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윗과 도엑 (삼상 21:1-9)

첨부 1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때에 항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실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그들을 완벽하고 이상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의외로 그들에게서 많은 실수와 잘못과 허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나 자신보다도 더 못한 것 같은 면들과 이해할 수 없는 허물들을 발견하면서 과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한 사람이다. 야곱은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해서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사람이다. 모세도 혈기를 부려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윗도 남의 아내를 빼앗고 또 그 남편까지도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인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시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택하러 갔을 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사무엘상 16:7에서 하나님은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기준은 우리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과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별로 뛰어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쓰임을 받는 반면에, 우리가 보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이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기에 뛰어난 사람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허물과 부족이 많은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으면 사람의 기준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쓰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시고 “이 사람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처럼 외모나 신장이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가문이나 물질 등의 기준으로 따지신다면 우리는 선택받고 쓰임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고 나설 자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를 들어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비록 여러 가지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더라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나처럼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며 마음의 자세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도 다윗의 인간적인 약한 모습과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이 어떤 믿음을 가졌었는가도 보여준다. 그리고 똑같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윗과 달리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나타난다.

성소로 찾아간 다윗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 19장과 20장을 보면 사울은 이제 완전히 미쳐서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그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그가 자신의 경쟁자요 백성들에게 자기보다 더 인기가 있는 사람이요, 자신의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는 점점 더 미쳐갔다. 그래서 다윗은 20장에서 요나단을 통해 사울왕의 이런 의도를 확인하고는 도망쳤다.

다윗이 급하게 사울에게서 도망쳐서 처음 찾아간 곳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였다. 그 당시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이어서 성소가 다른 곳에 있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야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왔고 나중에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 이 때 다윗이 찾아간 놉에 있는 그 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고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85명의 다른 제사장들과 함과 성소를 지키고 섬기고 있었다. 

성소는 어떤 곳인가? 처음 성소가 만들어졌을 때를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후에 시내산 아래에서 일 년을 머물게 하시면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다. 이것은 이제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세밀하고 성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 성막 안에 십계명 돌판을 넣은 언약궤를 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막울 중심해서 생활했다. 

민수기 9:15를 보면 그들이 성막을 완성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그 위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막 위에 나타난 구름을 따라 광야길을 걸어갔다. 구름이 머물러 서면 그들도 그곳에서 머물렀고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로 짐을 챙겨서 움직였다. 성막 위에 나타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그 성막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정착한 후에는 따로 성소를 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 안 계신 곳이 없지만 성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시는 곳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성소는 거룩한 곳이요 말씀이 있는 곳이었다. 누구든지 그곳에 오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사울에게 죽임의 위협을 받고 다급하게 도망치고 쫓기고 있는 다윗은 급한 김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소를 찾았던 것이다. 

다윗이 다급하게 숨을 헐떡거리며 놉의 성소에 나타나자 제사장 아히멜렉은 당황하고 놀랐다. 그래서 다윗에게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물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혼자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윗의 표정과 행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1절) 
그런데 이 순간 다윗이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한다. 2절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 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라고 했다. 제사장을 속인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가? 더구나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여기에 한 가지 분명히 하고 갈 것이 있다. 이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윗은 우리가 그 행동을 본받고 따라갈 사람은 못된다. 어떤 때는 다윗은 우리보다도 더 못하고 더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때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다윗에게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언제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힘들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도망치지 않는다. 비굴하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타협하지도 않는다. 사람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 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달려가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실수하고 범죄하고 넘어지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자신을 책망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과연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쓰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놀라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으면 그것은 더 나쁜 일이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약함과 부족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거룩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소로 가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수록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는 때일수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 사람을 찾아가면 또 실망하게 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또 다시 이용을 당하기도 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했을 때에 실망하고 돌아서면 또 다시 죄를 짓게 된다. 그럴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거룩한 떡을 달라고 한 다윗
다윗이 성소로 나아와서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었는지를 보자. 다윗은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라고 한다. 급한 대로 자신과 또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먹일 것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제사장 아히멜렉은 이 때 놀라운 일을 행한다. 다윗과 그 일행들에게 줄 다른 떡은 없고 제단에서 물린 거룩한 떡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부정하지만 않다면 그 떡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4절에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고 했다. 

