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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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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온 것은? (막 2:13-17)


세계적인 명절인 성탄절을 두주 앞둔 이 시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육신을 입고 오셨는지 그 목적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먼저 간략하게 설명 드리면,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시고 지나가시다가 레위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관원을 매국노와 같이 여겨졌습니다. 동족인 유대인에게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한 후 유대나라를 정복하고 있는 로마 정부에 정해진 세금만 납부한 후 그 나머지는 자기들이 착복했습니다. 즉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이러한 세리들이었기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천대 받는 세리인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레위야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레위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벗고 옛 친구들을 송별하는 잔치요, 새로운 출발의 잔치였습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참석하여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 명이 예수님의 제자에게 묻기를“너희의 선생은 위대한 줄 알았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까 그렇지 않구먼”하면서 비난조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저들의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온 천하가 기뻐하는 성탄절을 앞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하므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一.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자비한 자를 찾고, 유교에서는 인자한 사람을 찾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 있는 자를 찾았고, 바리새인은 의인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이 땅위에 65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참된 의인이 있습니까? 신약성경 로마서 3장 10절 말씀에“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의인을 찾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땅위에 참 지혜 자가 있겠습니까? 

참 인자한 자가 있겠습니까? 자비한 자가 있겠습니까? 세상 만민의 모습에 대하여 구약성경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고 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에게 참 자비가 어디에 있겠으며, 참 인자함과, 참 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만 있을까요? 죄인들만 가득합니다. 이토록 가득한 죄인을 부르시고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가 죄인이요, 인간쓰레기인데,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나 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살피고 확인합니다. 

모두가 마치 암 환자와 같습니다. 어느 유명한 의사가 질병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조그만 혹이 있었는데 별 일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하며 위로 했습니다. 사실은 치료가 불가능한 위암이었습니다. 암에 걸린 이 의사가 퇴원한 후 텔레비전에서 암 환자에 대하여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사가 암 환자를 수술하려고 환자의 배를 째고 보니 너무 악화된 상태라 손을 못 쓰고 다시 덮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게는 말기 암이라고 말했지만 본인에게는“조그마한 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때어 버렸으니 곧 회복이 될 것입니다.”하고 위로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의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하는 말이“답답해라. 저렇게도 자신의 병을 모르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답답하긴 자신이 더 답답한 사람이 아닙니까? 의학 박사이면서 자신의 몸속에 수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위암을 모르니 말입니다. 얼마 뒤 그 의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자기 몸에 병이 든 것을 모르는 사이 중병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병인 줄을 모르고 병을 키우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처럼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자기는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무지한 죄인들에게 죄악을 깨닫게 하며, 회개케 하여,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암이 인간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죄악은 영혼의 암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지옥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절망 상태에 삐진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암 환자들이 자신이 사망의 문턱에 이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같이, 자신의 죄로 인해 지옥의 형벌이 문 앞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여유 만만하게 살아갑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보고 계실 수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어떠한 구원입니까?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홍수에 휩싸여 떠내려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만 합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생은 죄악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망의 독이 있는 죄악의 물을 먹고 마시며 죄악의 홍수에 떠내려가 지옥이라는 불 못에 첨벙첨벙 떨어질 찰나입니다. 이런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에 주시는 세 단계의 구원이 있습니다.

1. 과거에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한 구원입니다.

내가 범한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형벌을 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과거사를 쓰고 있습니다.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죽어 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에 가서 보면 입석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지정좌석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차의 점은 개찰이 시작될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지정좌석 표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이미 앉을 좌석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석표를 손에 든 사람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고 뛰며 야단법석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쪽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고 한쪽은 교양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라서 그럴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차 승차권에 지정 좌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입석표를 가진 사람은, 자리를 잡지 못하면 먼 거리를 서서 가야하는 고역을 겪기 때문입니다. 즉 미래의 확실한 보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입석표가 아니라 지정 좌석표를 손에 들고 있는 승객과 같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보장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티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 24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참으로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20절 말씀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던 물건들이 고가에 경매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평범한 것이라도 유명인의 물건이었다면 비싼 가격이 매겨집니다. 심지어 값을 매길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목재 골프채는 17만 2천 5백 달러(약 2억 원)나 된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쓰던 칫솔은 얼마에 팔렸을까요? 그 낡아빠진 칫솔 하나의 가격이 2만 1천 달러(약 3천 4백만 원)였다고 합니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타던 옛날 고물 자동차는 15만 달러(약 1억 7천만 원)였다고 합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가짜 진주 목걸이는 21만 1천 5백 달러(약 2억 7천 5백만 원)였다고 합니다. 

