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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로 인하여 누리는 자의 행복 (마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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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인하여 누리는 자의 행복 (마 5:5-6)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8가지의 복을 묵상 하면서 4주제의 행복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참 행복을 아는 자들은 단편적인 복만을 주어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복만을 담으려 합니다. 때로는 복같지 않은것도 함께 담으려 합니다. 

행복은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때문에 만드는 자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삶을 살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나' 라는 음식이 주는 특징적인 것이 모양은 씨앗같고 맛은 꿀섞은 과자 같았으며 백성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그대로 먹기도 하고 튀겨 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했습니다. 안실일에는 이틀간 보존되었고 평일에는 하루밖에 보존되지 않고 벌레가 생기며 썩어 버렸습니다. 마음껏 먹을수도 있으되 쌓아둘수는 없는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또 부지런하지 않으면 거둘수도 없었습니다. 

출16:18의 표현은,
"많이 거둔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행복법칙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떠한 삶 속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누림이 기능한 삶의 행복법칙인 것입니다. 어떤 정치제도 속에서 이런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능하고 하나님이 내리셨던 만나의 기적 안에서만 가능했습니다. 또한 이땅에서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감동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특별한 교회 공동체에서나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첫번째 행복론은 '주안에서 그와 동거하는 삶의 행복' 이었습니다. 
그것은 관계성의 행복으로서,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하는 마음을 소유함으로 늘 그를 의존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살며 작은 부끄러움에도 마음아파 애통하는 자의 모습으로 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며 두번째 행복론을 전해 드리려 합니다. 
그것은 '주로 인하여 누리는 자의 행복' 입니다. 
가진것이 있어서 마음껏 필요한대로 쓰고 살수 있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림을 분명히 행복의 요소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기업' 이란 상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은 하늘나라를 말하지 않습니다. 현세적인 땅의 축복을 말합니다. 

