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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첨부 1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사람은 생물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는 '다 같은 사람들'이지만 개성이나 현실을 따져 볼 때에는 '아주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서로 다른 사람'이란 그 기준에 따라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기 마련인데,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부자와 빈자, 지식인과 무식자,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등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구분보다도 훨씬 더 극명하고도 중대한 구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중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실화로 보는 해석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경신학자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 도중에 부자가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 재림 이후에 모든 사람이 육체 부활을 받은 후에 불신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장면입니다.
또 지옥에 간 부자가 거기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향하여 무슨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각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게 살게 되는 '서로 아주 다른 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기준이나 조건보다도 훨씬 더 엄밀하고도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을 둘로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금세의 인생관에서 '하나님 중심'과 '자기중심'으로 아주 다르게 나누어집니다.

본문 19절로 21절에 기록하기를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한 부자"는 부자 중에서도 그야말로 갑부였습니다.
"자색 옷"은 그 당시 어떤 특별한 조개에서 추출되는 염료로 물들여서 만들어졌는데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런 자색 옷은 겉옷으로 쓰였고 반면에 "고운 베옷"은 내복으로 쓰인 것인데 이것 역시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옷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종류의 옷만 해도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이처럼 돈이 많았을 뿐 아니라,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즉 돈을 흥청망청 써대면서 잔치와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그의 매일의 일과였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꿈꾸고 있는 가장 완벽하고 행복해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자가 어떤 '악한 일'을 저질렀다든지 특별한 '죄인'이었다고 지적하시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였다는 그 자체가 무슨 잘못일 리도 없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비유에 나중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역시 당대 최고 수준의 부자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자의 잘못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자기중심'의 생애만 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어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풍족한 것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만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자기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키며 즐기는 데에만 도취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와 '하나님을 떠난 이기주의'가 그 부자의 인생관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바로 그것이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문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오로지 교만에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그가 음부에 가서 하는 말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는 거기에서 비록 아브라함에게는 나름 정중한 어조로 부탁하고 있었지만, 나사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상에서 자기 집 대문 앞에 빌어먹던 사람을 대하던 자세를 은연중에 나타내었습니다.
나사로를 시켜 자기에게 물 한 방울 보내달라고 하는가 하면, 그 청이 거절되자 이번에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나사로를 세상에 다시 보내 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중에서도 여전히 자기 욕구 중심, 자기 소원 중심일 뿐이었고, 게다가 나사로까지도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 심부름을 시켜 먹으려 하는 못된 심보까지 고스란히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는 어땠습니까?
그는 부자와는 대조적으로 육신적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조차 없는 최악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돈 한 푼 없는 거지였을 뿐 아니라, 그의 몸뚱이 하나조차도 온통 "헌데"를 앓아 만신창이였습니다.
그의 주거생활이란 그 부자의 "대문" 곁의 땅바닥에 "누워" 지내는 것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생존수단은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 즉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동네의 "개"들과 같이 어울리는 신세나 마찬가지였으며, 실제로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아 먹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 없고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이보다도 더 처참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지 나사로에게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이름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나사로'란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바로 이것 하나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만 따져 본다면 나사로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신 것' 역시 하나도 없는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앞의 '한 부자'에게는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으신 반면 나사로에게만 그처럼 뜻 깊은 이름을 붙여 주심으로써 그가 분명히 가지고 있던 것, 부자에게는 오히려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 주셨습니다.
즉 나사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만 의존하고 살던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부자와 나사로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한쪽은 돈 많은 부자요 다른 한쪽은 일전 한 푼 없는 알거지 신세인 것이 가장 큰 차이로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차이는 그것이 아니라, 한쪽은 그 소유한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을 전혀 가지지 못했고, 반면에 다른 한쪽은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그 어떤 소유물이나 대상이 없었던 까닭에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살았다는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차이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부자의 결정적인 약점과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에만 빠진 인생, 간단히 말해서 오로지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25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고 하신 예수님의 교훈의 의미는, 돈이 많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그 돈이 부자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도 자기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의 불신앙으로 이끌어가기 쉽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신앙인은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붙잡고 삽니다.
즉 천국의 구원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무슨 위로나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할 줄 아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 자인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자기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임을 고백할 줄 아는 신앙이야말로 세상에서 물질이나 지위는 없을지라도 반드시 소유해야 할 가장 귀중한 재산이요 보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이 있고 없는 것이나 권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칩니다.
마찬가지로 학력이 좋은 사람과 일자무식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상에 누워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은 아주 다른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진짜 중요한 차이는 그런 것들이 결코 아니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 현세를 살아가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결정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만 믿고 의지하면서 사느냐' 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중요한 것을 결핍하고 있는 '자기중심'의 인생이 아니라, 아무 가진 것 없다 하더라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부요한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내세의 삶에서 '천당 영생'과 '지옥 영벌'로 엄중히 나누어집니다.

