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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롬 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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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롬 12:9-16)


공동체가 서로를 깊이 공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과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과 열방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하는 사랑이요, 진실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온전히 받으십니다.

요즘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슈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입니다. 청소년들이 하루에 한 명꼴로 자살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더욱 심해지고, 가출청소년을 비롯한 비행문제와 동성연애자까지도 급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무엇이 청소년들을 이렇게 방황하도록 만들었을까요. 청소년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공감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회

요즘 소통이 부족하다고들 하는데 소통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제 생각에는 소통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감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을 구분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듣는 귀가 아니라 마음을 들어주는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문제도 상대방의 입장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많은 회의를 하고 조직을 만든다고 해도 공감하는 능력이 없는 지도자는 공동체를 깨뜨리고 분열시키기 마련입니다.

이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서로를 공감하는 것뿐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공감해야합니다. 지도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국민들은 지도자의 마음을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감을 의미하는 영어단어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sympathy’이고 또 다른 하나는 ‘empathy’입니다. 전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례식장을 나오면 잊어버립니다. 후자는 더욱 강력한 공감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장례 기간 내내 유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감정이 상대방에게 더 깊이 다가갑니다. 상대방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이 될 때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집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공감을 매우 잘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친구의 정의는 ‘나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1996년에 콜로라도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리더십들이 모여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바로 공동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영광이 자신들 모두의 영광이 되고, 한 사람의 슬픔은 자신들 모두의 슬픔과 고통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공감을 잘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올해 온누리교회의 표어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감 혹은 정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면서 과연 다른 지체들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합니다. 피부의 한 조각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그 고통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타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아픔도, 기쁨도 함께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나병에 걸린 환자와 같습니다.

몸이 썩어 들어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건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감능력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의 아픔과 기쁨을 공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울타리에 갇혀 우리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의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가쁨을 함께 느끼고 공감해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깊이 공감하는 사랑

성경학자들은 로마서 12장을 바울이 쓴 서신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지 못하고 산만하다고 지적합니다. 로마서는 굉장히 논리적인데 12장은 일정한 주제 없이 나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상이나 논리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공감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아름다운 경치가 주는 감격과 느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흔히 로마서는 교리적인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2장 이후부터는 삶 속에서의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가 교리적인 책이라면 로마서의 마지막 장은 멋진 교리적 결론으로 맺어야 하는데 로마서의 결론은 교리가 아닙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내는 문안으로 끝이 납니다. 얼마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구원으로 시작해서 성도들 간의 따뜻한 사랑으로 마쳤습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은 서로가 깊이 공감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아픔과 죄를 깊이 공감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4:15).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실 때마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기 위해 병을 고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베푼 기적의 동기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감정을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공감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갓난아이에게 일분에 한 번씩 무의식적으로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감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양육된 아이는 성인이 되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공감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부모로부터 공감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마음을 전혀 살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성에는 공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자신의 슬픔이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교회를 위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흘린 눈물이 바로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선교사님과 한국 교회, 북한 동포와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과 기쁨을 공감하십시오. 공감하는 능력이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거울 신경 세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세포는 쓰면 쓸수록 발달합니다. 그런데 쓰지 않으면 쇠퇴합니다. 인생의 경험이 많을수록 그 세포가 발달해야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세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공동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십시오”(9절). 
거짓 없는 사랑이 서로를 깊이 공감하는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된 관계와 공동체를 이루는 첫 번째 조건은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사랑에는 위선과 악함이 묻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위한 사랑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오염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두 종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진실이 없는 사랑 속에서 살고 있고, 다른 한쪽은 진실만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진실 없는 사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도 하나님이 보일만큼만 가까워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너무 멀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너무 가까워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는 진실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도 문제입니다. 이것은 폭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말은 모두 옳지만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언제나 상처를 주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으로 덮어져야 하고 사랑 안에는 언제나 진리가 있어야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위대한 사랑

여러분,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녀를 진리 가운데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진리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선한 것을 붙드는 사랑입니다. 선한 것을 붙드는 사랑과 거짓 없는 사랑은 풍성해 집니다. 
“여러분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14절).

