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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이웃은 축복입니다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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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은 축복입니다 (막 2:1-12)


지난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때에 있었던 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영국의 '데릭 레드먼드'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400미터 경주에 금메달을 딸 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준결승전에서 출발의 신호가 울리자 바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경주를 하여 결승전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다리로부터 등으로 예리한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오른쪽 슬와근이 끊기며 트랙 앞으로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지는 당시의 이 극적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의료진들이 달려갔을 때 레드먼드는 미친 사람처럼 그 다리로 경주를 마치려고 했습니다.  뒤에 그는 그 때의 일을 '동물적인 본능'이었다고 회술했습니다.  그가 발을 내딛으려 할 때 T셔츠 바람의 큰 사람이 관중석에서 뛰어나와 의료진들을 뒤로 밀치고 레드먼드에게 달려가서 그를 안았습니다.  그는 데릭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렇게까진 할 것 없어."
그는 우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해야 합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결승점까지 가자."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의료진을 밀어내며 그들은 데릭의 경주선을 따라 끝까지 달렸습니다.  때로 데릭의 머리는 아버지의 어깨에 묻히기도 하였습니다.  관중들은 놀라서 입을 벌렸고, 다음에는 일어서고, 격려의 소리를 외치며 울었습니다.  그날 데릭은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추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아파 쓰러졌을 때 관중석을 떠나 결승점에 가기까지 도와준 아버지의 추억 말입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옆에서 함께 뛰어준 아버지의 추억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추억이 있습니까?  지나온 세월 속에서 내 삶이 가장 힘들었을 때 묵묵히 내 옆에 있어 주었던 고마운 친구의 추억이 있습니까?  내 삶이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함께 아파하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따뜻한 이웃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발달되고, 풍요로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이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을 가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도 지지리도 못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면서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을 더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는 약을 먹어가면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몸부림치던 때가 우리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불과 3, 40년도 채 안 되는 세월이었습니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지금은 목욕을 쉽게 할 수가 있지만 제가 어릴 때만하더라도 목욕은 일년에 두 번 갔습니다.  설과 추석에 말입니다.  설 대목에 목욕탕은 그야말로 마을 반상회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많이 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물을 먹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허벅지를 꼬집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문화 생활을 누리면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의 문화가 발달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극심한 인정(人情)의 가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기심의 극치를 맛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돌변하는 흉악범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참으로 불안한 사회 속에서 마음놓고 거리를 걸어다닐 수도 없습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렸고 내 몸뚱아리 하나도 지키기가 어려운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산업사회, 도시화가 날로 인간을 비인간화 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차라리 문화의 발전이 좀 덜 되어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무엇보다 염려가 되는 것은 엄지손가락 세대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엄지족이라고 합니다.  엄지족이라는 말은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민첩하게 통화하고 정보를 검색하며 게임을 즐기는 신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엄지족들은 공동체 놀이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함께 있는 것이 부담되고 짜증납니다.  그저 혼자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 있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성향이 그러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모들은 아이들 키우기가 어렵다고 해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의 경우에는 한 자녀 이상을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우리 나라의 명절이 아름다운 것은 그 동안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살아오던 형제와 이웃들이 이 명절을 통하여 다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모여서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공동체 놀이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윷놀이와 널뛰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놀이는 결코 혼자서 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어울려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양보도 배우고, 리더십도 배웁니다.

우리 사회가 어려웠을 때에는 그래도 훈훈한 인정이 있었습니다.  이웃간의 정감이 있었습니다.  어려웠을 때 위로해 주고, 지쳐 쓰러졌을 때 일으켜 주는 이웃이 있었기에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오늘의 시대를 "홍수 속에 가뭄과 같은 시대"라고 말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가물게 되면 마실 물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되어도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방 천지에 물 난리로 야단법석이지만 그러나 정작 마실 물은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로 홍수 속의 가뭄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오천만이 넘는 엄청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심지의 거리를 걷게 되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걸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자꾸만 닫혀지고 인정은 메말라져 가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수많은 이웃과 친구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 중풍병을 앓고 있는 이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비록 당신은 중풍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리고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부자보다는 훨씬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람이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혼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 사람이 왜 행복한 겁니까?  그것은 이 사람에게는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이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라고 일컫는 곳입니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 도시로서 대단히 번성하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세관이 있고 가버나움 회당이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은 당시의 화려한 건물의 기초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회당의 웅장한 모습과 연자 맷돌, 그리고 베드로의 집터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게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이 이곳 가버나움에서 많이 이루어졌는데, 오늘 봉독한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도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곳,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 위해서 집 앞에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본문에서 마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그 집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 보면, 여기에는 내일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없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들고 아프게 되면 사람이 그리워진다고 합니다.  더 많은 외로움을 타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면 그것보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 없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중풍병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현재 이 사람의 처지는 아주 절망적인 사람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혼자서는 마음대로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중풍병을 앓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중풍병으로 사회에서의 직위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의 몸에는 기력도 다 빠져버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활동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병이 들어서 중풍으로 고생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몸의 힘도 다 빠지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없이 소망 없이 살아왔던 이 사람의 인생, 그것은 한 마디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람의 인생이 여기에서 끝이 났다고 한다면, 중풍병자로서 그의 인생을 마쳤다고 한다면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이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의 그 다음의 인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사람의 행적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끝이 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간증이 되지를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뭔가 달라진 인생이어야 합니다.  내 삶이 지금과는 다른 그 다음의 이야기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사건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환자는 한 사람인데 이에 관계된 사람은 다섯 사람입니다.  네 사람이 이 사람을 메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이 사람을 단순히 들것에 메어 가지고 오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던 이들 네 사람은 중풍병으로 몸져 고생하는 이 사람을 들것에 메어 가지고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서 이 사람의 병을 고침 받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습니다.  요즘 같으면 자동차가 있고, 교통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경제적인 활동을 중단해야만 합니다.  그런 수고와 희생을 감내하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에 보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보자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밀치고 들어가 보려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할 수 없다고, 돌아가자고, 그래서 포기를 했습니까?

