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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시 25:1-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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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시 25:1-5, 15-22)


1. 기다리는 자가 승리한다

<대망>이라는 대하소설이 있습니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100여년간 일본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입니다. 대망의 주인공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도쿠가와는 지방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5살 때 인질로 잡혀 14년 동안 갖은 수모와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극한의 인내심을 배웠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섬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마음속에 품은 대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37살 때,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도쿠가와의 아내와 장남을 처단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대망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아들을 죽입니다. 이 후,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반역으로 자결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에게 맞서지 않고 자신의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6살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도쿠가와는 때를 기다립니다. 

1615년 그의 나이 74세 때, 드디어 오사카 성을 공격해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사실 도쿠가와는 천재적인 자질을 갖춘 것도 아니고,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견디고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2. 기다리기 힘든 세대

우리는 지금 대림절의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던 세례요한,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시므온, 안나처럼...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마라나타”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 뜻은 “우리 주님, 오시옵소서”(Come, Our Lord)입니다. 우리도 이 대림절에 “주님, 오시옵소서” 라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벌써 2,0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다시 오시지 않았으니, 그 기다림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오리라” 약속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줄을 믿습니다. 
스마트폰, 아이패드같은 최첨단 기기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에게 ‘기다림’ 이란 단어는 무척 어색합니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조금만 막혀도 답답합니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앞 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화가 나서 ‘빵빵’ 클락손을 울립니다. 

왜 이렇게 기다리지 못할까요? 
세상살이가 갈수록 팍팍하기 때문에,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낙오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제가 언제 철이 드려나?” 하며 답답해합니다. 자식들의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언젠가는 일어서겠으니 기다려달라는 것입니다. 

3.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

1절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고 합니다.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은 곧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절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바란다는 것은 곧 의지한다,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2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5절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우러러본다, 바라본다, 의지한다, 기다린다는 단어는 같은 의미입니다. 
이 시편에서 ‘기다림’ 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고난에서, 외로움과 괴로움에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기다림의 독특한 세 가지 특성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25년간 기다려서 100세 때 이삭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21년간 외삼촌 집에서 고생한 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금의환향을 복을 누렸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안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참고 기다렸다가 13년 후에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10여년 동안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며 외국으로 망명을 다니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오랜 세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림으로 열매를 거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6:14)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다릴 줄 압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축복의 씨가 심어져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축복의 씨입니다. 축복의 씨가 심어졌다는 사실을 믿으면,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조급하지 말고, 열매맺어주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4. 둘째,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요셉이 노예로, 그것도 모자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잘 이겨낸 후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듯이 축복을 기다림에는 반드시 인내가 따릅니다. 
야고보서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야고보서 5:10-11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산모는 태중의 아기를 임신하면서 입덧을 심하게 하고, 입맛이 떨어지기도 하고, 갑자기 몸이 붓기도 하고, 혈압이 오르기도 하고, 열달동안 고통이 많습니다. 그러나, 새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모든 고통을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씨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고난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끝까지 참고, 또 참고 기다림으로 반드시 번성케 되고, 풍성한 복을 받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소망을 갖고 기다리라

신앙인의 기다림의 셋째 특성은 소원이 아니라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원(wishes)과 소망(hope)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소원은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졌으면... 취직이 되면 좋겠는데.... 이 병이 빨리 나으면 좋겠는데... 이 고통이 속히 지나가면 좋겠는데...” 

이런 소원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소원과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미래가 열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기를 힘들어하는 이유는 바로 소원을 갖고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소원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갖고 기다립니다. 그 소망은 나의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풍성함,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소원이 아닌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이미 계획해놓으셨고, 그 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지금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19세기말에 영국의 화가 프레드릭 왓츠가 그린 이 그림을 보십시오. <그림참조>
둥근 바위같은 것 위에 앉아 있는 여인, 신발이 없이 맨발로, 눈은 천으로 쌓인채, 악가의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의 현만 남아 있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주는 느낌은 불안, 가난, 절망, 외로움 등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왓츠는 이 그림의 제목을 <희망>이라고 붙였습니다. 당시 비평가들부터 주변의 지인들 대부분이 ‘절망’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왓츠에게 제목을 바꾸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왓츠는 그 속에 희망이 있다고, 아니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위 사람들을 이해시켰습니다. 현이 다 끊어졌으나, 여전히 한 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줄이 바로 희망의 줄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줄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기댈 줄이 다 끊어졌다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을 붙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6. 기도하며 기다리라

그런데, 여러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1절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우러러보나이다”라는 동사는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미완료형은 지속적으로 계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주님을 지속적으로, 계속하여 우러러봅니다. 바라봅니다. 이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5절에도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종일 기다린다는 것 역시 종일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다”고 했는데, 항상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은 곧 항상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항상 기도하는 성도, 평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116: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평생 기도하며 기다림으로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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