 일컫는 말입니다.

휴대폰은 인류가 경험한 다양한 매체 중 하나입니다. 즉 문자, 인쇄술, TV, 인터넷과 같은 매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매체들보다 빠르게 확산되어 지금은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유엔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의하면, 휴대폰 계정 보유 건수가 2010년 말 50억 건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구 1.35명 당 1건씩 휴대폰 계정을 보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20014년에는 이것이 1명당 1건을 넘어서게 될 것이랍니다.

고려대학교 김성도 교수가 쓴 [호모 모빌리쿠스]라는 책을 보면, 호모 모빌리쿠스는 즉각적 의사소통,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 붕괴,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축조 등 순기능적 편리성을 누리지만, 충동적 반응, 소통의 경박화, 자기은폐 증가, 기다림의 미학의 소멸과 같은 폐단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휴대폰은 오늘 현대인에게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편리한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휴대폰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점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기다림의 미학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당장 휴대폰으로 연락해서 알아봅니다. 차분하게 기다리며 천천히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장 휴대폰으로 확인해 봅니다. 오래 기다리며 그 문제에 담긴 뜻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휴대폰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인 기다림의 미학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영성이 점점 경박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의 깊이를 진중하게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잃어버려가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실제로 대림절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대림절의 경건의 초점은 “기다림”에 맞춰져있습니다.

대림절은 성탄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4주간을 지킵니다. 오늘이 그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12월 18일 주일까지 이어집니다. 그 후에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기다림 뒤에 맞이해야 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긴 기다림 끝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했던 것처럼, 성탄절은 기다림의 과정 뒤에 맞이해야 합니다. 그 옛날 세례 요한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했던 것처럼, 성탄절은 사모하는 마음의 기다림의 과정 뒤에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탄시즌이 시작되면, 벌써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만다는 것입니다. 호텔, 백화점, 거리거리에 성탄장식이 가득하고, 캐롤과 축제의 음악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대림절 기간 내내 흥청망청 들뜬 분위기가 압도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 기다림의 경건의 주제가 설 자리를 잃게 될까 염려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대림절 기간을 세상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대림절의 본뜻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본연의 자세를 더욱 굳게 견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력은 이 대림절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새해 첫날이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며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기다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훈련시키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깨달음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철저하게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 가곡 가운데 ‘님이 오시는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길 님이 오시는가 
갈 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췰까, 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사랑하는 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 길로 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갈 숲에 바람이 일면 혹시 그대 발자췰까, 시냇물이 흘러 소리를 내면 혹시 그대 노래가 아닐까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고 말고는 전적으로 님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역함, 우리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철저하게 순종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내 뜻대로 중단하고 말고를 결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치커피”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커피와 달리 차가운 물로 커피를 추출하는 커피입니다.

옛날 네덜란드 상인들이 커피를 본국으로 운반하면서 마시던 커피에서 유래했습니다. 더운 물로 추출한 커피를 배에 싣고 가다보면 맛이 변합니다. 그리고 당시 목선인 배에서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커피를 추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가운 물로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차가운 물로 커피를 추출하려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커피 1잔을 추출하는데 보통 8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아무리 커피가 먹고 싶어도 커피가 다 추출될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8시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더 빨리 추출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저 따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다림을 통해 순종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셋째, 기대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소망을 담은 기대입니다. 참 좋은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12: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고 견디시면서 그날을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고 견디며 기다리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앞에 있는 기쁨” 때문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구원 받는 그 날, 그 기쁜 날을 소망 중에 기대하시며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그 기쁜 날을 소망 중에 기대하시며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인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그러나 행복한 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비록 십자가 위에서 감당키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지만 예수님께는 기대가 있었기에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림 속에서 소망 중에 장차 다가올 기쁜 날을 기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한 것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마태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이 세례요한에 대한 소개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이 말씀을 기다림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특히 메시야가 오셔서 펼치실 천국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다리며 메시야와 메시야가 펼치실 천국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분명히 기다릴 것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메시야 즉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펼치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릴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기다리는 것을 분명히 알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분명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펼치실 천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메시야가 오신다는 말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알고 또 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누구인지 그 메시야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지에 대해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기다림이 오랠수록 점점 더 희미해 졌습니다. 

사무엘 베게트라는 극작가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40년 동안 28번이나 무대에 올려 지기도 해서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기다림을 통한 인간의 희망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그야말로 지루할 정도로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마치 기다림을 포기하면 죽을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는 일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고도가 누구인지 이 두 사람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지 않는 고도를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일 자체에 몰두하다가 고도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도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도 잘 모른다.”고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누군가를 기다릴 때, 정작 기다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이 막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를 기다리라!” 특히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오셔서 펼치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는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도 저 천국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염려, 근심, 걱정, 불안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참된 희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천국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기다립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펼치실 새로운 세상 저 천국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의 희망은 작은 희망들입니다. 그 희망은 죽음 앞에 무기력합니다. 그리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가 주시는 희망은 참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릴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다리던 예수가 오셔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던 천국이 펼쳐져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 2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위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 처녀가 모두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섯은 등을 준비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불을 켤 수 있도록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등은 준비했지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랑은 처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빨리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다 졸았습니다. 이윽고 한 밤 중에 신랑이 들이닥쳤습니다. 처녀들이 다급하게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섯은 등불이 꺼져갑니다. 그러나 여분의 기름이 없어 계속 등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다른 다섯도 역시 등불이 꺼져갑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분의 기름이 준비되어있어서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를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지혜롭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미련한 자들이라고, 어리석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재림하실 것을 믿고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리긴 기다리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회개하고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회개하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회개하여 깨끗한 심령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주저함 없이 머뭇거림 없이 주님 앞에 서려면,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대림절 기간 동안 기다림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누구를 기다리는가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도하실 저 천국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깨끗한 심령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치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렸던 다섯 처녀들처럼 정결한 심령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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