사랑은 핍박을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향합니다. 진실된 사랑은 계속해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우리 안에 거짓 없는 사랑이 있으면 핍박하는 사람들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이 깊은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열심을 내 일하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를 섬기십시오. 소망 가운데 기뻐하고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항상 힘쓰십시오”(11~12절).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는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령으로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관계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기 혼자만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공로 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뜨거워져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영광만을 온전히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 혼자만 열심히 하면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과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뜨거워져 열심히 하면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공감하는 세포를 개발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항상 기도에 힘써야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로마서 12장 말씀은 산만한 것 같지만 일정한 주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논리를 흐리지 않았습니다. 기도에 힘쓰면 자기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면서 이상한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불에 타도 재가 되지 않는 떨기나무였습니다. 모세가 그 희한한 광경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희한한 광경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장차 하나님이 모세를 어떻게 사용하실 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40살 때 자신의 혈기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했을 때 그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모세의 혈기의 결론은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80세에 부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불이 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섬김이 소진되고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타오르게 되길 바랍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도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흐리지 않는 것은 시력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해 뜨거워진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만 사랑이 지속 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을 긋지 않는 공동체

또한 겸손이 서로 깊이 공감하는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며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마십시오”(16절).

이 말씀을 보면 로마 교회에 있었던 갈등이 나타납니다. 당시 로마는 신분 사회였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 교회에는 신분으로 인한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공감하는 공동체는 선을 긋지 않아야합니다. 누군가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 진정한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건강한 관계를 파괴합니다. 어떤 종류의 갈등이든지 간에 갈등 속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교만에는 5가지 증상이 있습니다. 첫째 교만은 인간적인 칭찬을 즐깁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못하면 불쾌한 마음이 드십니까. 교만한 것입니다. 둘째, 교만은 언제든지 스스로 점수를 매깁니다. 사람에게도 점수를 매기고 모든 일에도 점수를 매깁니다. 셋째, 메시야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입니다. 넷째, 이웃의 실패를 기뻐하고 성공을 슬퍼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이 아니라 혼자 즐거워하고 절대 웃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건전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세상의 아픔을 공감하는 공동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대인관계를 맺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요구하십니다. 온누리교회에도 상처 받기 싫어서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자가 더 위험합니다. 2012년의 중요한 목표를 하나 세운다면 그것은 모두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소속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공동체에 속하게 되길 바랍니다. 한 사람도 외롭게 신앙생활 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계획이단 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온누리교회가 더욱 세상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느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C.S.루이스의 저서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해서 여러분에게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사랑하여 보라. 그러면 틀림없이 마음을 졸이게 되고 어쩌면 마음이 찢어지게 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상하기 원치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한다. 취미와 작은 즐거움으로 마음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모든 복잡한 관계를 피하며 이기심이라는 상자 안에 안전하게 보관하라. 그러나 안전하지만 공기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그 상자 속에서 당신의 마음은 변해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찢어지지는 않겠지만 찢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되살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천국 외에 당신이 사랑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지옥뿐이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우리에게는 사랑의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자 안에 자신의 마음을 간직하고 보호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굳어진 마음이 될 것입니다.

올 한해 더욱 공동체에 마음을 열고 서로를 깊이 공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제목을 넓혀 가족과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과 세상, 열방을 향해 함께 공감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웃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슬퍼하고 아파하는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나만 편안하면 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모든 슬픔과 부르짖음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공감의 능력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성도의 아픔과 연약함이 나의 아픔과 슬픔이 되게 하옵시고 
청소년들의 방황이 나의 자녀의 방황이 되게 하옵소서 
그들의 아픔을 느끼게 하옵시고 
기도 제목 속에 다음 세대와 이 민족과 열방을 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한 해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열방을 품는 공동체로,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가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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