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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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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3:6)


(롬 13: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이 되어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뿐 아니라 온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 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쬐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 나는 생선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 일 없을 때에는 쓸모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말인가' 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 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동일하게 일꾼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같은 일군이라도 높은 사람에게 택함 받아 일하면 귀하게 여깁니다.
사형 집행관인 막나니로 일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으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다는 자부심과 행복감에서 일 하여야 합니다.

일꾼이라고 하는 말은 겸손과 훌륭한 사역자들을 이었습니다는 뜻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역자들의 최고의 영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가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 전체가 하나님께 예속되어진 존재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은 겸손과 명예의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면에서 동역 자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고전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러나 바울이 자기를 일꾼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동역 자로 친구로 부르시더라도 실제로는 우리가 그분의 일꾼이라는 신분을  항상 잊지 않고 절대적으로 복종할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동등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모두 그 행한 수고에 따라 상을 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성도의 봉사와 하나님의 일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3:6절에서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심은 일이란 교회를 세우는 일을 의미합니다. 또한 물을 주는 일은 이미 세워진 교회에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라나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한 사역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근본적인 일이 아닙니다. 신앙 성장을 시키는 가장 위대한 힘과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며 일꾼들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부분적으로 맡아 수행할 뿐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러 은사들을 필요에 따라 주시기도 하며, 물질이나 명예 등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지닌 여러 가지 능력이나 은사들이 개인의 자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선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자신들의 일이 어디까지나 완전한 것이 아니며, 작고 부분적인 사역임을 명심해야만 하겠습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봉사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한다면, 일을 맡기시고 능력을 공급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도들은 주의 일을 할 때에 항상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꾼의 바른 자세입니다.
고전3:8에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일꾼이 어떤 사역을 맡아서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일꾼들이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하지만 전체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들은 하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꾼들의 봉사는 하나같이 귀하다는 의미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일에는 귀하고 천함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자의 사역이나 교회의 내부 살림을 꾸려가는 집사의 사역 등등의 모든 사역이 귀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자랑거리가 되는가를 다지기에 앞서 비록 적은 일이라도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도의 봉사에는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명의 감당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을 '봉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수행하는 것이 바로 참된 의미에서의 봉사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롬6:22-23)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일꾼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잇는 영생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킨 것이며 인간을 본래대로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된 결과 초래되는 것은 죄의 종 된 결과와 같이 고통과 핍박, 절망이 아니라 기쁨이며 영생이며 참 자유입니다(요 8:32).

그러나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이제 다시금 하나님의 종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은(마 10:38) 바로 하나님의 종 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며 아직까지 죄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말씀이 하라는 대로 하고, 말씀이 금하라는 것을 금하는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메여 순종하는 것을 죄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죄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내 원하는 대로,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은 죄의 일꾼이라고 하고 거기서 해방되어  하나님에게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죄의 일꾼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꾸어 저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구원에의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물론이고 삶의 표면에도 일꾼으로서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생각이나 가치관이 삶의 현장에서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부정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그렇고 그렇다'는 식의 조소를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자진하여 `일꾼으로 헌신하려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군은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할까요

