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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함께 있으며 참으리요 (눅 9: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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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함께 있으며 참으리요 (눅 9:28-45)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 이 말은 우리가 흔히 듣기도 하고 자주 직접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마음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없이 인내할 수는 없다는 것은 세상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식에 불과합니다.
또한 쉽게 그리고 자주 화를 내는 사람보다도, 평소에는 좀처럼 기분 나쁜 내색도 잘 드러내지 않고 웬만하면 대범하게 넘어가 주는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정말 무섭다는 것도 우리는 자주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좋은 상대방이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참아 주고 용서해 줄 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더 버릇없이 구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행위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41절 말씀에 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 주시는' 때라고 하셨고 또한 '사람들을 참아 주시는'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당신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다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더 아프게만 했던 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장탄식을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에 대하여 무엇을 참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그 '오래 참으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며 소중한 기회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화육강세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있으셨던' 것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증거입니다.

본문 28절로 33절에 기록하기를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지 "팔일" 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제자들만 데리고 어느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세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의 영광을 몸소 미리 보게 되는 특권을 누렸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자리인 겟세마네에서도 그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특별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변화산이 어느 산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다볼산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가 더욱 유력합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 날도 "기도하시러" 그 산에 올라가셨고 또한 "기도하실 때에" 변모하셨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세 제자들은 이때 "곤하여 졸다가" 번쩍 잠이 깨어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처음부터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이었고, 반면에 그 기도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졸기만 하는 것이 또한 제자들의 습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에 그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게 되었으며 그 옷도 "희어져 광채가 났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석양빛에 예수님의 모습이 반사되어 멋있게 보였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 분명히 어떤 초자연적인 광채가 예수님의 몸에서 발하게 되었음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변모된 예수님 곁에 문득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말한" 내용의 주제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 "별세"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우리가 보통 '출애굽'이란 뜻으로 쓰고 있는 'exodu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는 그냥 '떠남 (departure)'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즉 그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실 것까지 포함한 마지막 사역을 두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여기서 지금 모습 그대로 계속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허락만 하시면 제가 여기다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초막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임시 거처인데 그런 산에서 야영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초막을 세 개 만들겠다고 했으니 자기네들 것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흥분되어 있었는지를 이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목격하고 있는 그 상태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다시는 산 밑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대로 영원히 살았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겠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엘리야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하나님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극히 높임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네 온 민족이 그처럼 떠받들고 있는 구약의 위대한 두 선지자가 예수님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베드로가 이보다도 더 좋은 일은 세상에 다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옛날 어느 유행가 가사에 나오듯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라는 심정과 똑같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의 흥분된 요청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34절부터 36절의 말씀에 "34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의 즉흥적이면서도 나름대로 솔직한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예수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시아로 택한 나의 아들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저 저의 말만 들으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베드로야, 너 지금 무슨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모세나 엘리야가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너희들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내 사랑하는 독생자를 너희에게 친히 보내 주었는데 이 예수 외에 도대체 누가 더 필요하며 이 예수 말고 누구를 더 사랑하겠다는 말이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잘못의 정곡을 정확히 찔러 주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엄청난 신앙고백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온 백성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일 뿐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것까지 믿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베드로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최고최대의 인물을 직접 만났으며 가까이 모시고 사는 엄청난 특권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변화산상에서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그처럼 이 세상에까지 찾아와 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자기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도 덧붙여졌으면' 훨씬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잘못을 지적해 주시면서 "너희들은 이제 다른 그 어떤 선지자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보낸 이 아들 예수만 잘 따르고 순종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심으로써 '임마누엘'의 시대가 우리에게 도래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때에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는 그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정말 진심으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이 세상으로, 그것도 '비하된 모습'으로 보내 주셨으니 정말이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되 이처럼 사랑하신, 이보다 더 사랑할 길이 없을 만큼 사랑하신' 증거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으면서도 '그 예수님 옆에 다른 것도 나란히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멋대로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기왕이면 '예수님과 돈과 나' 이 셋이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주날에는 예수님만 모시고 살만 하지만 주중에는 예수님만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아서 술친구도 곁에 함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만 믿고 사는 것보다는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도 예수님과 나란히 놓고 소위 '4대 성인'이라 부르면서 '초막 네 개'를 지어 놓고 같이 모시면서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실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께 대한 엄청난 모욕이며, 그 독생자를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보내기까지 해 주신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부르는 극악무도한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과 함께 계셔 주시는' 은총을 받게 되었으면서도 그 성자 하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도 나란히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죄인에 불과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까지 강림해 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최대 사랑의 표현이며 내 인생의 최고 축복임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재림심판까지 '우리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죄인에게 믿음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 표현입니다.

