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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아들이라 (사 60:1-3, 요 12: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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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이라 (사 60:1-3, 요 12:35-36)

신약성경에는 아들이라는 그리스어의 두 단어가 있습니다. ‘테크논’과 ‘휘오스’입니다. ‘테크논’이란 단어의 의미는 ‘출생이라는 단순한 사실적 관계에 의한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에는 혈연적 의미가 강합니다. ‘휘오스’라는 단어는 ‘그 부모의 인격이나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들로서 구별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어 ‘테크논’은 아기이거나 미성숙한 아들을 의미하고, ‘휘오스’는 성숙한 아들로 묘사하는데 가장 많이 쓰입니다. 우리는 ‘테크논’으로 태어나서 ‘휘오스’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에는 빛의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휘오이 포토스’라는 말입니다. ‘테크나 포토스’가 아니라 ‘휘오이 포토스’란 말은 빛의 아들은 성숙한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빛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관계개념을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를 잘 아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작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소중한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다음으로 소중한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믿음도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왕이시지만 신하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통치가 아니라 통치권을 공유할 가족을 얻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할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가 뒤집히게 된 바다를 향해 잔잔하게 했을 때에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백부장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워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성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빛의 아들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빛의 아들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빛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정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빛의 아들’은 빛이신 분의 아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분의 아들이라는 확신입니다. 
  
35절과 36절에는 ‘빛’이란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에서 빛이란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빛의 중요성을 깨우칩니다. 빛이 없는 세상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은 빛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은 우리가 그 빛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가 빛의 아들로 어두운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빛의 아들은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야 합니다. 

35절에는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빛의 아들은 어둠에 다닐 수 없습니다. 빛의 아들이 가는 곳에는 어둠이 사라집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입니다. 동물이 공기를 떠나면 죽음입니다. 빛의 아들이 빛을 떠나면 죽음입니다. 빛의 아들이 빛을 떠나면 죽음인 것은 빛은 빛의 아들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빛의 아들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빛의 아들의 삶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9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역사합니다. 빛은 무질서를 질서 있게 하고, 혼돈한 것은 정돈하고, 공허한 것을 채웁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모든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개인에게 오시기 전에는 우리도 무질서와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이 사회가 무질서와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나라가 무질서와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세계가 무질서와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왜 무질서합니까? 요한복음 1:5에는 그 해답을 줍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비로소 나라가 바뀝니다. 사회가 바뀝니다. 개인이 바뀝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나라마다 질서가 있고, 생명을 존중하고, 인권이 세워져 있고, 평화가 있고, 경제가 성장하고, 다른 나라를 원조하고, 부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빛이 들어와서 어둠과 무질서, 혼돈과 흑암이 물러가고 정의, 사랑, 평화가 들어오니까 그렇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온갖 어둠의 세력이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빛이 있습니다. 그 삶에 생명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빛이 있으면 환해지는 것은 자연적 법칙입니다. 인간의 영혼이나 사회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갇혀있던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라고 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악한 영은 멸망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때에 “일어나라” 한 마디에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빛이 들어가면 죽음도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말씀을 통하여 무지가 물러갑니다. 율법이나, 무지나, 귀신이나, 죽음이나 이 모든 것은 어둠의 권세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모두가 물러갑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면서도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울에게 쫓겨 굴에 숨어 있으면서도 “내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양을 치면서 험한 일을 많이 만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빛 가운데 살면,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은 이런 용기와 결단을 가집니다. 
  
바울의 독특한 신학적 용어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 6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깊이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이며 평안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문제의 해결을 받습니다.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부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강건합니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후손 열 사람을 보세요. 모두 오래 살았습니다. 900년을 산 사람들 가운데 유독 한 사람 에녹만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가장 짧게 산 것같지만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았으니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삶은 짧은 삶 같지만 가장 오래 산 삶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의 복입니다. 성경은 “주 안에 죽은 자”가 복되다고 합니다. 가장 복이 있는 자가 주 안에서 죽은 자입니다. 빛 안에서 죽은 죽음은 암흑이 아니라 밝음입니다. 
  
아파트가 단전이 되어 흑암 가운데 몇 시간을 지나고 밤새 추위에 떨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집집마다 전구가 있고 전선이 있어도 전기 공급이 끊어지면 전기는 없습니다. 밝음이 없고 어둠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아무리 호화로운 삶을 살아도 어둠의 삶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고 살아도 없는 삶입니다.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본 기록은 1977년 7월 13일 밤 미국 뉴욕의 단전사고입니다. 25시간 동안 퀸스 지역의 일부분을 제외한 뉴욕 전역에 전기가 꺼진 것입니다. 뉴욕에 전기를 공급하는 콘 에디슨 발전소에 낙뢰로 뉴욕이 암흑이 된 것입니다. 이 때 상점 1,700곳이 약탈을 당하고, 3,000명 이상의 약탈범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한 재산피해가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800만 명이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빛이 없다는 것이 이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빚을 진 목사님들이 제일 잘 부르는 찬송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입니다. 이 찬송을 보세요. 얼마나 힘이 있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빛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과 함께 빛 가운데서 다닙시다. 빛 가운데 다니면 우리의 전 삶이 할렐루야의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고 빛의 아들은 빛입니다. 

