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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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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았나니 (딤후 3:15-17)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말씀의 신학을 수립한 칼 바르트(Karl Barth)는 말씀의 세 가지 형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육신된 말씀(incarnated word)이 있습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입니다. 그 다음 기록된 말씀(written word)으로 성경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세 번째 선포되는 말씀(preached word)으로 설교입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어 바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Word of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순간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늘 읽던 성경이고 늘 알던 성경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읽을 때 생명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가 말씀의 신학 체계를 세운 동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천국에 수레를 끌고 자신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레에는 자기가 쓴 책을 가득 실었습니다. 천국문 앞에 이르자 베드로가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스위스 바젤에서 온 칼 바르트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들어가라.’ 수레를 끌고 들어가려는 순간 ‘안 된다. 이건 안 된다’ 고 말합니다. ‘이건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쓴 책인데요.’ ‘그래도 안 돼. 오직 말씀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가지고 들어가겠다면 너도 못 들어간다.’ 깜작 놀라 꿈을 깬 바르트는 천국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M. Luther)의 말입니다. “성경은 살아 있다. 그래서 성경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말씀은 발이 있다. 그래서 나를 따른다. 말씀은 손이 있다. 그래서 나를 붙드신다. 말씀은 살아 역사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지할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12월 둘째 주일은 세계적으로 성서주일로 지킵니다. 성서주일이 대강절기 가운데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모쪼록 성경의 귀함을 깨닫는 성서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디모데가 복음 사역을 위해 쓰임 받은 바탕은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볼 때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바탕에 무엇이 깔려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특히 어려서 들은 것들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에 뿌리를 내린 디모데는 세상을 헤쳐 나갈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알아야 할 구체적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제시하는 성경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구원에 이르게 하나니

예수 잘 믿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정해도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부인의 간곡한 사정으로 한 번 나가준다는 것입니다. 부인은 기쁘고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 본문이 창세기 5장이었습니다.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몇 세를 살다가 죽고, 낳고 죽고, 낳고 죽고, 낯선 이름들이 계속 나오는 지루한 족보 이야기를 설교하시는 겁니다. 부인은 무척 실망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많은 본문가운데 하필이면 창세기 5장을 설교하실까?” 속이 상하고 목사님이 원망되었습니다. 예배시간 내내 화가 나서 설교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부인은 집에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남편이 교회에 가자고 먼저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난주일 설교 말씀에 깨달은 바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낳고 죽고, 낳고 죽고, 그 말씀에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하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인생이 이렇게 낳고 죽고 하는 허무한 것인데 나는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나”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했답니다. “지난 세월 잘못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잘 살겠습니다.” 남편은 그 날부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에 구원받는 길과 방법과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목적이 아니고 구원에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들어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구원을 알면 성경의 가치를 더욱 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이 구원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악한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바울의 탄식처럼 인생은 곤고한 사람입니다. 누가 사망과 고통의 몸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까? 해답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외에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해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유익에 이르게 하나니

몰트만 (J. Moltmann)은 영향력 있는 신학자입니다.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 전쟁이 일어나 나치군대가 되었습니다. 전선에 투입된 그는 포로가 되어 3년간 수용소를 전전하게 됩니다. 몰트만은 나치에 종사했던 경험으로 괴로워했습니다. 희망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었으며 양심의 가책은 더욱 컸습니다. 독일이 행한 것을 바라보며 살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몰트만은 철저히 파산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군목이 그에게 영어 성경을 주었습니다. 다행히 몰트만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던 몰트만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회고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1948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몰트만은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희망의 신학’ (Theology of Hope)이라는 책을 저술한 몰트만은 언제나 품속에 성경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삶에 대한 체계만을 제공해 주는 책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을 변화시켜 주는 유익을 가져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유익이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평생에 유익을 주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교육하기에 유익을 줍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교훈은 인생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책망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에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바르게 함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의로 교육함은 바른 길로 계속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66년 6월 5일 그의 일기에서 “나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렇다, 나는 성경고집장이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을 따른다.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위대한 일이건, 보잘 것 없는 일이건 나는 성경을 따른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한 책의 사람’ (homo unius libri)이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 외의 다른 책을 외면하였다는 뜻은 아니며 모든 기준을 성경에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비뚤어진 인생은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잘못 된 것인지 바로 잡아 주기에 성경이 유익한 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온전에 이르게 하나니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는 유안진(柳岸津) 교수는 시인입니다. 그녀는 많은 시집과 수필집을 내었고,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유안진 교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습니다.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잘 아니?” 역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신구약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서양사, 서양문학, 서양의 예술에 관한 것은 다른 애들보다 공부를 아주 잘 했습니다. 

성경을 읽게 된 동기는 성경이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데 그 책에 뭐가 담겨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재미가 없다는데 의지력으로 이겨 낼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 3장씩 읽으니 1년에 다 읽게 되었습니다. 한번 읽은 다음에는 흥미가 있어 거듭거듭 읽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좋은 문학 수업이 되었습니다. 신구약 66권의 체계가 학문 체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 온전케 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 곧 고행과 수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의해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을 바르게 세워 주고 풍성케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다른 책들의 영향력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변화되어 온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성경을 읽고 변화되었습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도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이 위기 때마다 붙드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역경 속에서도 말씀을 통해 온전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디(D. L. Moody)의 말입니다. “성경은 정보를 위한 책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책이다.” 성경은 장식품이나 지식 축적을 위해 주신 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 주셨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변화와 성숙을 위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 들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린아이가 생일선물로 지퍼가 있는 가죽성경책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자랑을 합니다. 선생님이 보고서 “야! 성경 참 좋다! 선생님이 한번 좀 볼까?” 성경을 받아 지퍼를 열려는데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선생님, 조심하세요. 성경 잘못 열면 하나님이 나와요. 큰일 나요.” 아이는 성경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안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성도라면 반드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유익에 이르게 하기에 그리고 온전에 이르게 하기에 성경을 알아야 할 이유를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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