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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의 회복과 열정 (행 5: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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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회복과 열정 (행 5:30-32)


지금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신문을 보니까 3100만 명이 고향을 찾는다고 합니다. 4-5시간이면 갈 거리를 10시간이 넘어 걸려도 그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떠나는 것을 보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이 대단합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갑니다. 미국 LA에 특이한 교회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교회”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줍니다.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귀성전쟁을 치루면서도 고향을 찾을까요? 고향에는 자기 존재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어졌던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만나 지난날의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고향이라고 말합니다.그러나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의 아픔은 처절합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새터민들이 있습니다. 그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임진각을 찾아 눈물을 흘립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것은 영혼의 고향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실향민보다 영적 실향민은 더욱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이란 병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 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설날 때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고생 고생하면서 막상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 만하지 않습니까? 누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람, 내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영혼의 고향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하는 본문에 보십시오. 30-32절을 같이 보십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지금 여기 이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누구이입니까? 29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외친 현장은 세상 법정의 현장입니다. 당시 이들은 서슬퍼런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 초라하게 끌려나와 혹독한 신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위축당함이나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이 증거하는 예수에 대해 거침없이 외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1세기의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악형을 받았습니다. 희롱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광야를 방황하며 유리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토굴 속에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기적이 없다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거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오히려 감수하며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들의 삶이 실패한 인생입니까? 깨져 버린 인생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신앙인들의 그 담대함은 바로 천국신앙에 있었습니다.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라는 것은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다면 오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 땅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은 멀쩡한 것 같아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고 주전자 속의 개구리처럼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채 세상이 던져 준 세상적인 물질과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나그네라는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더 움켜 쥐려하고 더 가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고 이 땅에 더 안주하려는 생각뿐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병이 나은 경험이 있거나,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대부분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선동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27-28절에 보면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여기 보면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세상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27절에 “저희를 끌어다가”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며 함부로 취급하는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이 세상 권력자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나요? 이들은 한 때 예수를 부인하고 자신들이 버렸던 옛 직업에 돌아 갈 만큼 철저히 실패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젠 조금도 비굴하거나 세상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속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가 우리의 참 생명이요,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 되신 주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알고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알았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가 되면 우리가 결심을 하지 않습니까? “올 해는 주님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충성해야지. 내가 좀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야지.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지”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결단은 모래위에 새긴 글씨와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이 점점 화석처럼 굳어지고, 길가 밭처럼 딱딱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지 못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성도, 성령의 불이 소멸된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죽은 물고기를 보세요. 아무리 커도 물결 따라 흘러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작아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삶은 죽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상황 따라, 환경 따라 흔들리는 갈대처럼 춤을 춥니다. 삶의 방향과 초점이 없습니다.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 골에는 ‘검용소’라는 이름의 작은 연못이 하나있습니다. 

이 연못이 바로 한강의 발원지입니다. 이곳에서 솟아난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을 거쳐 영월의 동강, 단양, 충주, 여주로 흘러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되어 한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들어갑니다. 한강의 발원지인 이 연못은 수천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일 년 사시사철 석회암반을 뚫고 하루 2-3천 톤 가량의 물을 토해냅니다. 

태백시 황지동에는 1300리 길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이 있습니다. 이 ‘황지연못’ 역시 늘 푸른 옥색을 띠고 있습니다. ‘검용소’나 ‘황지연못’이 늘 푸른 옥색을 띠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쉼 없이 늘 맑은 물을 토해내기 때문입니다. 고여 있는 물을 썩지만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검용소’나 ‘황지연못’이 늘 맑은 물을 토해내듯, 그리스도인은 늘 예수 생명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다는 증거며,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시던 교역자 분들 6분이 늦은 밤까지 다녀가셨습니다. 10여 년전 부터 우리 동성 교회를 함께 섬기던 분들인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마음에 아픔이 생겼습니다. 목회 현장이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 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내게 주신 이 귀중한 영혼 구원의 사역 결코 포기 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가슴에 타오르는 불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금 세상은 저들을 결박하였지만, 결국 저들의 불타는 열정을 묶지는 못했습니다. 41-42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이들은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 앞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는" 삶으로 한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사명을 다할 때 아름답습니다. ‘어머니’라고 한자, 어미 ‘母’자는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예전에는 여자를 부를 때, ‘누구 어머니’, ‘누구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로서의 사명을 가장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복이 투피스인데도 상의가 짧은 것은 빨리 젖을 꺼내, 쉽게 아이에게 먹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엄마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버스나 전차 안에서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여인들의 젖은 모두 짝젖입니다. 한 쪽을 많이 물리기 때문에 한쪽이 크고 한쪽은 작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있지만,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영광입니다. 어머니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기쁨이 있고, 용기가 생기고, 힘이 솟아납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이 피곤해하고 지쳐 있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 설 증후군이 있습니다. 서울 성모병원의 정신과 의사로 있는 채정호 교수는 3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여자들에게 많이 나타나 이혼까지 되었는데 요즘에는 남자에게 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의 명절이 가족 간에 잠재됐던 ‘관계’의 문제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의 작은 문제뿐 아니라 대가족이 짊어지고 있는 갈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특히 한국 중년 남성은 무의식 중에 아내·부모·형제·자식들 눈치를 많이 본다. 아내와 어머니가 다투기라도 하면 해결은 남자가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명절이 두려워진다. 

두 번째는 ‘비교’다. 가족·친척끼리 모이면 남자들은 비교를 많이 당한다. ‘돈을 많이 못 벌어서 어쩌니’ ‘네 동생은 잘나가는데 너는…’처럼 비교하는 말을 들으면 남자는 감정적으로 힘들어진다. 여자가 사랑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면 남자는 힘의 영향을 많이 받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무너지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셋째는 신체적 변화다. 한국 명절은 너무 짧다. 짧은 연휴 동안 장기간 운전을 하거나 성묘를 하는 일이 신체적으로는 무리다. 몸이 지치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약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은혜 앞에 서면 하나님이 새힘이 이러 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지상최대의 사명은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 사도들의 사명이요 초대교회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세워주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성교회의 궁극적 비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열방을 가슴에 품고 나가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비전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지 43년의 세월을 맞게 되었습니다. 허허벌판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는 이곳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 교회를 세운지 아십니까? 가난한 시절, 배곪기를 밥 먹듯한 그 시절에 1978년에 우리가 쓰고 있는 본당을 여인들은 돈이 없으니까 자신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아 헌금에 동참을 했고 지금 스타씨티에 있는 벽돌 공장에서 날품 팔아 벽돌을 사 모아서 이런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부요한 사람들이 아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록을 보았습니다. 결코 상식적으로 이 건물을 지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자신들을 희생해가며 이 예배당을 지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 너무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교회 건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성도들을 엄청나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물론 파지를 줍고 사는 궁핍한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 중직 가운데 많은 분들은 하나님의 주신 넘치는 은혜 속에 건강과 물질과 가정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산다면 모르겠지만, 이 땅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닙니다. 언젠가 다 두고 갈 여관과도 같은 곳이고 우리는 나그네들이입니다. 

오늘 묻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이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러면 나는 누구 때문에 라는 지질구질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이 철저하게 섬기신 모습을 갖고 사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주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삶이 내 삶의 일상화가 될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지가 있는 가입니다. 그리고 내 신앙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시원하게 해들릴 만한 열린 가슴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새해 동성가족들의 실천목표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이 신앙의 회복과 열정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 열매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고 또 주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최고의 섬김, 최고의 사랑은 바로 전도입니다. 이 실천목표를 적용하기 반드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다른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새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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