36절 상반절에는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들은 작은 그리스도입니다. 루터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된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빛의 아들은 빛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있을 동안에”라고 하셨는데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빛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번으로 영원히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신 그 후로 빛이 없어진 적이 없습니다. 빛은 한번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로 한 번 이 땅에 오셨고 그 후로 영원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 우리의 빛이시며 구세주이십니다. 다시 어두워지지 않는 빛이시며 다시 멸망시키지 않는 구세주이십니다. 
  
요한복음 8:12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동안 그를 따르는 자, 그를 믿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멸망치 않습니다.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빛의 아들이 됩니다. 
  
빛의 아들은 아버지가 빛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빛이 아들에게 있어야 빛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빛인데 아들이 빛이 아니면 그 아들은 참 아들이 아닙니다. 빛이 없으면 빛의 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빛의 아들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빛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은 빛입니다. 등대가 빛을 잃어버리면 등대는 더 이상 등대가 아닙니다. 등대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초가 타지 않으면 절대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초는 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초가 타지 않으면 빛이 드러나지 않고 밝게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의 아들인 것은 우리 안에 아버지의 빛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똑같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은 아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삭만 아들이라고 합니다. 왜 이삭이 독자입니까? 

창 22:1에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마엘의 육신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영적으로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아브라함의 영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빛이 없습니다. 

로마서 9:8에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합니다. 빛의 아들이란 육신이 아니라 영의 아들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영이 있어야, 아버지의 빛이 있어야 참 아들입니다. 
  
에디스 와튼은 “빛을 발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촛불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어떻게 빛을 반사합니까? 빛과 마주 해야 반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야 예수님의 빛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려고 나갔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들이 많이 나왔기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키가 작은 것을 알고 예수님 주위에 항상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면 미리 나와서 제일 앞에 서 있으면 키가 작은 것도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늦게 나와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즘 같으면 시간경쟁에서 늦으면 이미 경쟁에서 진 것입니다. 퇴출감입니다.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렸는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먼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눅 19:5)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굴이 서로 마주하여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하셨고 삭개오는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고, 억지로 빼앗은 것은 4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빛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고, 빛이 들어가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빛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하신 말씀에 대해 어둠 속에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어둠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빛의 아들이 세상의 아들처럼, 어둠의 아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 됨을 절대 잃지 말고,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즘에는 아들 자랑하는 것은 코미디라고 합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4촌이 되고, 애인이 생기면 8촌이 되고, 장가가면 사돈의 아들이 되고, 공부를 잘하고 일을 잘하면 나라의 아들이 되고, 돈을 잘 벌면 장모의 아들이 되고, 백수가 되면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답니다. 아들이 자식을 낳고 해외로 이민 가면 해외동포가 된답니다. 저도 해외동포 하나 있습니다. 빛의 아들은 몇 촌이나 될까요? 아버지 아들이니 1촌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시니 0촌입니다. 절대로 빛의 아들은 1촌 이상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 빛의 아들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너를 낳았다”,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아들이니”라고 확실한 관계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업 대물림을 아들보다 딸에게 한다고 합니다. 아들보다 딸이 믿음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을 대물림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하나님의 빛을 우리 속에 채웁시다. 그래서 빛의 아들로 살아가는 훈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세요”. “예, 아들이예요”. “아버지 계시냐?” “예”. “아버지 바꿔라”. “아버지 못 바꿉니다”. “어디 아프시냐?” “아니요”. “그럼, 화장실에 계시냐?” “아니요”. “그럼 빨리 바꿔”. “아버지는 못 바꿉니다”. “너 어른한테 장난 치냐?”. “아니요”. “이 고약한 놈, 빨리 바꿔”. “죽어도 아버지는 못 바꿉니다”. “뭐가 어째 못 바꾼다고?” “예,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바꿉니까?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를 못 바꾸겠거든 아버지를 닮으세요. 빛 되세요. 우리 아버지는 빛이시거든요. 빛이신 아버지는 절대 바뀌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시고 언제나 변치 않는 빛이십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주민증에 종교 기록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무종교는 감옥에 간답니다. 종교를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무종교였기에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감옥에 보낸답니다. 
  
여러분의 주민증에 빛의 아들이라 기록하세요. 여러분의 얼굴이 주민증이 되게 사세요. 여러분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빛이 발산 되게 하세요.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모두에게 전하며 삽시다. 그리스도인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빛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빛의 아들로 사는 사람입니다. 가는 곳에 어둠을 물러가고 밝게 비추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빛을 세상에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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