이 거룩한 떡이 무엇인가? 6절에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떡 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고 했다.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앞에 진설병상이 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개의 떡을 구워서 하나님 앞에 놓는다. 이 떡은 일 주일마다 한 번씩 새 떡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그 상에서 물려낸 떡은 아무도 먹을 수 없고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히멜렉 제사장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배고픈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 그 거룩한 떡을 먹으라고 내어준 것이다. 다윗도 그것을 잘 알면서 그 떡을 달라고 했고,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허겁지겁 그 떡을 먹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히멜렉은 참으로 멋쟁이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규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또는 전통에만 매달려서 배고파서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감히 하나님께 드렸던 거룩한 떡을 먹으려 한다고 다윗을 책망하지도 않았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와 정신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는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곳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얽어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쫓기고 있는 배고픈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과감히 거룩한 떡을 내주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아히멜렉의 행동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밀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비벼서 먹었느냐고, 왜 안식일에 추수를 하고 탈곡을 했느냐는 비난에 이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율법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윗은 빵을 먹은 후에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무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자신을 지킬 무기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도망자 신분임을 숨기면서 또 거짓말을 했다. 8절에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고 했다. 아히멜렉은 성소에 무기가 있을리 없지만 하나가 있긴 있는데 바로 골리앗의 칼이 있다고 했다. 9절에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고 했다. 

이 칼은 몇 년 전 하나님께서 어린 다윗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꺾어버리신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성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러 성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칼을 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했다. 다윗은 “그런 것이 또 있겠습니까? 그 칼을 내게 주소서”라고 하고 그 칼을 받아들고 나섰다.  

이것 역시 성소의 규정을 어기는 일이었다. 아무리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린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룩한 성소에 보관되어 있는 기념물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마음대로 가지고 가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먼 길을 떠나려는 다윗을 위해서 과감히 그 칼을 내주었다. 그는 규정보다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다윗에게는 그 칼만한 것이 또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기로서의 칼 이상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커다란 산과 같은 골리앗을 이긴 승리를 상징하는 칼이었다. 그 칼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었다. 

어쨌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성소에 들어갔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무기까지 갖추어서 나왔다. 이것은 처음 그가 성소에 들어가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서 성소로 찾아들어갔지만 그는 거기서 당장의 위험을 피하는 것 이상의 것을 얻어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생각과 기대 이상의 것이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시편 16:11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했다. 23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오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거룩한 성소로 찾아가는 믿음이 되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던 다른 사람 도엑
그런데 오늘 말씀에 다른 한 사람이 또 등장한다. 7절에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고 했다. 다윗이 성소에 찾아와서 아히멜렉을 만나서 진설병 떡을 받아먹고 골리앗의 칼을 받아가지고 가는 것을 그가 다 보았다. 아히멜렉이 성소의 규정을 어기고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는 것을 다 보았다. 아니 사울왕이 그렇게 찾고 있는 다윗이 그곳에 나타났고 도망치는 것을 다 보았다.

그는 사울의 신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를 사울의 근위대 대장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 경호실장이나 혹은 비밀경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 때에 왜 그 성소에 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말씀에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 것을 보아 그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또는 어떤 종교적 의무를 하기 위해 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22장을 보면 그는 사울이 다윗이 도망친 것을 알고 급하게 찾으면서 주위 신하들을 몰아칠 때에 자기가 다윗을 보았다고 고발을 한다. 화가 난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들을 보내서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 85명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군인들이 하나님의 기름부은 제사장을 감히 죽이지 못하겠다고 하자 도엑이 나서서 제사장들을 죽였다.

22:18에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고 했다. 그는 제사장들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다 죽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를 버리셨고 누구를 사랑하시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뜻과 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사울에게 인정을 받고 사울의 마음에 들어서 출세하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일을 고발했고 아무런 두려움이나 고민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제사장들을 죽인 것이다. 

똑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소를 찾아온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성소에서 나온 이후의 행동과 반응도 전혀 달랐다. 다윗은 배고픔을 면하고 무기를 얻어가지고 나왔다. 아니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왔다. 그러나 도엑은 성소에서 본 것을 가지고 자신의 출세에 이용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없는 사람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했다.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믿음과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도엑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악해진 것이다.

다윗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성소로 나아오라. 욕심과 정욕을 버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라. 그렇지 않으면 도엑처럼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만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만 보고 나온다. 전다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져서 나온다. 다윗처럼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가면 우리에게 떡과 칼을 주신다.

떡은 말씀이다. 마태복음 4:4, 에스겔 2:1. 하나님의 성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이며 영혼의 양식이다. 하나님께 나오면 우리를 먹여주신다. 로뎀나무 밑에 누워 있는 엘리야를 먹여주셨듯이 말이다.

칼도 말씀이다. 에베소서 6: . 칼은 무기이다. 전쟁에서 나를 지켜주고 적을 물리치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고 불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말씀이라는 무기를 주신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일하신다. 말씀은 성령이 일하시는 도구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을 통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나오면 성령의 은혜를 받는다. 또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위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밖에는 몰랐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과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