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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고후 11: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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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고후 11:22-33)


사도 바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단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에게 너무나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가짜들의 강압적인 권위와 엉터리 교훈에 맹종하며 속아 넘어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보고 사도 바울은 그야말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토록 안타까워하도록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던 거짓 선생들은, 앞의 본문 4절에서 밝히기를, 사도들이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며 성령이 아닌 '다른 영'들을 사람에게 주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명백한 이단이었습니다. 
  
본문 13절로부터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거짓 선생들이 실상은 그리스도의 일꾼인척 가장하는 '가짜 사도'들이며 '궤휼의 역군'이라고 정체를 밝히면서, 아예 "사단의 일군"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 거짓 선생들은 자기들이 유대교의 전통적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서 당시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억압하려 한 교권주의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이런 혈통 문제를 따진다면 그 거짓 교사들에게 미치지 못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2절에서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렇다. 저희가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랑하느냐? 나도 그런 거라면 뒤지지 않는다. 저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정통성을 내세우며 교만해 하느냐? 그따위 육신적인 핏줄을 따진다면 나도 조금도 꿀릴 일이 없다."라고, 혈통을 내세워 권위를 세우려는 거짓 선생들을 향하여 "나도 그러하다"고 간단히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23절에 이르러서는 "23a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갑작스러운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거짓 선생들이 자기들이 '히브리인'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바울에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 선생들이, 아니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단의 끄나풀에 불과한 그 가짜 사도들이 자칭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자처하고 더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사기꾼 같은 궤휼의 역군들을 '사도'와 '교사'로 떠받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파렴치한, 이런 몰상식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냐?' - 사도 바울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그야말로 미칠 것만 같았던 까닭에 그는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격앙된 어조로 선언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따위 이단 교사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내가 정말 미칠 지경이다. 이 어리석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아,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 평소에 그토록 온화하고 겸손하기로 잘 알려진 사도 바울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흥분하면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참된 일꾼과 가짜 일꾼을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이 결여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 앞에 무언가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짜들에게서는 결코 찾으려야 찾아 볼 수 없는 증거를 그 고린도교회 교인들 앞에 내어 놓고, 그들로 하여금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인지 아니면 그들이 따르고 있던 거짓 선생들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불릴 수 있는지를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23절 하반절로부터 33절에 이르기까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마땅히 겪게 되는 세 가지 체험들을 지극히 겸손하게, 그야말로 "부득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새해에도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세움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참된 주의 종으로서 마땅히 나타내야 할 세 가지 증거들이 무엇인지를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자기 몫의 십자가 고통'을 달게 지는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단지 그 주인 되신 예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했던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겪게 되었던 것은 갖가지 끔찍한 육체적 고통들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옥에 갇히는 일 정도는 비일비재했으며 온갖 '형벌'을 다 받아 보았는데, 바로 23절 하반절에서 25절 상반절까지 "23b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a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라고 상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란 유대인의 전통적인 태형이었습니다. 
기둥 같은 데다 죄인의 두 손을 묶어 놓고 가죽 채찍으로 뒤에서 스물여섯 번, 앞에서 열세 번 해서 도합 서른아홉 번을 때리는 중형이었는데 가끔 수형자들이 매에 못 이겨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명기 25장 3절에는 사십대까지만 때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실수하여 한대라도 초과하게 되면 모든 책임이 형리에게 돌려졌으므로 미리 주의하는 의미에서 "사십에 하나 감한" 즉 서른아홉 대로 정해진 태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태형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또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로마관원들에 의한 태형을 가리킵니다.
이 역시 매우 지독한 악형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로마 시민에게는 집행하지 않게 되어 있었지만, 흥분한 폭도들이 바울을 무고해 왔을 때 로마 관원들이 자초지종을 살펴보지도 않고 매로 때린 사실이 사도행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로 맞는" 끔찍한 형벌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번 당했었는데, 그때 거의 죽게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형벌들을 당하게 된 원인은 사도 바울이 출세가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던 유대 사회의 최고 엘리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육체적 고난은 또한 '여행의 위험' 때문이기도 했는데, 25절 하반절과 26절에 "25b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전 지중해 연안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강력한 통치 덕분에 모든 통행로가 그전보다는 많이 안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육로에는 여전히 곳곳에 노상강도가 득실거렸고 바닷길은 예고 없는 풍랑 때문에 언제 곧바로 죽음길이 될지 모르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간신히 통과하여 목적한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가는 곳마다 동족들로부터 혹은 이방인들로부터 폭행이나 고소를 당할 위험이 사도 바울에게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연적인 재해와 더불어 또한 그를 핍박하는 온갖 대적들의 위협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걸어 다녔던 모든 길들은 구석구석이 온통 위험으로 가득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체적 고통은 '형벌'이나 '여행의 위험'과 같이 외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사서 하는 고생이기도 했는데, 바로 27절 말씀에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수고하고 애쓰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잠 못 자고 굶고 제대로 입지 못해 추웠던 경험 정도는 그야말로 흔히 있는 일상의 다반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기가 피부로 겪었던 육체적 고통들을 고린도교회 교인들 앞에 나열하면서, 그들이 어리석게도 추종하고 있던 거짓 사도들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가짜들에게 그처럼 '그리스도를 인한 고난'의 체험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자기네들이 의의 일꾼인척 가장하기 위하여 그들이 내세웠던 것은 22절에 나타난 대로 그들의 타고난 육신적 혈통뿐이었지, 사도 바울이 겪었던 뼈를 깎는 듯한 육체적 고통들은 종교적 사기꾼에 불과했던 그들에게는 지극히 거리가 먼 이야기였던 것이었습니다.

