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눅 2:1-7)

첨부 1


‘구유에 누운 아기’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2011년을 잘 마무리하고 계시는지요?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겨울 날씨에도 우리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더욱 많이 느끼시는지요?  ‘나의 2011년은 흑자로 결산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시는 12월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2012년은 올해의 갑절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시고 기도대로 이루어지시는 새해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눅2장 1-7절 말씀으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이 기록된 누가복음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특징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마가복음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고,   요한복음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한다면 누가 복음은 ‘사람이신 예수님’ 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특히 피곤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주 보여집니다.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예수’ 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활에 지쳐서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누가복음을 가까이 하십시오. 나와 똑 같은 ‘인간 예수님’ 을 만나고, 인간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기를 끄세요’ 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조금 짜증 섞인 음성으로 "예배시간에는 전화기를 끄고 들어오는 것이 예배자의 예의입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설교하는 목사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하던 목사가 곧 태연하게 전화기를 꺼내더니 "여보세요, 아 하나님이세요, 지금 예배중이니까 예배 끝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끊더랍니다. 

우스개 이야기지만 가끔씩은 하나님과 이런 직통 전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들이 하도 많아서 이 같은 전화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 때 그때마다 직통으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만, 성경을 보면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탄생사건입니다.  성도여러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은 역사의 분수령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달력에서 보는 B.C.(=Before Christ) 와 A.D.(=Anno Domini) 란 예수님을 기준으로한 표기입니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 경제가 미국, 그리고 미국의 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큰 기쁨'은 헬라원어로 '카란 메가렌'입니다. 메가(=킬로의 1,000배) 급의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지요.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 남편이 승진했다는 소식, 로또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 세상의 그 어떤 좋은 소식도 예수님이 탄생 소식보다 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와 함께 이 땅에 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 곁에 찾아오신 소식이기 때문이지요.  

누가복음 4장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눈먼 자, 눌린 자,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진 자들,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 큰 병에 걸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 소외되고 낙심한 이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는 말씀입니다.   보통 아이들을 낳으면 누구든지 축하를 받습니다. 딸이든지 아들이든지 일단은 먼저 축하를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생명이  새로 태어난다는 일은 그 자체가 신비이고 축하할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어야하지만 환영 받지 못하는 출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출생이었습니다. 일가친척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거나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었어도 그곳 사람들마저도 기뻐하거나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의 출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환영받지 못하는 출생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 목수였고 그리고 또 하나의 직업은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수와 목자는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탄생을 상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가장 천한 직업을 가진 부모에게서 평범이하로 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신데 왜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는데 이토록 가난한 집에서 비천하게 출생하셨느냐가 하나의 질문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도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는 좀 더 많은 식민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인구를 파악해야했고 그것을 위해 모든 백성들에게 각자의 고향에 가서 호적정리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이에 요셉도 자기가 살던 곳인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본적지인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습니다. 

(삼상16;4)“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나라가 망해서 로마에 세금을 더 잘 바치기 위해 젊은 부부는 먼 여행을 떠납니다.  어려서부터 여호와 신앙으로 자란 이 부부에게는 참으로 굴욕적인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으면 그 고생을 힘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하는 이런 고생은 보람이 없습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로마 황제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런 여행의 끝에 타향 땅에서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베들레헴도 그렇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작은 시골 마을에 태어났습니다. 시골인 촌마을 베들레헴, 그것도 번듯한 집도 아닌,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짐승의 먹이 통)에 눕혀진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별의 인도를 따라 그대로 왔으면 될 것을, 그들은 자기들의 상식대로 행동을 합니다. ‘왕이 태어났으면 당연히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겠지’ 하고 별의 인도가 아닌 자기 생각을 따라서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습니다.  다시 별을 따라 가다가 그들은 상식이 파괴되는 놀라운 장면을 봅니다.  바로 너무나 시골인 촌마을 베들레헴, 그것도 번듯한 집도 아닌,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구유(=짐승의 먹이 통)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모르긴 해도 동방박사들은 자기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별이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고, 몇 번이고 다시 확인을 하였을 것입니다. 왕이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있다니... 상식이 파괴되는 일입니다. 정말 최악의 환경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이 태어난 모습입니다.   

요셉은 정혼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갑니다. 사실 마리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요셉 혼자 가서 호적정리를 해도 됩니다.  결혼을 하고 임신한 것이었다면 아마 요셉도 마리아를 혼자 두고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아직 결혼식도 하지 않은 정혼(=약혼)의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마리아 혼자 남아 있었더라면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문제인데 혹시 남편 될 사람이 여자를 혼자 두고 도망갔다는 오해라도 받으면 마리아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저런 이유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함께 떠났고 그 여행의 끝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실제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145km의 먼거리입니다. 대전에서 서울까지가 약150km입니다. KTX타거나 고속버스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갑니다. 그것도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갑니다. 얼마나 멀고 어려운 길이었을까요? 이런 고생이 예수님의 부모님에게 있었습니다.   

