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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의 세례요한 (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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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세례요한 (마 3:1-6)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은 인류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눌 만큼 중대한 일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선구자(先驅者)를 보내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고, 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므로써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때는 A.D. 27년 전후.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계속된 400년의 침묵을 깨뜨리고 등장한 세례요한의 사역은 신·구약 제사의 분기점이 됩니다. 율법에 규정된 희생제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구원받는 신약 시대의 막을 여는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세례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제사장 가문이었고, 따라서 요한이 대제사장 아론의 후예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한 의미를 지닙니다(눅 1:5). 

그는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며 몰려오는 무리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이 현대 성도들에게는 당연한 기독교 의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의식과 관련하여, 씻는 것은 결례(潔禮) 의식을 따라 씻는 것과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씻는 것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스스로 씻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고 타인의 회개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며 세례를 베푼 요한의 사역은 한마디로 새롭고도 충격적이었습니다. 4복음서가 모두 세례요한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역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필수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후일 요한을 요단 강변에서 만나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요한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목적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했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무엇을 위하여’ 먹느냐가 중요하게 됩니다. 

무엇을 입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입느냐가 중요합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버느냐 입니다.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는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 세례요한의 삶을 살펴보며, 새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읍시다. 


1. 그의 삶의 특징 : 부유한 삶에 관심 없었음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본문은 세례요한의 외양(外樣)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의식주(衣食住)는 소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낙타털 옷, 가죽 띠, 그리고 메뚜기와 석청 같은 것들은 그저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이 입는 평범한 의상과 식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외양은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와도 흡사합니다. 왕하 1:8에서 사람들이 엘리야를 가리켜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라고 했는데, 이처럼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케 하는 본문의 묘사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각해보면 세례요한은 집안이 가난하다거나 가세(家勢)가 기울어서 이렇게 지낸 것은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었고, 훌륭한 음식을 먹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부유한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보다 비록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지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삶은 세속적인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 의식주 생활을 초월하여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눅 3:2)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함으로써 곧 오실 메시야의 앞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의 삶은 부자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한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습니다. 마치 엘리야처럼 광야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엘리야를 책임져 주신 것처럼 광야의 세례요한을 지켜주셨고, 오늘도 주님 주시는 삶의 목적에 성실한 사람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사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삶의 목적과 의미 같은 것은 먹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먹는 문제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책임져 주셨습니까?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고, 사르밧 과부의 통에 엄마 남지 않은 가루와 기름을 통해서 먹을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쳤을 때에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로부터 내리셔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고 하셨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명예를 얻게 되면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록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짧은 인생을 살다 가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이 제일 축복된 삶입니다.


2. 그의 삶의 초점 : 주의 길 준비  

3절=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였습니다. 본절의 예언은 이사야 40:3의 인용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구약의 포로 귀환 시대에 이방 땅의 포로들을 해방시켜 끌고 오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절(3절)에서는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여 구약에서 거듭 예언된 바 있는 메시야의 오심을 보면서 백성들에게 기뻐 외치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포로 귀환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으나 이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의 외치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요한의 모든 삶의 초점은 ‘주의 길 준비’에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왕의 행차나 군대가 행진할 때 이에 앞서서 메신저 혹은 전령사를 보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전령사들은 앞서가면서 왕의 행차나 군대의 도착을 미리 알리고, 길이 험하거나 방해물이 있으면 이를 제거하고 평탄케 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왕이나 군대의 행진을 준비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와같이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초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아마도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일 것이고,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면서 몰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중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는 수행원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을 닦고 준비한 예외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에도 예수님처럼 기적이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천사의 예언처럼 기적적으로 아기를 낳았고, 이를 통해 동정녀의 탄생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생부터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출생이었습니다.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단순하고 청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당시 최고 권세자인 헤롯왕의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에는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도 의롭고 정직하게 사시다가 인류의 죄짐을 지시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의 삶의 초점은 오직 그리스도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데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요한에게 ‘당신이 누구냐?’ 물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자임을 선언했습니다.  

요 1:27=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단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걸었습니다. 그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세상에는 신·불신을 초월하여 평생을 바느질하며 모은 돈 18억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할머니, 평생을 김밥 장사하며 모은 돈 1억원을 학교에 기부한 할머니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신 여러분은 한평생 사는 동안 목숨바쳐 사랑할 만한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3. 그의 삶의 사명 : 하나님 나라 전파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의 삶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2절은 그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400년 동안의 침묵을 깨는 일성이었습니다. 

여기 ‘회개하라’ 는 것은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의지적 행동을 동반하여 완전히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회개하다’를 ‘repent'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후회하다‘ 라는 뜻과 ’회개하다‘ 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회개와 후회를 혼용(混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회는 단순히 과거만을 돌아보며 통탄하는 것인 반면, 회개는 미래에 대한 결단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후회는 단지 과거 자신의 잘못된 결정이나 행동으로 인해 괴로워할 뿐 중심의 변화는 수반되지 않습니다. ‘그때 이렇게 할 걸’, ‘젊었을 때 좀더 열심히 공부할 걸’ 하고 많이들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후회가 그들을 결코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후회는 중심의 변화도 아니요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결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회개는 과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오던 죄악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이제 앞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단어는 사실 ‘repent' 보다는 ’turn'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하고 보다 진보적인 삶을 살게 하지만, 후회는 죄책과 멸망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두 사람 모두 주님을 배신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가룟유다는 후회만 함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와 후회의 차이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은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천국(天國) 곧 하늘 나라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본절, 4:17)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이 부활·승천한 지금의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여 심판하실 때 비로소 그 나라는 완성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임한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속성은 빛이며, 죄의 속성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이 된 성도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멀리할 때만이 주님의 통치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감에 불타올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요한의 전생애는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새해의 기도 제목으로 올린 것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 새해에는 지금까지 주업(主業)으로 여겼던 것이 부업(副業)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이 주업이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선교 훈련을 받고 해외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내 삶의 자리에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내 삶의 태도를 바꾸면 됩니다.   

과거에는 직장의 일이 주업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부업으로 바꾸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을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맡기신 복음의 현장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의 사업처도 복음의 씨앗을 심는 밭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 (Jimmy Carter, 1924~ )은 백악관 생활 중에도 주일 예배에 철저한 신앙생활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한평생 교회학교 교사직을 천직으로 여겨 충성한 교사입니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애틀랜타에 카터센터를 설립, 냉전 후 지구상에서 야기되는 중대사건의 분쟁해결사로서의 조정 역할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퇴임 후 21년간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국제 해비타트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일환인 지미카터 특별건축사업(JCWP)을 해오고 있으며, 2001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충청남도 아산 등에서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미국의 타임지가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난 뒤의 카터의 활동을 소개한 문구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카터! 그는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했던 유일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이 말은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카터에게는 백악관이 그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권력이 목표가 아니고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라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산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목숨 바쳐 충성할 수 있는 일을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고 나아가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복된 자들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하나님 말씀대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의 말기’ 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징조가 매일같이 나타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세례요한은 초림 예수를 준비하는 선구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 갔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볼만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가 여러분의 유대 광야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주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외치십시오.

“회개하라.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왔느니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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