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기다림은 축복입니다 (눅 2:25-35)

첨부 1


기다림은 축복입니다 (눅 2:25-35)

여러분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흔히 ‘목이 빠질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학수고대’(鶴首苦待)라고 합니다. 학이 머리를 쭉 내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애절한 기다림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작은 기다림들이 우리 인생을 지탱해주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주부인 아내는 일터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은 금방 헤어졌어도 금새 사랑하는 애인의 얼굴 다시 보기를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승진할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 자식을 학교에 보낸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엄마는 건강한 모습으로 자식 보기를 간절하게 기다릴 것입니다.
- 삶이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은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 기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은 주일이 기다려지고, 애인을 만나는 것 같은 설렘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날 것을 기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쉼 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이 다 행복하고 희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불안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빚 갚아야 할 날을 불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의미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에 희망이나 기쁨을 주지 못한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기다림은 보다 영원한 소망이요 생명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나라가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시편 137편에서 자세하게 가르쳐줍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땅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지은 찬송시입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모여 고향 예루살렘을 추억하며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에는 불안이 더욱 거세게 밀려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해 봅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편 137:5-6)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큰 수치를 겪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쫓겨난 것, 이것이 신앙적인 큰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또 다른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편 137:3)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리갯감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잔치자리에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불러다 놓고는 광대짓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너희 노래를 불러서 우리의 흥을 돋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방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놓고는 ‘바벨론 백성들 앞에서 기생노릇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까?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그들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치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비단 바벨론 포로 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인 2000년 전의 이스라엘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예전처럼 포로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마에 지배를 받는 식민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농사를 애써 지어놓으면 로마에서 세금으로 빼앗아가버립니다. 자기들의 왕이 있고 성전이 있지만 주권은 없습니다. 로마가 억압통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권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하루 빨리 해방의 그날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이방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램 대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메시야가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그런 기다림이 간절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대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힘썼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가까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므온 역시 경건하게 살던 중에 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왕도 로마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로마 사람들에게 막대한 세금으로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당연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시켜주고, 빼앗겼던 이 나라에 자유를 되찾아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당연히 그런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사도행전 1:6) 부활하신 그 권능으로 이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도 그랬습니다. ‘하루빨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셔서 이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 민족에게 참된 자유를 되찾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메시야가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동족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말씀하고 있는 “주의 그리스도”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라는 말이 있고, 메시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말입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모두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아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가리킬 때에는 ‘메시야’라는 히브리어를 써서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인류 구원이라는 신앙적인 메시야를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라는 헬라어를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지시는 시므온이 기대했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실 참된 구세주가 오실텐데, 너는 그분을 기다리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서 건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믿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혹 정치적인 메시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자꾸만 정치적인 목적을 첨가합니다. 

-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자식들이 잘 되고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수 믿으면 비천했던 자신이 갑자기 승진을 하거나, 신분이 상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런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또 예수를 믿으면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신앙생활한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난 후에 사업도 잘 될 수 있고, 병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잘 믿음으로 자식들이 복을 받아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일 뿐,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가장 큰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시므온의 기다림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시므온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외경의 전승에 의하면 당시 시므온의 나이는 100살이 넘었습니다. 그가 그런 고령의 나이에도 성전을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간절한 꿈 -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연로한 시므온이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인생,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생은 기쁨과 설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꿈과 기다림은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됩니다. 꿈과 기대는 현실의 문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꿈과 기대는 삶의 목표를 잃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삶의 참된 가치와 목표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시므온이 메시야를 만날 것이라는 꿈과 기대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이런 꿈을 꾸며 사십시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꿈은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에는 좌절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때론 깊은 절망의 때를 살지라도, 때론 너무나도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가야할 때일지라도 주님을 기다리는 꿈이 있으면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고, 삶에 활력이 가득하게 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면 언젠가 이 성전에 나타나실 거야’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매일같이 성전을 출입하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산모는 40일이 되면 정결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아직 난지 40일밖에 되지 않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 안으로 들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전에 들어가면 메시야를 만날거야.’ 하는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에 그날따라 성전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살피던 시므온에게 눈에 띄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본 순간 시므온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벅찬 감격과 기쁨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야 -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자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
  
노인이었던 시므온은 천천히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 아기를 내가 좀 안아 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 예수를 처음 본 노인 시므온의 품에 안겨줍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는 순간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감격은 처음 느껴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죽기 전에 꼭 보게 될 것’이라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금 이렇게 자신의 가슴에 안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가슴에 안은 아기 예수는 다른 아기와 모양새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주고, 어둠의 땅인 이방에까지 빛을 비춰줄 그 영광스러운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안은 아기 예수는 다른 어느 아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의 가슴만큼은 달랐습니다. 온 세상을 안은 것 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안은 것 같은 충만함이 가슴 가득히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메시야인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은 시므온에게 어떤 부귀영화나 권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처음 보는 낯선 아이를 가슴에 안고 가슴 벅차하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혹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이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직 그의 가슴에는 세상을 다 품은 것 같은 기쁨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찬양을 부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품에 안은 그 아기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 이제 난지 겨우 40일밖에 되지 않는 정말 ‘갓난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 아기가 죄악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빛이 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기를 품에 안음으로 해서 이제는 모든 인생의 굴레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는 순간 먼저 이렇게 외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야 드디어 저에게 참된 해방을 주시는군요.’하는 감격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기를 품에 안은 것은 시므온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므온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린 - 그래서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온전히 자유를 만끽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기쁨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모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계획에 우리를 동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죄의 굴레가 우리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힘센 소가 코에 구멍을 뚫어 고삐를 달아 놓으면 꼼짝없이 주인이 끄는 대로 가야하는 것처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도 그랬습니다. 죄가 끌고 가는 대로 행동해야 했습니다. 내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선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하는 것마다 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아니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죄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를 품고 계신 주님께서 내 삶을 지켜주시기에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축복입니다. ‘죽기 전에는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기다림 끝에 약속하신 그 메시야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아기 예수님이지만, 메시야이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품에 안는 순간 시므온은 세상의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을 받고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게 기다림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이제 한 주만 있으면 성탄절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매년 이 때쯤이면 세상이 떠들썩한데, 올해는 그런 요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좀 더 경건하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처럼 아기 예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십시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기쁨을 얻은 시므온처럼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기쁨을 누리십시다. 아니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김으로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십시다. 그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