22절로 26절 말씀에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절과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1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것은 그가 죽은 후에 "천국에 앉은" 사람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라고 기록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부자도 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세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처럼 떵떵거리며 하늘 높은 줄 몰랐지만, 막상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는 그도 '거지가 죽은 것'과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면 그 부자는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는 무슨 '장사를 지냈다'는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거지에게 누가 장례식을 치러 주었겠습니까?
기껏해야 그 부잣집의 종들이 그저 거적때기 같은 것으로 둘둘 말아 어디 내다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죽었을 때에는 아주 요란하고도 화려한 장례식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장사됨'은 마치 그 부자가 못다 쓴 남은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한 푼이라도 더 쓰기 위한 최후의 발악 같은 행위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호화찬란한 장례식이 그 부자의 내세에 아무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음부"에 내려갔고 거기서 "고통"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 곳이었고 "혀를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이 아쉬운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고통 중에 영생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무자비하시게 그런 지옥을 만들어 놓으실 수 있을까?'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절대주권하신 창조주를 경외하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극악한 죄인지를 지옥에 가서도 깨닫지 못할 자들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 역시 음부에 내려가서도 회개하는 티는 조금도 없지 않습니까?
  
그 무서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오로지 자기가 잠시라도 시원해질 수 있기만 바라는 생각, 나사로나 아브라함까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써먹을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살았을 때에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것"만을 추구하던 자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 하지 않는 신성모독의 죄란 것이 그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는 이 '영벌의 지옥'이 가장 엄중하게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내세가 이처럼 정반대로 분명히 갈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한쪽은 "위로를 받는" 곳인 반면 다른 한쪽은 "고난을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단 사람이 죽어 그 어느 한쪽에 가게 되면 거기서 다른 쪽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나사로에게 심부름을 시켜 먹으려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해 왔을 때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서로 건너 왔다 갔다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구렁"이란 것은 천당과 지옥 사이에 어떤 지형적인 장애물이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천당과 지옥은 사람이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곳, 한번 들어가게 되면 바로 그 곳이 그 사람의 '영원한 주소'가 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간 사람이 현세에 남은 가족들의 기도나 헌금의 공로로 연옥으로 옮겨지고, 또 더 잘하면 연옥에서 낙원으로, 낙원에서 천당까지도 승진할 수 있다는 따위로 가르치는 천주교의 교리는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다.
죽은 사람은 오로지 생전에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가는 곳이 영구적으로 결정됩니다.
믿고 죽은 신자의 영혼은 낙원으로 영접을 받고 그 육신은 영생의 부활을 기다리게 되지만,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의 영혼은 이미 음부에 갇혀 그 육신과 함께 최후 심판을 받을 날만 남아 있게 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이 금세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그 사람이 죽은 후에 내세에 가서 더욱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객사를 했느냐 아니면 집안에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편안히 숨졌느냐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좋은 묘 자리를 써야 죽은 후에도 자손들이 잘되도록 만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대로 액운이 끼친다는 따위의 '차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미신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의 차이란 것은 오직 '영생의 천당'과 '영벌의 지옥', 이 극단적인 두 종류의 영생으로 나누어질 뿐이며 일단 그렇게 한쪽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다른 쪽으로 건너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꼭 깨닫고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차이,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완전 딴판의 인생이 되는 이 극단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27절 이하 31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27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고통 받는 자기 육체를 위한 요청이 거절되자 이 부자는 이제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요청을 올리기를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의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 역시 스스로를 회개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한테도 만일 누가 죽었다가 부활해 와서 전도해 주었으면 자기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 즉 자기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심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부자의 두 번째 요청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선지자들이 실제로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다 직접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세와 선지자들'이란 바로 그들을 통하여 기록된 '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런 아브라함의 말을 듣자마자 "그렇지 아니하니이다"라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의 말씀 정도 가지고는 자기 형제들이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어야 되지 성경만 가지고는 절대로 그들에게 믿음이 들어갈 수 없다고 부자는 확신을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그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자 자신도 생전에 그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는 들어 보았고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그런 경험이 있는 까닭에 그는 '그렇지 않다.'고, 그 정도로는 결코 안 된다고 아브라함에게 반박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명백히 선언하시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심령은 설혹 부활한 사람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성경 말씀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중에 지옥에 가서도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그것만 가지고서 하나님을 믿기는 불가능했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최고의 계시'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신앙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성경을 통하여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진리를 깨닫고, 이 성경 속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오직 이 성경 안에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믿는 자들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보통 차이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증거를 들을 수 있고 없는 이 차이는 바로 금세에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차이로 이어지며, 그것이 곧 내세에서 '천당과 지옥'의 차이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즘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이구동성의 미사여구로 입버릇처럼 외치듯이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에서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자기 집안 식구'까지도 철저하게 '다르게' 만들고 영원히 '나누어지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돈, 옷, 음식, 집의 차이가 아니라 그 심령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그저 인종과 국적과 문화와 성격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나누어지는 극적인 차이로 귀결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가장 큰,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초림하신 구원주이시며, 또한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을 영원히 갈라놓으시기 위하여 다시 재림하실 심판주이신 것입니다.
  
성경의 복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차이는 금세에서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사람을 완전히 나누어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소유했던 '거지 나사로'의 인생, 금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축복을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까지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써 풍성히,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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