시편 37편 11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더 구체적입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함' 에 대해서는 다른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부모들은 가진 물질이 있을때에 자녀들에게 상속을 합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수고없이 부모와의 인연때문에 물질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것을 소유하신 부요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시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가진자의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이 본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리라" 는 상속의 법칙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육신적인 부모는 자식이 맘에 들고 안들고와 상관없이 자식이라는 끊을 수 없는 관계때문에 상속을 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속의 원칙에 '온유함' 을 두었습니다. 떼쓰고 매달려서 기업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탕자가 떼쓰고 매달려서 상속분을 받았지만 그것은 허랑방탕에 쓰여졌을 뿐입니다. 
요즘 세계 최대 교회라는 모 교회의 목사님도 신앙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은 자식에게 상속해준 좋지 않은 결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해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아니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땅의 축복을 대표적인 신앙인격인 '온유함' 에 두셨을까요?
인격은 행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소유한자에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대표적 인격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복을 구하기전에 온유한 인격의 성품을 만드셔야 합니다. 가식적 온유는 필요없습니다. 온유로 채워진 인격이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 서비스업종이 늘어 나면서 물질이 그곳으로 쏠리고 있음을 봅니다. 
서비스업의 생명은 "온유함"에 있습니다. 
따뜻함과 부드러움 친절함과 관대함인 것입니다. 
돈버는 수단이 품질의 가치 이상으로 부드럽고 친절한 서비스에 집중되는 시대입니다. 
주님은 경영인이 아니셨지만 그의 말씀 하나하나는 철저히 경영전략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최고 경영자 예수' 라는 책은 초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가식적 온유함도 물질을 취하는데는 이토록 큰 힘이 되고 있는데 인격의 온유함이라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지요!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이 그런 자와 함께 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온유함은 결코 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입니다. 
따뜻함은 차가움을 흡수할 수 있고 부드러움은 강함을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온유함을 타고난 사람은 없습니다. 
표정이나 참아내는 힘이 온유함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표정을 감추고 참기도 하지만 속앓이를 해야한다면 온유함일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인격만이 참 온유함입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표정에서 웃음을 지운적이 거의 없습니다. 화를 내본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유함은 아니었습니다. 슬픔이나 자존심을 가슴속으로 삭히고 분노를 감추곤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씀속에서 깊이 만나고 나자 그것이 사라졌습니다. 그후 저는 어떤 상처도 거의 받지를 않았습니다. 상처를 주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길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된 온유함이란 상처를 주지도 않고 상처를 받지도 않는 마음입니다. 
온유함의 끝이 어디일까요?
주님이 가지셨던 그 온유함의 완전한 성품에 이르르기까진 아직도 멀다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주님의 온유함을 더 배워가야 하는 저에게 있어서 하나의 시험지입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온유함을 배워가야할 그리고 늘 측정하게 되는 테스트의 현장이 있습니다. 그 현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원칙과 틀을 만들어서 가지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가지고 있는 자에게 매우 불편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거기에 맞춰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대상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는 어떤 세미나 같은데 갈때면 가지고 다니는 007가방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무거워서 잘 가지고 다니지를 않습니다만 거기에는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돈해서 다니는 장점은 있지만 한가지 문제는 규격에 맞지 않는것은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에 옛날 우리의 어머님들이 가지고 다니는 좋은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보자기' 입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단정하지 못해도 거기에 못담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되는데로 다 싸서 묶어 머리에 이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지요. 
온유함은 바로 그 보자기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배부름>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이 물질적 풍요의 누림이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복은 영적인 풍요의 누림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라든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등의 표현은 강조를 위한 반어적 표현법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배고프면 먹을 양식을 자동적으로 찾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주려도 배고픔을 느끼는 자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 배고픔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껴 생명의 떡인 말씀, 생명의 생수인 성령을 사모하는 자는 복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다른점이 또 있습니다. 
육체는 일단 배부름을 느끼면 어떤 맛있는 것이 있어도 관심이 가지 않지만 영혼은 채워졌을때 더 배고픔을 느낍니다. 
맛을 아는자의 끝없는 배고픔과 그 배고품의 행복을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자는 어떤 말씀이라도 맛을 느끼게 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젊은청년시절 구원과 십자가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해 의에 굶주리며 많은 청교도들의 책을 읽고 말씀을 읽었지만 해결을 받지 못하다가 그는 어느날 한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중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눈길에 오지를 못하자 한 평신도가 설교하는 준비되지 않은 설교 앞에서 감동케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의 말은 어눌했고 몸집은 깡마른 왜소한 체격이었으며 신분도 별볼일 없어 보였으나 '주를 바라보라'는 주제의 말씀앞에서 그의 온 영혼은 몰입되었으며 거기에서 놀라운 생애의 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영적 갈급함이 있습니까?
혹, 아무런 갈급함도 없이 종교적 습관에 끌려 다니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나를 끌어가지 못하고 그 종교적 습관이 나를 끌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음식맛을 잃어버리고 말라가는 육체와 하등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앉은 여러분중에 단 한분도 그런 신앙의 불행한 틀을 유지하지 않게 되기를바랍니다.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변화의 중심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꼭 이 기도를 하면서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옵소서"
습관적으로 이 기도를 하십시오. 
말씀의 맛이 느껴지는 때 그 감동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날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요즘 수요일저녁예배는 1년전에 비해 배 이상이 모여 말씀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강조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찾아 나올수 있는 그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말씀에서 맛을 느끼고 굶주림을 느낄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욕망은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두가지의 배부름, 그것은 누림의 두 축입니다. 
한가지만 가지고선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해도 불행한 행복입니다. 
가지고 있어서 만족이 되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필요이상을 채워주실때에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맛이 있고 좋다하여 하루 온종일 허구헌날 방에만 틀어박혀 성경과 경건 서적을 붙들고만 있다면 그것도 자제되어야 할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얻어진 물질의 축복이 있다고 자기 만족만을 채우며 어리석은 부자처럼 
"영혼아 여러해 쓸것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
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 영혼을 거두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받아 누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더욱 섬김으로 누리는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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