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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의 마음으로 섬깁시다 (막 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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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마음으로 섬깁시다 (마가복음 6:34-44)

성경에 기록된 기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먹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당연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한 어린이의 헌신으로 사람들의 이기심이 변화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어린이의 도시락을 받아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실 때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또는 이기심이 부끄러워 품에 숨겼던 음식들을 꺼내어 나누어 먹었다고 합니다.  또는 예수님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주머니를 자발적으로 털도록 하셨다는 재미난 설명도 합니다.  

이와 조금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예수님이 어린이의 도시락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후 음식을 서로 나누었더니 나눌수록 점점 증가하여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적을 거부하는 해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인품이나 감동적인 설득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먹고도 남는 기적같은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니 창조주로서의 신성은 끝내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에 불과합니다.

기적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에 맞서 과학적인 논리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지 과학으로 설명되어져야만 하는 현상은 아닙니다.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시할 줄 알면서도 성경에 이런 내용을 기록한 것은 기적이 정말 있었다 또는 아니다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이 기적을 통해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오늘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서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을 보여줍니다.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빈 들에 모인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음을 선포합니다.주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 병든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갈릴리 호수 동쪽에서 일어난 오병이어 기적과 또 한 번 이방인 지역에서 보여주신 칠병이어 기적은(마15장, 막8장)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에게 각각 한 번씩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기적이었습니다.주님은 자기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생명의 떡을 주러 오셨습니다. 

이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제공한 구제사업이나 무료급식 자선사업이  아니었습니다.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사역입니다.대체적으로 갈릴리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빈곤층이 많았지만 그날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복음에 굶주리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고단한 삶을 살던 지친 영혼들이었습니다.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갈증을 잠시 해소시켰지만 헤롯 왕의 미움을 받고 체포되어 순교한 이후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공허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 우리의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희망을 걸었는데 여우처럼 교활한 헤롯에게 희생을 당하였으니 지도자를 잃은 실망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장례식을 마친 후 예수님께 이 사실을 보고를 드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적한 곳 빈 들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움직임을 보고 먼저 그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빈 들은 고독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과도 같았고 거기 모인 백성들의 공허한 마음과도 같았습니다.

그날 빈 들에서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작은 무리가 아닙니다.그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먼 길을 걷고 달려와 그 빈 들판에 모였을까요? 거기 가면 나사렛 예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건장한 남자들이 하루종일 빈 들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는 기적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어떻게 그 많은 남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광야로 모여왔을까요? 그날이 갈릴리 지역의 공휴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로마 정부의 정치적 탄압과 무거운 세금 징수에 맞서 촛불시위라도 하려 했을까요?

일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는 사회, 일거리가 없으니 수입이 줄어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가져다 줄 수 없는 가난한 살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의사를 찾아갈 형편이 못되어 체념하고 살았고, 질병이 악화되어 평생 불구자로 살거나 병을 앓다 죽음을 당하는 힘 없고 가련한 백성들이 거기 모여들었습니다.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영낙없이 목자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살피고 인도할 목자가 필요하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나 유대 지역을 관장하던 헤롯 임금은 힘 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군주들이었지 선량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도 자기 몸만 위하는 배부른 종교 귀족들이었지 백성들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목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잠시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셔만 하고 이 불쌍한 백성들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더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날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말씀을 보면 압니다.  오늘 본문 앞 부분을 보면 제자들은 여러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결과를 보고드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바빴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정을 아시고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까지 따라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결국 온 종일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가까워졌습니다.예수님도 쉼이 필요했지만 자기들도 쉬고 싶었고 편안히 저녁을 먹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참다 못해 예수님께 사람들을 돌려보내시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사람들이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에 배고픈 상태로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보실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이방인들과 사흘을 함께 계신 후 그들이 돌아갈 때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막7:3)  하시고 먹을 것을 가져오라 하시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거기 있던 사천 명을 먹여 보내셨던 적이 있습니다.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이 각종 민원을 해결해줘야 하는 지역구 주민처럼 보였습니다.  온종일 사람들과 지냈으니 오늘 예정된 업무는 이정도로 끝내고 싶었습니다.제자들은 예수님의 수행원 임무는 충실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이것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아직 미숙한 목동들의 차이였습니다.  

