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기다리는 사람들 : 세례자 요한 (요 1:19-36)

첨부 1


기다리는 사람들 : 세례자 요한 (요 1:19-36)

지난주는 미국의 실업률이 8.6%로 최근 2년 내에 가장 낮았고 감사절 매출이 작년보다 16%가 올랐고 유럽 금융시장의 안정이 있을 것이라는 호재에 힘입어 주식시세가 상당히 많이 올랐습니다. 경제상황도 더블딥에 빠지지 않고 회복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오랜 경기 침체로 인하여 마음이 답답한데 긍정적인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당장 주변 상황이 어려워도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기다리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언제 아이의 성적이 오늘 것인가? 언제 건강이 회복될 것인가? 언제 사업의 매상이 잘 오를 것인가? 언제 교회당 건물은 마련될 것인가? 살아가노라면 많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오늘은 대강절 또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묵상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4주간 지키는데 각 주마다 다른 색상의 초에 불을 붙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둘째 주에는 두 개의 초를 점화하고 색상은 진보라와 연보라를 사용하는데 마침 강단에서 꽃꽂이를 하시는 분도 그것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시리즈 두 번째로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하고 기다렸던 세례자 요한을 요한복음 1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였습니다(1:19-28)

당시 유대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유대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가져다주고 사회적으로 안정시키고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되돌아오게 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기 시작하니 그에 관한 소문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삽시간에 퍼집니다. 마가복음 1장 3절에는 유대 땅 시골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요한의 등장은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방인이 유대인 되거나 또는 유대인 중에 죄를 지어 이스라엘 회중에서 쫓겨났다가 회복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이 우슬초로 물을 찍어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즉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하는 결례의식이기에 보통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죄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표시로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심령을 괴롭히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메시지를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요한의 소문이 종교지도자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세례를 주는 요한의 존재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요한이 자기 뜻대로 세례를 준 것은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세례를 주라 하니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유대인들도 하나님 앞에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이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무성해지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자하여 산헤드린 공회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냅니다. 그들은 요한을 보자마자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이 일제이 요한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너무나 궁금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주 단호하게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무리들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라기 4:5에 근거하여 요한이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당시 민간에서는 죽은 엘리야가 실제로 살아나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엘리야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이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라는 신명기 18:15에 근거하여 요한이“그 선지자”인지 묻습니다. 또 아니라고 대답하니 파송된 무리가 답답해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 너에 대하여 보고를 해야 하는데 과연 "네가 누구인지 네 입으로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에 요한은 이사야 40:3절의 예언에 근거하여 자신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즉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말씀은 아니고 그 말씀을 전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세례자 요한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성령의 조명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표한 책이라 하였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였기에 구약에 나오는 메시야와 예수님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막상 그가 오셨으나 도리어 그를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고 하면서 십자가상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 삶에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그리스도가 아닌데 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묻습니다. 세례를 거행하는 것이 메시야의 행위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는 메시야가 베푸는 세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증거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입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회개는 믿는 자가 되는 첫 단계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그런데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어 요한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시하면서 얼마든지 자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가 설 자리를 잘 알았습니다. 영화로 따진다면 자신은 엑스트라나 조연이지 결코 주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신은 샌달의 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주인의 신발 끈을 허리를 굽혀 풀어주고 신을 벗기고 발을 씻겨주는 일은 가장 비천한 노예들이 하는 일인데 그런 시중도 감당 못할 만큼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인이 나은 자들 가운데 가장 큰 자임이 분명합니다(마 11:11). 왜냐하면 가장 낮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1:31-34)