본문 37절 이하 41절에 기록하기를 "37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40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4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큰 무리"를 만나게 되셨는데, 그 가운데 어떤 '귀신들린 외아들'을 데리고 왔던 아버지가 예수님 앞으로 달려 와서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는 산 밑에 남아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미 부탁해 보았지만 그들은 그의 아들을 "능히" 고쳐 주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앞서 누가복음 9장 1절에 보면 사실 그 제자들도 바로 얼마 전에 전도여행을 다녀오면서 신유의 능력을 발휘해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변화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이번에도 한번 실력을 발휘해서 멋있게 그 병을 고쳐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시도는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힘을 합쳐 보아도 도저히 그 아이를 고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제자들에게 무언가 영적으로 결핍된 것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을 보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조로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세대"라는 말을 쓰신 것을 볼 때, 이것은 당신의 제자들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당신의 제자들도 '믿음'이 부족하여 그 병을 능히 고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귀신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실망을 맛본 후 예수님에 대해서도 역시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막 9:22)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있던 무리들과 서기관들 역시 이 문제를 놓고 되는 일이니 안 되는 일이니 하면서 "변론"(막 9:14)만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자리에 있던 무리와 그 당시 세대의 유대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2절로부터 45절에 기록하기를 "42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43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45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 들린 아이의 병을 고쳐 "낫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과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 다들 "기이히" 즉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앞뒤의 문맥을 따져 볼 때 이것은 전혀 엉뚱하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막 한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갑자기 '장차 당신께서 고난 받게 되실 일', 바로 그 전날 밤에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던 '예루살렘에서의 별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예언하시면서 '이 말을 너희 귀에 꼭 담고 마음에 새겨 두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그처럼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지금 예수님께서 이처럼 기적적인 신유의 능력을 베풀어 사람들을 도와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히려 이 '불신앙의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버림당하게 될 것을 가리키신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자기가 소원하는 바는 다 얻어 가려 하면서도 정작 그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최고의 은혜인 십자가의 대속은 전혀 고마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주님을 멸시하고 배반할 것이었습니다.

본문 45절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조차 그것이 아직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위엄'이 최고조로 나타나는 사건이며, 예수님께서 행하실 '가장 기이한 일'이 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믿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다시 묻고 확인하기를 꺼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패역함'을 지적하시면서 '내가 얼마나 오래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더 참아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재림' 때까지입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을 다 완수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심판의 날, 딱 그날까지만 '우리의 믿음 없음'을 참고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직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이때에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육신적 소원만 나열하고서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좋아라 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닙니다.
  
그저 예수 이름 덕에 자기 좋은 것만 챙기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은 정작 꼭 있어야 할 참된 믿음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을 신앙생활입네 하고 있다가는 그 예수님이 더 이상 자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당장에라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패역한 세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려 주시는 참된 믿음은 오직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 믿음, 바로 이 한 가지 믿음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자유롭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믿음 없는 옛 사람'을 버리고 그처럼 '참된 믿음 있는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기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땅만 버리고 있는 포도나무'와 같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과원지기께서 성부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를 붙잡아 주고 계시는 까닭에 아직도 우리 인생의 '나무뿌리'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정말이지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시간이 끝나는 심판날이 오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끝장'입니다.
그날이 오면 정말이지 '더 이상 봐 주시는' 일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종결되고 말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언제 어느 날 '도적 같이' 닥치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아직까지는 '참고 기다려 주시는'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주님의 고난당하심을 통하여 내게 주어진 고마운 구원'을 확신하고 늘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강림하셔서 친히 우리 곁에 '계셔' 주셨으며, 지금은 또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2절과 13절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일은 이미 다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죄인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은 이미 초림 때에 십자가 대속 제사를 통하여 다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하실 일은 오직 심판 사역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며 바로 그 재림의 날이 오기까지 주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그 십자가를 믿는 신앙에 이르기를 기다리시면서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주님의 심판은 정말 무서운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까지 내어 주실 정도로 한없이 좋게만 대해 주셨던 그 주님,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주시는 그 주님께서 일단 심판을 행하시게 되면 그것은 실로 얼마나 엄중한 심판이 되겠습니까?
그지없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참고 기다려 주시던' 한계가 끝나게 되면 그때의 진노는 사람에게는 실로 두려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고마운 일은 부모가 자기 바로 곁에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한 지붕 밑에서 자식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고 이끌어 주고 안아 주는 것이야말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 그냥 생활비만 부쳐 주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부모의 최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부모를 둔 자녀들이 무슨 보모 아주머니나 유치원 선생님도 같은 집에서 함께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식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부모만큼 잘 용서해 주고 많이 참아 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만약 그런 자기 부모조차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배은망덕하고 악한 인간이 된다면 그런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오로지 벌을 받아 마땅할 뿐인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직까지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올해에도 이 성탄의 절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신 이 임마누엘의 계절, 예수님께서 재림을 기다려 주시는 이 은혜의 기회에 그 구세주만 의지하고 그 그리스도만 믿고 그 주님만 소망하며 살아감으로써 반드시 속히 재림하실 그 심판주를 두려움이 아니라 오직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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