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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리라는 말씀 (창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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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라는 말씀 (창 15:1-6)

기다림! - 정도(正道)를 걸으라는. . .

지난 10월 신학교 동기들과 함께 며칠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미국 감리교회에서 bishop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성공한 한인 중에 한 분인 목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삶에서 기쁨은 무엇인가요?”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있었습니다.
“예! 저의 기쁨은 제 삶에서 예측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예상하지 않았던 길로 인도하실 때, 삶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내가 계획한 일만 일어난다면 인생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오늘 “기다림”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기다림이 무엇입니까? 내가 계획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있지만, 나의 예측을 벗어난 것을 기다리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생에서 정도를 걷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쉽게 내가 계획한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편안한 인생,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들의 삶에는 언제 기쁨이 찾아오시나요? 언제 감사할 일들이 생기나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은 바로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승리의 기쁨보다는 승리 이후의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해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일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318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네 왕의 연합군을 멸절시켰습니다.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구하기 위해 나가서 싸웠고,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돌라오멜은 당시 근동지방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싸움 이후가 오히려 불안했던 것입니다. 

1절 말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니까, 아브람이 밤새도록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 두려움과 걱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 중에 걱정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워 본 경험이 없다면, 아마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던가 아니면 바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갑자기 아브람에게 엄습했던 불안감 말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몰려드는 두려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난 고향이요, 그래서 머무른 가나안 땅인데, 자신이 직면한 적이 너무 크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 후손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지 10년이나 지나갔는데 그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란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람을 더욱 불안하게 했던 것은, 눈앞에 보이는 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선교사로 사역하는 김종우 목사가 지금 한국에서 요양을 하며 쉬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 선교사 가정을 위해 설악산에 2박 3일을 쉬도록 했고, 잠깐 간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선교지에 갔지만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답니다.
바뀐 환경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늘 아팠고, 병원에 한 번 갔다 오면 생활비가 없는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돈을 풍족하게 주시든지 아니며,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해 주시든지. . .”

그런데 하나님의 주특기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백인여인이 찾아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도 좋겠느냐고, 아마도 그 마을에는 동양인이 처음이었고, 동양 어린이를 보는 것이 조금은 신기해서 사진 모델로 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친해지게 되었고, 하루는 그 집에 초청을 받게 되었답니다. 
대 저택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던 중, 사진을 찍었던 백인여성의 남편이 선교사 가정의 건강에 대하여 묻더랍니다. 그 사람이 의사였던 것이죠.
그날부터 선교사는 박봉에 시달렸지만 백인 주치의를 두고 더 이상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불안했던 날들이 지나고, 벌써 10년 째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가장 우리들을 안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응답하시고 약속을 주셨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어려움들을 경험하면서 조바심이 나지 않습니까? 왠지 불안해지지 않습니까?

잠언 13장 12절에도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처지고 맥을 놓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하시는데, 아브람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이 말을 뉘앙스를 아십니까? “하나님 내게 주신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제게 자식이라도 하나 주셨습니까?”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2-3절에 나타나는 아브람의 빈정거림을 보십시오.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나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엘리에셀이란, 다메섹에서 데려온 하인입니다. 어려서부터 하인으로 길러온 아이입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을 관리하는 충복이요, 나중에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하란에서 데려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식이 없으므로 하인이 상속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도를 벗어난 대답입니다. 아니 정도가 보이지 않기에 곁길을 바라보고 해답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길을 가다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 가보지만, 아니 차선을 변경해 보지만 그 길이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달하며 사고를 경험하기도 하고, 더 늦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아브람의 인생은 장애가 가로막고 있기에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손이 있어야 하는데, 약속된 자손을 주시지 않기에 막막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늘 평안하고 형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형통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슬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인간적인 생각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에게는 형통함과 평안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으로 빚어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밤새도록 우리로 하여금 잠 못들 게 하는 그 아픔들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이 기다림의 시간은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두르면 이스마엘, 기다리면 이삭”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정도를 벗어나지 말고, 다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대강절이란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난 창립주일 때, 우리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재산을 가지는 것 보다는 공익을 위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카페를 인수하면서 수익금을 공익으로, 그리고 그 건물도 앞으로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재단에 출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왜 교회가 재산을 빼돌리는가?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 .” 등등.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고 기도하니까, 화낼 일이 아닙니다. 염려하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왜 오해가 일어날 일을 합니까?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죠. 내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죠. . .


기다림을 통해 비전을 보기를. . .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실의에 차있는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의에 대하여 답을 제시해 주신 것이 아니라,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가 보는 그것을 얻을 때가 오리니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비전을 믿고 또 15년의 세월을 기다립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적인 가능성이 희박해 지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믿고 기다리는 아브람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기다림”의 대미(大尾)요 오늘 말씀의 결론이 여기 있습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이 잘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단지 하나님 주신 비전을 보고 다시 한 번 믿음을 굳건히 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믿으니”라는 말씀이 단순히 심정적인 차원에서 끝난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끊임없는 기다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에 신앙의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전을 놓지 않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영화의 주인공들은 총싸움을 해도, 칼싸움을 해도 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총알이 피해 다니는지. . .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아무리 총알이 빗발쳐도 그 주인공이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이 끝나면 영화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주인공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끝이 나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 15장 1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제는 빈정거림으로 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순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걱정과 근심이 물러갑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소망이 생깁니다. 외적으로는 점점 더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데, 점점 더 큰 소망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이스 마이어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마리아와 요셉은 무척이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먼저는 들어가 거처할 집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이미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만왕의 왕”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말입니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을 모시고, 마리아와 요셉은 구차하게 선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춥고 어두운 마구간에서 밤을 보내야 했지만 선물을 청하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은 동방 박사들을 보내셨고, 박사들이 타고 온 낙타에는 귀한 공급 물이 실려 있었습니다.