이는 물건 자체가 그만한 가치를 지녀서가 아니라 누구의 소유물인가에 따라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19절~20절 말씀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를 지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지금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결코 홀대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멸시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14절과 16절 말씀에“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하셨습니다. 

2. 현재의 삶속에서 계속되는 구원이 있습니다. 

환란과 풍파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함께하시는 주님이 해결해 주시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근심하며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주님을 생각하며 그 앞에 나아서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 왔을까 하며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깨달은 마음의 간구는 반드시 주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위로와 해결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편 50편 15절에 말씀하시기를“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성도는“너 금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이 둘이서 깊은 강위의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 한 청년이 다리 밑을 내려다보니 푸른 물결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꾸 내려다보던 그 청년은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듯 비틀거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다른 친구가 그에게 소리쳤습니다.“위를 봐! 하늘을 봐!”그렇습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러 장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를 바라보고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셔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어떤 역경과 슬픔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서양 속담에“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버리면 우리는 간구와 기적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를 바라보는 믿음과 소망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고난을 통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9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죄와 벌>이라는 명작을 썼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단테는 정적들에 의해 추방된 뒤 방랑을 하면서 <신곡>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똑같습니다. 두 사람의 벌목꾼이 100년을 훨씬 넘어 보이는 거목(巨木)을 벌채하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나무를 베어 넘긴 인부들은 나이테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나이테들이 넓게 혹은 촘촘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의 나이테 모양은 각기 달랐고, 그중 다섯 개는 다른 나이테보다 더 촘촘했습니다. 

마침 곁에서 작업을 지시하던 임업전문가가 나무의 나이테를 살피고 있는 인부들에게 나무의 나이테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여기 나이테가 촘촘히 들어차 있는 것은 그때는 가뭄이 몹시 심했던 때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가뭄이 있었기에 이 나무는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을 것입니다.”이 설명을 들은 인부들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이 나무의 나이테가 촘촘한 것은 가뭄을 이기기 위해 자라지 못한 증거인데, 하지만 이 나무는 수분과 영양분을 얻기 위해 뿌리를 깊게 내렸을 것이고, 뿌리가 튼튼하게 강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이렇게 큰 나무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시오. 다섯 개의 촘촘한 나이테 다음에는 가장 큰 나이테가 생겼잖아요.”
우리의 일생 중에도 고난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뭄의 때를 거치면서 거목이 될 수 있었던 나무처럼 고난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뿌리 깊게, 강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 말씀에“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나라의 문제, 모든 어려운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해 주시는 계속적인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쉼터입니다. 이 쉼터에 자주자주 오셔서 쉬며, 새 힘을 얻어서 험악한 이 세상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3. 미래의 영원한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언제나 하늘나라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은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해 로마서 8장 17절~18절에“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것은 수지맞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생(來生)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시고자 세상에 오셨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내생의 영원한 삶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사도행전 1장 9절~11절 말씀에“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과거의 죄 사함을 받은 성도, 근심과 걱정에서 구원 얻은 성도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천국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이미 그때 예수님이 천군천사와 함께 마중 나와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 말씀하시기를“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근심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수고함이 없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이별도 없습니다. 다툼도 없습니다. 완벽한 복지낙원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4절 말씀에“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국의 광경에 대해 요한계시록 22장 1절~2절에 말씀하시기를“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하셨습니다. 

천국에 있는 집의 재료에 대해 요한계시록 21장 11절~21절에 기록하시기를“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 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걸어 다니는 성의 도로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시고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고, 내일 세상 종말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내 본향 천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유랑의 장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에“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에는 세 단계의 구원이 있습니다. 

첫째, 지난날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험한 세파의 고난에서 구원하여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탄절 준비에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성탄 축하카드나 축하 메일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를 깊이 되새기면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감사함이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올바로 살아가려는 각오와 다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복음증거의 열정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 명절인 성탄절을 맞아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 모두에게 성탄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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