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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연꽃보다 더 연꽃 같은 백합 (마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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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보다 더 연꽃 같은 백합 (마 1:2-6)

: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래전, 제 친구가 목회하였던 음성 관성교회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돌난간이 있었습니다. 난간에는 돌기둥이 죽 세워져 있고, 돌기둥 마다 연꽃이 조각되었습니다. 돌 수집을 좋아하는 그 교회의 장로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가보니 난간과 돌기둥은 그대로 있는데 연꽃을 전혀 알아 볼 수 없게 갈아버렸습니다. 이유인즉 여러 사람들이 예배당 들어가는 입구가 절 같다고 해서 연꽃을 갈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연꽃’하면 불교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피조물입니다. 더욱이 연꽃은 인생이란 진흙구덩이에서 뒹구는 것과도 같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이 이 분의 후손이기를 원하는 복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가 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는 통로가 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영생을 얻습니다. 

한편,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세웠던 능력의 사람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그 영광의 재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 그 이상의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들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 이름으로 자신을 이기며 세상을 이기며 악한 세력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믿음’ 그 자체이시며 또한 ‘권세’ 그 자체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분을 믿어야 하고, 또한 의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한 의지함으로 그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연꽃으로 비유하고 싶은 불순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이 네 명의 여성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화려하게 피어난 꽃의 뿌리를 짐작하게 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는 여성들은 누구입니까?

I. 다말에게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입니다. 이삭의 아들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열두 아들 중에서 그들을 대표하여 유다 민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이후의 족보가 낯이 뜨겁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 3a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여기에서 다말은 여성의 이름입니다. 유다는 다말이라는 여성을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유다가 어떤 여성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면 그를 유다의 아들이라고 하여야 할까요, 아니면 손자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 이런 질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다말이 누구인지를 알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다말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38장 24절 말씀입니다.

(창 38: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라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큰아들 엘과 결혼한 유다의 맏며느리의 이름이 다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자 엘은 다말 사이에 자식이 없이 일찍 죽었습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하는 ‘형수취수제’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유다는 당시의 풍습대로 죽은 큰아들 엘을 위하여 둘째아들인 오난과 다말이 결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결혼하던 첫날밤에 죽습니다. 아버지 유다는 셋째 아들도 죽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셀라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셀라가 성장을 한 후에도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며느리 다말이 몸을 파는 여인으로 위장하고 유다와 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들이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입니다. 이 쌍둥이는 유다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이미 아들이라고 해야 할지 손자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아이들이 출생하였습니다.

1. 다말은 애매함의 상징입니다.

여기에서 애매함이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라고 해야 할지 아버지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관계입니다. 아들이라고 해야 할지 손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애매함입니다. 당시의 법으로는 아들의 아내가 낳은 아이이기에 손자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유다에게서 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아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에게 이런 부적절하고 애매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어떤 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7장 2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요 17:21a)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단순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다르지만 같으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하나님께 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처음 교회가 들왔을 때 촌수와 항렬 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양반들에게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혈족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형제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함께 예배당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늘에게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자 그것을 듣고 아들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늘에게 계신 우리 할아버지여!”

아버지는 안 되겠다 싶어 기도를 멈추고 아들에게 ‘너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기도하여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심히 못 마땅하는 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알았어요. 형!”

아들은 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자기도 아버지라고 하면 아버지와 자기는 형제라고 쉽게 촌수 계산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버이가 되고 자녀가 되는 것은 소중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몸을 자신의 부모를 통하여 받습니다. 하지만 그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는 여성의 두 번째 이름은 라합입니다.


II. 라합에게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 중에서 예수님의 족보는 베레스를 통하여 이어집니다. 그리고 베레스 이후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을 낳습니다. 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5a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여기에서 라합이 바로 여성입니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데 여성의 이름을 거명하면 거기에는 특별한 내용이 있습니다.

라합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 2장 1절 말씀입니다.