게다가 병원은커녕 여관마저도 없는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보니까 방은 없고 결국 마구간에서 태어나 강보로 싸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많은 무리가 같은 마을로 호적 하러 갔으니 여관이나 민박의 빈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만삭이 된 임산부에게 방 하나를 양보하지 못할 정도로 삭막한 도덕성과 부패한 인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의 입장에서도 여행 중에 아이가 태어났으니 무슨 준비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래서 겨우 강보(襁포대기 강, 褓포대기 보)에 쌀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강보라는 단어는 ‘찢다’ 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태어난 아이를 감쌀 제대로 된 천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옷을 찢어 아기 예수를 감싼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자녀가, 손자손녀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이는 정말 불쌍하게 태어났다’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비천한 탄생입니다. 

 넷째로, 천사들이 전한 탄생의 소식도 그렇습니다. 왜 하필 목자들입니까? 말이 직업이지 자기의 양도 아닌 남의 양을 키워주는 사람들입니다. 양치기, 즉 목자는 사람이 아닌 양을 쳐야 합니다. 직업으로도 가장 비천한 직업이며, 신분적으로는 천민이었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짐승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먹는 것 역시 변변치 못하고, 옷도 아무렇게나 막 입고 다녔고, 언제나 땀 냄새와 짐승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다들 코를 틀어막고 피하려고 했습니다. 

또 그 시대의 목자는 주로 광야에서 늑대나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돈 많은 부자들로부터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주인이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양들을 끌고 다녔기 때문에 도둑이나 사기꾼들이 많았답니다. 주인 몰래 양을 팔아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님 시대에 일반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았던 삼대 직업이 세리와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목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는 이 귀한 소식이 전혀 뜻밖에 가장 천한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왕이나 권세 가진 자들이나, 부자들, 제사장들이 아닌 비천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예수님의 성탄 소식을 듣는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는 이들' 이었습니다.  낮이 아닌 한 밤중에 천막 밖으로 나가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은 목자들 중에서도 계급이 낮은 이들입니다. 군대 용어로 말한다면 짬밥 그릇 수가 작은 '쫄따구'라는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가장 낮고 천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만큼 능력이 무한하시고 못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어찌 이런 모습으로 와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식이며 인간의 생각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를 알면 곧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낮고 천한 곳에 조용히 오셨습니까? 아니 왜 이렇게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이 세상이 죄 많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의로운 그분이 눌 자리조차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면... 기뻐하기 보다는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면 죄는 거룩을 싫어하고, 어둠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헤롯대왕은 동방박사의 말도 듣고, 서기관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베들레헴 인근의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인 장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만날 마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할 공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오셨다. 즉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습니다. 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낮아진 마음,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Service>라고 합니다.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는 섬김의 삶’ 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이란 예배만 드리면 끝나는 게 아니라 예배 후에는 섬김의 삶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섬김을 교회에서 하든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하든지, 직장에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어디서든지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섬김과 봉사가 있는 것이 온전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섬김은 겸손이 없으면,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인카네이션’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겸손하십니까? 섬기고 봉사를 하십니까?   섬기는 것이 성경입니다. 낮아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낮고 천한 구유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이자 본질입니다. 부(富)하고자 하시는 여러분, 왕이 되고, 왕궁에서 살고자하시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왕궁에 안 계십니다. 베들레헴 촌 동네 마구간의 구유에 계십니다. 
  
몇 년 전 "가이드포스트"지에 실린 글입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입니다. 키가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문 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빈 방 없어요, 다른 곳에나 가봐요!" 라고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만 하고 들어가면 되는 쉬운 역이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본대로 마리아와 요셉이 다가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빌려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데서도 받아주질 않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사정합니다. 그러자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다른 곳에나 가봐요!" 하고 말하여 맡은 역을 잘 소화해 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갑작스레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꺼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관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뜻 깊은 성탄연극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모두 큰 은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기 예수님을 마구간의 구유에 모시지 않는 방법은 내가 잠자야 할 안방을 내어드리는 방법뿐입니다.  마치 어린 꼬마가 자기가 도시락을 안 먹고 굶기로 작정을 하고, 예수님 드시라고 가져왔던 그 도시락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여러분이 오늘 밤 자야할 안방을 포기하고 아기 예수님을 위해 내어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내가 누려야 할 것을 포기하고, 낮추고,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손해를 보지 않고서는 섬기는 삶,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직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예수님 때문에 오직 복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섬기는 삶과는 많이 다른 마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성탄 하셨습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고자 하는 그 목적을 위하여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조용히 오셨습니다. (눅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 맞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맞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날에는 사람들이 빈방을 주지 않아서 예수님은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요즘의 크리스마스는 어떻습니까? 아니 나의 크리스마스는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아기 예수님을 모셔드릴 나의 빈방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더 이상 예수님을 짐승들의 우리 간에 있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나도 낮아지고 섬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Amen.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