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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삼상 3:1-10, 요 1:43-51, 고전 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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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삼상 3:1-10, 요 1:43-51, 고전 6:12-20)


<빌립의 전도에 시큰둥한 나다나엘>

오늘은 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1: 43-51절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43절에 보면 예수님은 먼저 빌립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누가복음 6: 14절을 보면 빌립은 예수님의 12제자들, 즉 사도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제외하고서는 빌립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요 6:7; 12:21f.; 14:8f.). 그것은 빌립이 베드로나 야고보, 혹은 요한과 같이 특출한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께서 빌립을 부르시는 장면은 직선적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한마디를 듣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특출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불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가능성을 보시는 것이 주님이 사람을 쓰시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러주신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입니다. 성질이 급하고 고약합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현재나 외모나 신분을 보지 않으시고, 장차 ‘게바’, 즉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 될 가능성을 보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사람을 고르시는 기준은 미래에 변화될 가능성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예수님에 대해서 전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바돌로매라고 봅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12제자를 소개할 때 항상 빌립 뒤에 바돌로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마 10:3; 막 3:18; 눅 6:14).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빌립의 이름 다음에 반드시 나다나엘이 뒤따른다는 설명입니다. 설득력이 있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이름이 바요나 시몬, 즉 요나의 아들 시몬인 것처럼(마 16:17), 바돌로매 역시 돌로매의 아들, 즉 성이며, 이름은 나다나엘이라는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 예수에 대해서 전하자, 나다나엘이 보인 첫 번째 반응입니다. 46절을 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한마디로 빈정거리는 태도이지요. 나사렛 촌동네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겠느냐는 조롱입니다. 사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나온다는 말이 없으므로,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나사렛 작은 동네에서 메시아가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Come & See!>

빌립은 나다나엘의 첫 번째 반응이 시큰둥했지만 일체 동요하지 않습니다. 설명을 덧붙이거나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빌립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가 약속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일체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할 뿐이지요. 46절에 보니까 “Come & See!”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고, 한번 와서 직접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면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오늘 우리도 우리의 일가친척이나 친구, 이웃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믿은 우리에게 먼저 은혜와 기쁨이 충만해야 하겠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능력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와서 보라!”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와서 보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다나엘,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를 한 뒤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오자 말씀하십니다. 47절입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참 흥미로운 말이지요. 자기를 비웃고 업신여긴 사람에게 최고의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을 써주시는 기준을 또 한 번 보게 됩니다. 항상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변화될 미래, 그 가능성을 보시는 것이지요. 

사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 듣자마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말했을 때 그 어떤 위선이나 가식도 없습니다. 일본말로 하면 ‘타테마에’(建て前)가 아닌 ‘혼네’(本音), 즉 속마음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솔직한 성품을 높이 사셨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책을 읽어보면 어떤 위선이나 가식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이 아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이 알고 있는 적나라한 자기 모습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지요.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고민하며 방황하는 속마음을 여과 없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찾고자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정직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48절의 말씀을 봅시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저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칭찬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시고서는 이런 칭찬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명상에 빠졌던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 아래는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묵상하는 자리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는 자리입니다. 일손을 멈추고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QT, Quiet Time, 조용한 시간, 묵상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산이나 숲, 조용한 곳을 주기적으로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소음과 오염으로 찌든 곳에서 벗어나 혼자 고요히 명상하고 성찰할 수 있는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

오늘 봉독한 구약 사무엘상 3: 1-10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갈 무렵 어린 사무엘은 실로의 제사장이자 사사였던 엘리 문하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아주 드물었습니다. 

1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稀貴)하여 이상(異像)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무슨 뜻입니까? 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일이 아주 드물었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한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탐욕과 증오에 사로잡혀 고요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려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제사장인 엘리부터 그랬습니다. 제사장인 엘리 가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인 엘리로부터 일반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과 귀를 닫고서는 복잡한 세상 한가운데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한 환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러주실 때에도 엘리나 사무엘은 두 번씩이나 못 알아듣다가 세 번째에 가서야 알아듣습니다. 한 밤중에 사무엘은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누워 있다가 새벽녘에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쪼르르 달려갔더니 엘리는 사무엘을 부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주님이 불러주셨지만 엘리는 물론이고 사무엘 역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니까 이것을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째 음성을 들은 후에야 마침내 엘리도 주님의 부르심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사무엘은 겸손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1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임금 제도가 생기기 전에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유일한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그런 사무엘도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시는 음성을 세 번째에 가서야 비로소 알아듣습니다. 워낙 그 시대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한 환상을 볼 수 있는 눈도 모두 감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6: 12-20절 말씀을 잠깐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주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자유를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우상 앞에 바친 제물이라도 다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창기와 매춘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오해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임을 역설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는 ‘freedom from something’, 즉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freedom for something’, 즉 ‘∼∼을 위한 자유’라는 적극적이며 책임적 자유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본문 12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 전체 인구의 1/3이 비만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양껏 먹는 것은 자유이나, 건강을 해칠 정도로 폭식을 하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칩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 10억 가까운 인구가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폭식의 자유는 오히려 인류의 평화와 정의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귀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왜 주님의 환상을 보지 못합니까? 눈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가능한 것과 유익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데 바쁠 뿐, 일손을 멈추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명상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전보다 더 큰 일을 행하실 주님>

이제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각적으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이러한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미래지향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50-5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미래에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사닥다리가 되신다는 말씀이지요.

우리 내리교회는 금년에 127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더 짧은 교회들이 급성장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아예 돌아볼 과거가 없었기에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미래에 대한 비전만 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내리교회 역시 과거에 있었던 영광스러운 전통만 붙든 채 하나님이 하실 미래의 비전이나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골동품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았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이제 미래에는 이보다 훨씬 더 놀랍고 신비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현절 두 번째 주일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아무리 바쁘고 복잡한 삶 한가운데 살아가신다고 할지라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다시 무화과나무 아래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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