(수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유다와 그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400년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 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사는 동안 가나안 땅에는 그곳을 차지하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지휘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야 하여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왕들은 자신들이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이 정탐하기 위하여 들어갔던 곳이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일반적으로 낯선 남자들이 들어가도 의심을 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두 정탐꾼은 위기를 겪지만 라합의 도움으로 생명을 보존하였습니다. 두 정탐꾼 중에 한사람이었을 유다 족장 살몬이 후에 라합과 결혼하였습니다. 짧은 만남 긴 여운입니다.

1. 라합은 천지개벽의 상징입니다.

‘기생 라합’이라는 표현에서 기생[povh/폴네]은 창녀, 매춘부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어느 시대나 남성들의 욕구 때문에 존재하면서도 사회적으로 가장 냉대받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인이 다윗의 족보에 포함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더욱이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라합을 믿음의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히 11:31). 라합은 기생에서 믿음의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라합을 통하여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 되심으로 죄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는 걸레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걸레를 더럽다고 손가락질하지만 걸레는 자신을 더럽게 함으로 오히려 세상을 깨끗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이 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저주 받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확신하십시오.  
오늘 말씀에서 세 번째로 만나는 여성은 누구입니까?


III. 룻에게서  

룻은 다말이나 라합에 비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성경전서 66권 중의 한 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5b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여리고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인 살몬은 여리고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아내로 맞아들인 룻의 이력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소설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룻기 1장 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룻 1:4a)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 때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은 그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객지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놓고 죽습니다. 혼자된 나오미는 두 아들을 위하여 모압 여인으로 며느리는 맞았습니다. 그 중에 한 며느리의 이름이 룻입니다. 

1. 룻은 이방백성의 상징입니다.

얼마 후, 불행이 겹쳐 나오미의 두 아들 마쳐 이국땅에서 죽습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보내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끝까지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온 며느리가 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를 통하여 룻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룻의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드라마가 숨어있습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규정된 모압 사람입니다(신 23:3). 그런데 그 모압의 한 여인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다윗의 ‘친할아버지의 어머니’입니다. 유대인들의 몸뚱어리는 이렇게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기생 라합을 통하여, 모압 여인 룻을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직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계보입니다.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2장 13절 말씀입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와, 인종과 인종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엡2:14).

2.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읽는 구약 성경 룻기의 가장 놀라운 드라마는 유대인과 모압인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통하여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혈통적 우월주의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적 우월주의까지 더하여 사람 사이의 벽을 더욱 높이 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허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장벽을 느끼십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차별의 장벽을 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네 번째 여성을 만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IV.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다윗에 대한 기록 중에서 그의 유일한 약점을 오늘 본문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라니요? 아니, 다윗의 아이를 낳았으면 ‘다윗의 아내에게서’ 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니 이런 망측한 모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아는 누구입니까? 사무엘하 11장 15절 말씀입니다.

(삼하 11: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그 때, 다윗은 요압 장군을 비롯한 휘하의 군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예루살렘 왕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윗은 목욕하는 여인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그 여인의 남편인 충직한 신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아는 충직한 바보였습니다.

1. 우리아는 억울한 죽음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죽은 후 우리아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녀를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진짜로 의로우시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 말씀입니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행함으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은 의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물로 씻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고, 환호하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고 절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헛되이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시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예수님께 적용한다면 그 혈통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이기 이전에 다윗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연꽃이 피어난 진흙이 아니라 연꽃도 피어날 수 없는 시궁창입니다. 이것은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감추고 싶은 가족사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핏덩이로 버림받고 세상에서 잡초처럼 자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콩쥐처럼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마다 신데렐라의 꿈을 꾸지만 자정의 종소리가 너무나도 빨리 울려 그 허망함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알콜 중독자의 자녀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저주하면서 자신도 그 길을 갑니다. 이것이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그 분은 모든 인생의 쓰라림을 몸소 겪으신 분이십니다(히 4:15). 그러나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보다 더 연꽃 같은 백합분이십니다. 백합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 어떤 그늘진 구석이 있더라도 죽음에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꽃을 피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능력을 의지함으로 세상의 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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