“낙타들이 오고 있다”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으면 낙타들이 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것들이 말입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사역할 때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어떤 건물을 점찍어 둔 적이 있다. 우리는 그 건물을 우리 것으로 주장하며 차를 타고 일곱 바퀴를 돌았고 우리가 이 건물을 살 때까지 이 건물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그 건물은 팔렸다. 우리에게 팔리지는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건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가서 한 구석에서 다시 그 건물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다른 건물을 생각하고 계심이 분명해. 만일 그 건물이 우리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것을 남겨두셨을 테니까 말이야.”
화나고 흥분해서 어리석은 짓을 하는 대신 우리는 “낙타가 오고 있다!”고 계속 고백했고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표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 대로였다.

저는 요즘 그런 편지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정말 힘든 시간을 지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셨다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이 시간이 있어야 “낙타가 오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격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낙타가 옵니다!”


임마누엘은 믿음입니다.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소망을 “의롭게”여기시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기다리며 바란다”라는 것이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야 족에게 소망은 “무엇에 걸려있다”라는 뜻이랍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망”을 “우리가 하나님께 걸려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는 사람이 “기다립니다.” 어떤 시련과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정도를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허락하신 이삭을 얻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의 온전한 인격이 변화되므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변화되는 과정을. . 
이전까지는 자신의 정욕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할례”를. . .

‘임마누엘’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하며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인격이 믿음으로 빚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빚어지는 인격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함을 고백합니다. 
임마누엘은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오시게 될 때, 비로소 삶의 변화들이 옵니다. 삶의 질적 변화 말입니다.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고, 희미하게 보이던 비전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신 것이 삶의 변화와 축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던 자들에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오신 그 하나님의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가까이 하고 싶은 열망!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의 가장 강렬한 바람은 “함께 하고 싶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도, 함께 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연애를 하신 분들은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기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을 고백한 사람에게서 거절을 당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매일 봐야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인해 야기될 서먹함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용기가 필요한지 말입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집안은 모두가 25살 이전에 결혼을 끝냈습니다. 

제가 25살이 되었을 때,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이야기가 있었고, 저는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지금도 기억하는 데 88년 4월 4일 아버지가 미국으로 부흥회를 떠나시면서, 잘해보라고 공항에서 5만원을 주셨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는 당시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을 데리고 대학로의 카페로 갔습니다. 무언가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감도’라고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고 아무 소리를 하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다른 카페를 들어갔는데 역시 말을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헤어지기 전에 “나에게 시집올래?”라고 말을 했더니,
당시에 자신은 선을 봐서 사귀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더욱 심각한 것은 매일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봐야 하는데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1달 동안 기도해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서 제 마음이 어땠으리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셨을까?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을 우리들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계실까 말입니다.

크리스마스을 한 주 앞두고, 우리의 신앙을 가장 명확하게 점검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말 어뚱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참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격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는 큰사랑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동정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제가 요즘 영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영화의 한 장면을 찾아볼까요? )
2003년에 국내에서 개봉한 “영웅”이라는 영화에 보면, 장만옥(비설 역)과 양조위(파검 역)가 결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코 실력이 뒤지지 않는 남자가 여자의 칼에 맞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칼을 놓아 버리고 여자의 칼에 몸을 던진 것이지요. 어처구니가 없이 죽어 가는 남자를 부둥켜안고 묻습니다. “왜 내 칼을 막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남자는 죽어가면서 말을 합니다. “이러지 않으면, 네가 믿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제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마음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몇 주 전 제가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진짜 종이 아닌 것 같다고,
종의 능력은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큰종, 귀한 종, 뭐 그렇게 되다보니 주인보다 종이 너무 잘 난 것 같아서 “머슴”이라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가 그렇게 묵상 글을 올렸더니,
어떤 분은 그럼 이제 담임목사님을 “담임 머슴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어떤 부목사님은 “그럼 우리는 부 머슴인가요?”
또 어떤 분은 ‘담임 머슴이라 하지 말고 상머슴이라 하세요!“라고 제안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지에서 평생 외로이 종으로 사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종의 길을 갑니다. 장애인들에게 온 맘 다해 복음을 전하셨던 아버지가 몹시도 그립습니다. 장애인들이 정성껏 준비한 추모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종에게는 오직 순종의 삶만이 존재함을 되뇌였습니다. 또 한 번의 돌아봄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을 보면서 그냥 새벽에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종이니 머슴이니 라고 부르는 말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들이었는지. . .
제가 그 분에게 “그 길을 끝까지 승리하며 가시기를. . .이라고 답 글을 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이고 머슴이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들이 버릴 수 없는 소망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지금도 변화되는 우리의 삶이 있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꿋꿋하게 가야하는 그 길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그 길을 갈 수 있기에 눈물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는, 그런 눈에 그렁그렁하는 눈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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