세례자 요한은 자기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하여 한 번도 듣거나 보지도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모친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간이어서 이미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요한에게 누구든지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사역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에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누가복음 3:21에 보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하며 예수께서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것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문을 여시고 예수님 위에 성령을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부어주셨습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요, 예수님께서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임명하시는 메시야라는 확인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례식은 메시야 즉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 위에 성령이 임하셔서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요한은 예수님이 단지 자기의 친척으로서 6개월 어린 동생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의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물세례는 인간의 도덕적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요 성령세례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그들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치료하시고 그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에스겔 36:25-27에 보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성령을 받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요한은 “내가 보고”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 위에 임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원한 것은 정치적인 메시야요 그들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증거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요 그들을 죄로부터 건져줄 분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만을 증거합니다(1:29-30, 35-36)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가다가 문가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바라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서 그를 잡아 일으키니 앉은뱅이는 서서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주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주목합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정도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는 전에 소경의 눈도 뜨게 하고 귀신도 쫓아낸 적이 있다고 자랑하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쏠리는 시선을 의식하며 “우리 개인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예수로 인하여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하면서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세례자 요한도 자기의 사명이 무엇이고 자기의 위치가 어떠한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요, 자기는 약속된 메신저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모여든 무리에게 예수님만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그 이튿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기로 정해진 어린양을 말합니다. “세상 죄”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범위가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치게 될 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한 것은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온 세상의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였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아무 관심이 없었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외모가 이사야 53:2에 나오는 표현과 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게 보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실망스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그 다음날 다시 예수님을 보자 제자들에게도 “보라, 내가 말하던 바로 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당시 스승과 제자 사이를 생각해볼 때 이는 대단한 결단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스승에게 제자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고 제자들에게 스승은 자신의 주모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요한은 지체하기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자기 제자들이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한편 제자들도 요한의 말을 듣자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스승이 알려주는 진리의 길을 따라 예수님에게도 나아갔습니다. 자신은 쇠하고 그분은 흥해야 한다(요 3:30)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기의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첫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메시야를 맞이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를 통하여 정결하게 준비시키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약속된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고독하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였고, 주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대강절을 맞이하여 주의 오심을 바라는 성도들이 세례자 요한의 사역과 증거를 통해 어떤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까? 

1)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기를 얻게 되면 누구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잘 감당하다가도 주님이 받으셔야하는 영광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로채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위 사람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한 마디만 하면 얻게 될 엄청난 영광을 알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지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시간을 끌기만 하여도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저 자신을 가리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요한의 놀라운 겸손과 정직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며 주님을 높였던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예수님을 알아본 자신의 영적 능력을 쉽게 과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사역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밝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은 소중히 여기나 그것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범위를 이스라엘로 한정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히 자기 사역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빛을 위한 증거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삶을 산다고 주위에 대적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요한의 자격을 시비 삼고, 그의 활동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러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오직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를 알릴 뿐이었습니다. 세상과 일일이 시비하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은 자기의 사명과 위치를 분명히 알았기에 세상의 인기나 영예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의 때에 조용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각자의 정체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까? 혹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속에 자기가 누구인지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자기 소리가 주님의 말씀보다 크게 나지는 않습니까? 요한 자신은 다만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한과 같이 자기를 아는 바르고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것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할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예수님은 영적인 출애굽을 통해 영적인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요한은 성령에 감동해서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신다는 것은 세상이 저지른 온갖 불의와 저주, 그리고 악행을 그분의 몸을 통해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며 그것의 지배를 끝내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우리 죄를 제거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고 사람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을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깨닫거나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를 풍성히 깨닫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또한 더 깊이 알기 원하는 자들은 성령의 조명하심을 위해 겸손히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그분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3) 주님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지극히 높으신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했고 기쁨으로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역할은 오직 예수님의 사역을 받을 때만 의미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취하기보다 자신의 제자까지 주님께 보내며 그를 섬기게 할 정도로 요한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섬김으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자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바른 동기를 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의 초림 때의 빛을 기억하고 이제 앞으로 재림의 주로 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밝은 빛을 바라봅니다. 재림 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영원한 빛이 밝혀지면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날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과 영혼에 영원한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던 우리 인생들에게 대강절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드러내는 귀한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처음 오셔서 메시야의 길을 걸으시기까지 자신을 지켜 충성한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까지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이제는 변화를 체험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 때 세례자 요한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하게 하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자신을 알고 충성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를 증거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며 믿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