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마 1:23)

첨부 1


예수 그리스도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마 1:23)

우리가 인간의 특징을 말할 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함께 하는 생활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홀로 외톨이가 되었을 때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혼자 하는 짝사랑은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더 많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어 격리 시킵니다.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서도 중범 자들에게는 독방에 가둡니다. 혼자 고립시킨다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혼자는 외로운 것이며 힘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등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하나님과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임마누’ 는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며 ‘엘’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런던 타임즈가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친구를 가장 잘 정의한 대답으로 선정된 말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릴 때에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바로 참된 친구다.’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야드 바셈이라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에 의해 6백만 명이 학살당한 아픈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라고 만든 유대인 학살기념관입니다. 어린아이의 희생을 기념하는 기념탑 뒤편 언덕에는 어린아이 10여명을 끌어안고 있는 어른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의 이름은 '코르작과 게토의 어린이들'입니다. 

코르작은 폴란드의 아동작가이며 교육자입니다. 독일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급습하였습니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코르작은 아이들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내놓지 않았습니다. 독일군 장교가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물러나고 아이들만 내 놓으라!"고 했을 때, 그러나 코르작은 스승으로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독일군에게 저항을 하다가 끝내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가스실까지  함께 들어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함께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28:20절에 친히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우리 곁을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또한 돈도, 명예도, 권력도, 언젠가는 다 우리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오늘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축복’하면 우리는 흔히 물질적인 풍성함이나 생활에 필요한 것이 충족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 축복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좋은 축복은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이 가장 좋은 축복입니다.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과연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문전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황제가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극진히 대접을 잘하는지 음식만 먹고 가려고 했으나 주인이 간곡히 붙잡는 통에 하루 밤을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왕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왕제를 본 이 사람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어제 밤에 자기와 함께 잔 사람이 이 나라의 황제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황제는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도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의 황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루 밤만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해주시는 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당연히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특별한 일이 벌어질 때에만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실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고, 메추라기 떼를 주실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씻고 병 고침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에, 히스기야가 18만 5천 명의 앗수르군대를 이길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적들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면 참으로 큰 일입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날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면 밤낮 전쟁이 일어나야 됩니다. 만일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을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안다면 밤낮 병들어야 됩니다. 만일 벼락부자가 될 때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면 거지가 됐다가, 벼락부자가 됐다가 해야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세상살이가 무척 복잡해집니다. 평범한 것은 없고 밤낮 기적만 나타나야 되니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밤낮 기적이요, 밤낮 돌발 사태요, 밤낮 비정상적인 일들만 일어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적이 일어날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삶의 모든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어도 함께 하시고, 모르고 있어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임마누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임마누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시 131:2절에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이 얼마나 평안합니까?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강도도 무섭지 않습니다. 전쟁도 무섭지 않습니다. 병들까봐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품에, 하나님 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평안합니다. 
평안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함께 하고 계신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 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곧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항상 긍정적으로 봅니다. 

일이 안될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실수하고 그르치더라도 주님께서 능히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잘못하여 실이 엉킬 수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가 잘 풀리지 않으면 여러 번 잘라서 다시 이어야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옷이 누더기가 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 뜻대로 살다 보면 복잡한 문제들로 인생이 뒤죽박죽 엉킵니다.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엉킨 실타래는 잘라서 이을 수 있지만, 엉킨 인생은 잘라서 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엉켰든지 풀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 곳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질병에는 치유가 있었습니다. 모자란 곳은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는 죽음도 생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지 다 극복할 수 있을 때, 성경은 "형통"이라고 말씀합니다. 창 39:2절에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노예로 팔렸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죽을 뻔 한 것이 형통입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종으로 팔린 것이 형통입니까? 죄짓지 않으려고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 쓰고 감옥에 간 것이 형통입니까? 그런 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으로 팔렸어도 왕실 시위대장의 집에 팔려서 가정 총무가 된 것은 형통입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도 왕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형통이요, 전옥의 은총을 입어서 모든 죄수들의 감독자가 된 것이 형통이요, 감옥에서 왕실 장관을 만난 것이 형통이요, 총리로 발탁되게 된 것이 형통입니다. 모든 문제에 부딪쳤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떤 삶의 문제에 부딪칠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문제를 극복하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주님께서는 위기의 현장에 여러분만 두지 않습니다. 주님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세상 짐을 나 홀로 지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오직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내 짐을 내가 진 것 같으나 실상은 주님이 지고 계십니다. 나 혼자인 것 같으나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주님이 내 짐을 대신 지셨고, 주님이 지금도 십자가의 못 자국 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계십니다. 내가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은 내 생각일 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염려할 것이 없는 줄 믿습니다. 회의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라났지만 살인자가 되어 나이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해서 40년 동안 메마름 광야에서 비천한 직업인 목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들의 이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맏아들은 게르솜, 둘째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입니다. 게르솜이란 ‘이방의 나그네’란 의미이며, 엘리에셀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 이름은 우리 인생의 두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고달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 나그네의 인생길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신앙인에게는 나그네의 인생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동행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솔로몬왕은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지만 그는 죽기 전에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끊임없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보호를 받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를 돌아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기쁨이 넘치는 은혜도 있었고, 일이 형통하는 기쁨도 있었고, 수고에 대한 결실을 풍성히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실패와 좌절, 슬픔과 고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시달리기도 하고, 질병으로 우리의 삶에 고통을 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안 계시는지,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지 염려스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을 찾아오신 것은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부족하여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절망한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알렸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는 이 임마누엘의 선언을 들어야 합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