광야 빈 들에 모인 사람들은 하루 종일 주님과 함께 있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예수님과 더 오랜 시간 함께 지내고 싶지만 그곳은 광야 빈 들이었으니 이제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주님의 말씀 들을 때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집중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먼 길을 돌아가다 보면 뱃속에서는 금방 쪼르륵 소리가 들릴 겁니다.  배고픔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은 사람들을 위해 휴식 시간도 반납하고 하루 종일 돌보셨던 주님이 먹을 때가 되었는데 주린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빈 들에는 어른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있었습니다.어른들은 배고픔을 좀 참고 갈 수 있지만 어린이들은 아빠 엄마에게 먹을 것 달라 칭얼대며 졸랐을 겁니다.조금만 참으라고 달래지만 먼 길을 걸어가야 하고 집에 가서 언제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을지 난감합니다.어떤 부모는 칭얼대는 아이를 나무라며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좀 일찍 끝내주시고 밝은 낮에 돌아가게 할 것이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붙들어놓고 그냥 가라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참 애매하구만…’  말씀을 들으며 영혼이 배불렀던 사람들이 육신의 배고픔이라는 현실 앞에 마음이 상하여 길 가던 도중에 받은 은혜를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그래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으셨습니다.예수님은 조금 후에 일어날 일을 대비해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열심히 가르치고 계시는데 이런 마음을 알 수 없는 제자들이 걱정스러워 먼저 나서서 예수님께 귀뜸을 했습니다.‘날이 저물어갑니다.  사람들을 이제 그만 돌려보내시지요.각자 마을로 돌아가 음식을 사먹도록 해야겠습니다.’물론 예수님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하여 드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보다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으면 훨씬 좋았을 뻔 하였습니다.‘선생님, 날이 저물고 식사시간이 가까웠는데 이 사람들에게 뭘 좀 먹여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자기들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먼저 여쭤보는 믿음 정도는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제자들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둘씩 짝을 지어 마을을 다니며 열심히 전도하고 돌아와 신이나서 보고드릴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며 ‘저 사람들을 보낼 필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십니다. 그때 빌립이 ‘각 사람에게 조금씩 돈을 받는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이 사람들을 다 먹이기에 부족합니다’하고 돈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돈이 있다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갑자기 주문 배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그러니까 시험입니다.  제자들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한 단계 끌어올리시려는 훈련이었습니다.예수님은 빌립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마음을 모르고 황당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하십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흩어져 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광고했겠지요.  ‘주님께서 먹을 것을 찾으시는데 혹시 여러분 중에 누구 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때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담긴 도시락을 내밀었습니다.선생님께서 하루종일 말씀하시고 환자들 고쳐주시느라 배고프신가보다 생각하고 어린이가 자기 먹을 것을 양보하여 드리지 않았겠습니까?안드레가 이 도시락을 받아 주님께 드리며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합니다.어차피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쯤에서 포기하시고 지금이라도 빨리 돌려보내자는 뜻이 아닐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초자연적 사건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거기 있던 다른 사람도 보리떡과 물고기 도시락을 품에 넣고 있었는지 모릅니다.예수께 드리고 싶지만 너무 초라하여 차마 예수께 내놓기 부끄러워 머뭇거렸을 수도 있습니다.그런데 이 어린이가 가장 먼저 자기의 것을 내놓았습니다.이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날의 기적은 어린이의 헌신을 통해 그 빛을 나타냈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도 거기 있던 어른들도 이 어린이의 순수한 헌신에 마음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날 벌어진 엄청난 기적의 현장에서 누가 가장 은혜를 받고 기쁨으로 충만했을까요? 당연히 보리떡과 물고기 도시락을 드린 어린이가 아니었을까요? 어린이가 도시락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를 먹여주세요’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그저 존경하는 예수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드린 오병이어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양식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어린이가 그날 벌어진 놀라운 광경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습니까?어떤 이들은 이 음식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고 제자들이 나눠주는대로 맛있게 먹기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할 때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한 다음에 언제나 이 어린이의 헌신을 칭찬합니다.  남에게 베풀기에는 너무 초라한 것이었지만 나보다 예수님이 더 필요하신 것을 알고 기쁨으로 드렸던 어린이의 마음과 행동이 칭찬받기에 충분합니다.나눔의 삶은 대단한 것을 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것을 충분히 챙긴 다음에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더라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내 것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주셨다’했습니다. 겨우 요기나 할 정도로 간당간당하게 주신 것이 아니라 먹고 더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배불리 먹도록 주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했습니다.그날 빈 들에 모인 갈릴리 사람들은 먹고도 남을만큼 음식을 싸들고 소풍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 눈에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보였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어린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그 많은 사람을 먹인 이 사람이야말로 모세가 예언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그들을 인도했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으니 우리의 고생은 끝이 나고 더 이상 빈궁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거라는 희망에 들떠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람들이 또 예수님을 만나러 몰려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제 먹은 기적의 떡을 오늘도 또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이 사람들의 이기심을 변화시켜 각자 가져온 도시락을 꺼내어 먹은 것이라는 식으로 억지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은 이런 것 말고도 책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였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비과학적인 신비주의로 여기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해시키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받으면 되고 그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피곤한 중에도 거기 모인 양무리들의 필요를 하나라도 더 채워주시려고 세심한 배려를 베푸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 바랍니다.  제자들처럼 주님도 피곤하셨고 식사하실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지치고 병들고 배고픈 양들이 더 불쌍하였습니다.  자신보다 양들의 형편을 먼저 살피고 돌보시는 주님은 정말 선한 목자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님의 삶을 보고 배우며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 사는 사람들입니다.교회 설립 25주년 때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우리교회가 중점적으로 기도하며 실천하기를 바라는 목표는 섬김과 나눔입니다.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고 나눔에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 바랍니다.주님께 작은 것을 드려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어린 아이의 헌신과 나눔이 우리 가운데 계속 일어나기 바랍니다.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 섬김과 나눔의 기쁨을 직접 체험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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