도저히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었던 이들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팔레스타인의 집은 지붕이 평평하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건물밖에 있습니다.  지붕에는 서까래를 드문드문 놓고 그 위에 마른풀과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이겨 덮습니다.  이러한 지붕을 뜯어내려면 먼저 굳은 흙을 다 걷어내고 마른풀과 가지를 걷어낸 뒤에 서까래를 두어 개만 뜯어내면 그곳으로 들것을 내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환자를 들것에다 들고 와서 고침을 받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게 되니까 그들은 들것을 들고 그 집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들 네 사람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헌신입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 이들 네 사람의 헌신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새우리말 큰사전에 보니까, 헌신이란 "어떤 일에 자기의 이해 관계를 떠나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왔던 이들 네 사람에게서 자신의 이해 관계를 떠나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절대적인 헌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들 네 사람은 중풍병자인 이 사람과의 관계를 따지자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시간을 투자해야만 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낫게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중풍병자인 그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들은 고난 당하는 이 한 사람, 병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불쌍한 이 한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바쳤습니다.  이 일을 내 일처럼 여겼습니다.  이해 관계를 따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해서 이 한 사람을 고쳐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솔직히 저는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 속에서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대폰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사람이 필요로 할 때에는 정작 내 곁에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로 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겠다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지만 정작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람이 없어서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 주위에 사람은 많습니다.  평상시에는 휴대폰을 들어서 얼마든지 수다를 떨고 이야기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 헌신적인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손해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군가 때문에 내 삶이 방해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필요로 하는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는 이들 네 사람에게서 자기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행동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사람을 전도하고,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했을 때 이런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한 사람의 병자를 고치기 위하여 네 사람이 힘을 모았습니다.  네 사람….  예수님께서도 5절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환자 그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메고 온, 중풍병자를 침상 째로 둘러메고 온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환자는 한 사람인데 이에 관계된 사람은 환자까지 다섯 사람입니다.  이웃을 잘 둔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일입니다.  친구를 잘 둔다는 것이 이래서 좋은 겁니다.  중풍병자 이 사람, 그는 친구를 잘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려준 것도 친구요, 혼자 일어설 수도 없는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도 친구들입니다.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간 것도 친구들이었고, 지붕을 뚫고 그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준 것도 친구들이었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침상을 들고 두 발로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이웃은 축복입니다.

성경 잠언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면 지혜를 얻고 못된 친구를 사귀면 욕을 얻느니라."

확실히 그렇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좋은 친구들로 인하여 좋은 친구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그들을 통하여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나 또한 좋은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병석에 누워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에게는 참으로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좋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와서 말합니다.
"이보게,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셨대.  기적을 나타내셨대.  그러니 자네도 예수님만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야."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들의 권유를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직접 자기 눈으로 본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도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그는 인생 파탄 선고를 받은 몸입니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논리와 사실을 가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그럴 리가 없어.  병이 나을 리가 없다"고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권고하는 친구도 좋은 친구요, 권고를 받아들이는 친구도 좋은 친구입니다.  모름지기 좋은 친구란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좋은 친구에게는 좋은 친구가 연결되게 마련입니다.  저들이 둘러메고 예수님께로 가겠다고 하자 순순히 따라나서는 이 사람, 어쩌면 이 사람도 참으로 멋있는 사람입니다.

뉴욕에서 카운셀링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한 목사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의 99%는 그 문제의 뿌리에 외로움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종교 뉴스지의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자기는 외롭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알콜, 환각제, 과식, 정신질환들이 고독에서 오는 원인이 크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은 불면증, 현기증, 위장 장애, 두통, 심지어 감기까지 그 깊은 원인을 외로움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자살자는 해마다 50만명에 달하는데, 물론 자살의 근본 원인은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의 삶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고독입니다.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아니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친구의 우정을 선택한 요나단과 같은 사람도 그립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는 이런한 친구가 있습니까?  내 아픔을 부둥켜안고 울어 줄 이웃이 있습니까?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오늘 내가 먼저 이러한 사람이 되어 보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하는 양심 있는 신앙인이 되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들 주위에는 영혼의 중풍병에 걸려 시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 안에도 영적인 중풍병자들이 있습니다.  중풍병은 사지 육신의 힘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 중풍병은 사람의 말단신경까지 마비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결코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일으켜 주고 앉혀 주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교회 안에도 스스로 혼자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말단신경까지 마비되어 있어서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비난하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이들 영적 중풍병자들을 일으켜서 주님 앞에서 건강한 헌신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밖에도 영혼의 중풍병자들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주 앞에서 주님께로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들것을 가지고 찾아가셔야 합니다.  여기 이 침상은 보통 침상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희생과 믿음과 헌신의 손길로 지금도 외로움과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웃에게 다가가셔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시대를 뛰어넘어 인터넷 문화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풍요로운 물질문명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풍요로움 속에 빈곤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헌신과 사랑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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