하나님만 믿고 일해야 합니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다윗의 이 시 속에는 그 자신의 삶의 태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어져야 할 삶의 교훈으로서 원하시는 삶의 표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한마디로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다윗은 철저하게 영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직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혼이란 육체적인 것과 대조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생각하나니'(롬 8:5)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멸망이요, 영혼의 생각은 영생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통하지 않은 영혼의 만족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외의 다른 우상들을 섬김으로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인간만이 영혼이 있기 때문에 종교적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고 교제하기 위하여 심어 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본능을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다른 신을 정하여 놓고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행동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영혼의 문제를 물질로써 해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9)라고 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발전될수록 사람들은 이러한 영혼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쾌락과 방종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공허를 물질로 채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혼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물질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선교적 사명이 여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안정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오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63:6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의 일꾼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믿고 기도의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로 가득 찬 삶은 결코 성공적인 삶일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은 활력을 잃게 되고, 우리 속에 내주하는 성령은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되므로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없음은 물론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부적절감을 염려의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펜테코스트 J. Dwight Pentecost). 즉 어떤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염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을 수도 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믿고 그에게 문제를 아뢰고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셔야 할 문제를 우리가 주제넘게 맡아서 처리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고 염려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놓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때에 지각에 뛰어난 평강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승리도 성공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불의 응답을 받은 것은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응답을 받은 비결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을 항상 갖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로써 은밀히 교제하지 않는 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엘리야의 태도는 그가 하나님을 단순히 믿었다는 데에서 그 탁월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인간으로서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단순히 믿었다는 데에 그 위대성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능치 못할 일이 전혀 없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는 이 사실을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느질하는 두 부인중 한 사람은 우리 집 그이는 뭐가 잘 안 된다고 하는데 엉덩이를 깁고 다른 한 부인은 잘 된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무릎을 깁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영광 중심으로 일해야 합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 목적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피로 사신 목적은 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므로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몸으로 불의의 병기를 삼지 말고 오직 의의 병기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15세기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이고. 조각가이며. 건축가이자 과학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43세 때 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화가로서 완숙했을 때 이태리 밀란의 두도 빙코 공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화면으로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빙코 공의 부탁을 받은 그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완성했습니다. 열두 제자를 세 사람씩 그룹을 지어 중앙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고. 양쪽에는 제자들이 셋씩. 셋씩 즉 예수님의 오른쪽에 제자 6명. 왼쪽에 제자 6명을 그려 놓았습니다.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으레 그렇듯이 그는 절친한 친구를 한 사람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최대의 걸작 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 손에 들려진 은잔이 어찌나 섬세한지 그 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느낀 바대로 다빈치에게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붓을 들고 은잔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눈길을 끌면 그것은 우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신앙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영광 중심으로 일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상급만 바라고 일해야 합니다.
고전3:8에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일꾼 각자가 맡은 사역의 종류에 따라 상급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일꾼들이 각기 수고한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중앙일보 2007.11.27. 기사에 미국 미주리 캔사스시티의 한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는 에바 베츠는 최근 15,000달러의 수표를 은행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속임수 광고라고 생각한 그녀는 편지 봉투를 구석에 밀어 넣고 잊었으나‘칼 한젤리우스’가 가게를 정기적으로 찾던 노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합니다. 은행에 확인해 보니 수표는 정상 발급된 것이었다 합니다. 26일 미국 언론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에바 베츠는 눈물을 쏟았다고 회고했다합니다. 

수년 동안 노인과 친분을 쌓았으며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쇼핑을 도왔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병문안을 하기도 했었다합니다. 노인이 요양 시설로 옮겨간 후 최근 1년간 만나지 못했었는데, 거액의 수표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평소 말이 없고 혼자 살았던 노인은 친절한 에바 베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15,000달러에 달하는 수표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수표는 최근 숨은 거둔 노인의 유산이었다 합니다. 주변에서는 에바 베츠가 항상 밝은 미소로 고객을 맞이하고 친절하기 이를 데 없다고 평하며 또 평소 시간이 나면 병원에서 노인과 아이들을 위한 자원 봉사 활동을 해 왔다합니다. 에바 베츠는 노인의 모습을 회상하며 감사와 슬픔에 젖었으며, 노인의 유산으로 뺑소니 사고를 당해 얻게 된 은행 빚을 갚을 계획이라고 밝혔다합니다. 큰 경제적 곤란을 겪던 에바 베츠에게 노인이 선물을 한 셈이라 합니다. 

이 여인은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교훈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 25:14-30)
달란트 비유 속에는 하나님께 선한 자와 하나님께 악한 자라는 두 부류의 인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하여 그 이상의 이윤을 남기는 자를 일컫습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바의 것, 곧 재물, 능력 등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자가 하나님께 선한 자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보여 주는 하나님께 악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이윤을 남기지 않고 묻어 두는 자입니다. 곧 하나님께 악한 자란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능력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만드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달란트 비유는 주인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돌리며 그것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선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의 초점은 달란트의 양이 아니었고 주인께서 맡긴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 종의 충성이었습니다. 주의 일을 맡은 일꾼에게 있어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충성이며, 그 충성의 대가가 하나님의 상급인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중에서도 남보다 더욱 큰 상급을 받는다면 진정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최상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라면, 주의 일꾼이라면 마땅히 더욱 큰 상급을 바라는 선한 욕심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록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눅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일꾼이 한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주인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주의 종들이 행한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에 상급은 고사하고 책망을 듣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일꾼인 성도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의 일에 대해 보다 신중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 하되 상 주심을 믿고 일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조세를 징수하는 관리들도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서 국가 권력의 유지에 힘쓰고 크리스천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역사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세속의 일을 하는 관리까지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고 세상과 하나님을 유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안에 계신 하나님은 보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모든 일꾼을 하나님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리자로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욱 그렇습니다. 만민 그운데서 선택하여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으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 중심하며 주실 상급을 믿고 하나님의 좋은 일꾼의 사명을 감당하며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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