일꾼치고 육체적으로 힘든 경험이 없었던 일꾼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게으른 일꾼이요 가짜 일꾼임에 일고의 여지도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주인을 섬겨야 하는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피곤해 본 적이 없는 주제에 스스로 자기를 가리켜 참된 일꾼이라고 자처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진짜 종이라면 그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반드시 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안정된 사회와 발달된 기술 덕분에, 사도 바울이 겪었던 부당한 사법적 체형이나 위험한 여행길의 위협으로 인한 고난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독재정권 치하에 있는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언제 투옥되고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를 이기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 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미개발지역의 밀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여전히 풍토병과 원주민으로부터 위협을 당하면서도 오직 그들의 주인 되신 예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나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이 실로 '작은 십자가' 하나 메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마다해서야 되겠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불릴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고 싶은 마음이 자신의 육신에 느껴지는 약간의 피곤 정도는 넉넉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무슨 '육체적 고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미미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작은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일 아침에 잠자리에서 좀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일찍 일어나서 주일학교 교사나 찬양대원 등으로 봉사하느라고 숨 돌릴 틈 없이 보낸 후에 또 주일 밤예배까지 참석하는, 실로 주일 하루를 온전히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적 피곤과 싸우는 성도가 계십니까?
온종일 자녀들을 돌보고 집 청소하고 저녁상을 차리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주부의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저녁에 교역자와 같이 장결자를 심방하거나 주변의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주보를 돌리는 구역장이나 심방장이 계십니까?
  
'생애 최고의 것'을 이미 바쳤고 또 '생애 전부의 것'까지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 내내 직장과 기업에서 '힘써 자기의 모든 일'을 하느라고 몸은 물 먹은 솜 같이 되었지만 금요일 밤마다 빠짐없이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계시는 장로, 집사, 권사님이 계십니까? 

바로 그런 성도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 된 걸음을 이미 걷기 시작한 자들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저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서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의 육체적 어려움을 이겨냄으로써 진정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 됨을 보여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교회를 염려하는 영적 고통'을 느끼는 성도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까닭에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고통을 고백하기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했습니다.

26절 이전까지의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겪었던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통들, 웬만한 사람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갖은 종류의 악형들과 위험들과 고난들을 길게 열거했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자기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순전히 예수님 때문에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이 했으며 밥 먹듯이 매를 맞았지 않았습니까?
잠 못자고 굶고 추웠던 날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며 거친 바다 위에서 '밤낮 꼬박 하루'를 표류하며 생사의 기로에 섰던 경험만도 세 번이나 있었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이보다 더 큰 고생을 해 보았다고 사도 바울 앞에 나서서 말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웬걸, 그 중에 단 한 가지만이라도 체험했더라면, 만일 저 같은 사람이 전도하다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단 한 번이라도 맞아 보았다면 저는 틀림없이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을 우쭐거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단 한 번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해도 우리들은 '출옥 성도'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으며, 사실 또한 그것은 존경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정말 자랑할 만한 온갖 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사도 바울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다"라고, 참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의 일"이란 사도 바울이 이상에서 언급했던 여러 가지 육체적 고난 '이외의 고난', 즉 그가 여기서 더 자세히 언급할 수 없었던 그 외의 모든 육체적 고난 전체를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는 이런 육체적 고난들은 "고사하고", 다시 말해서 그가 겪었던 모든 종류의 갖가지 어려웠던 육체적인 고통들은 다 '제쳐놓더라도', 오히려 날마다 그의 마음을 누르는 더 큰 아픔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는 끔찍한 육체적 고난의 체험을 지금 막 늘어놓고서도,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 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나를 괴롭혔던 고통이 늘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어떠한 고통이 매나 강도의 칼이나, 배가 등에 붙는 허기나 뼛속까지 시리는 추위보다도 더 아프게 더 고통스럽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날이면 날마다 압박하고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고통이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살을 찢는 채찍이나, 내 뼈를 부수는 돌멩이나, 망망대해에서 널빤지 한 장을 붙잡고 생사를 다투는 내게 달려드는 세찬 파도가 주었던 고통들도 결코 견디기 쉬운 고통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날이면 날마다 순간이면 순간마다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걱정함으로써 받았던 영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사도 바울은 오직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만이 겪을 수 있는 신비한 고통을 우리에게 간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한 교회를 고정적으로 담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장막을 만드는 부업으로써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해가면서 소아시아와 유럽 여러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설립하고 또 이미 설립된 교회들을 굳건히 하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전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가 한순간이라도 사역했던 그 "모든 교회"들이 자기가 떠난 후에도 계속 믿음에 굳게 서서 성장해 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외부의 핍박에 못 이겨 흩어지고 있는지, 혹은 이 고린도교회처럼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온갖 시험들로 인하여 흔들리고 있는지, 이런 걱정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를 향한 염려는 근본적으로 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각 사람의 영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약한 사람"이란 '육체적으로 건강이 약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문맥으로 볼 때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는 어느 한 성도가 복음에 든든히 서지 못하고 그의 믿음이나 행위에서 약한 꼴을 보일 때면 자기 자신의 마음도 약해지고 아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은 어떤 교인이 아주 실족하여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는 마치 자기 자식을 잃는 듯한 고통으로 애태웠던 것이었습니다.
  
교역자가 자기 교회나 교구의 성도들의 영혼과 신앙생활을 염려하며 당하는 영적 고통이란 정말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직접 맡은 교회는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흡사 담임목사처럼 '모든 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 영혼'들을 위한 염려 때문에 매일 매순간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일 같지만 이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바로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염려와 그 교회 내의 각 영혼들을 위하여 애태우는 걱정 때문에 영적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자기 자신부터가 바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이며 교회는 그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본체인 까닭에, 그 고통이 한 몸 안에서 서로 전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와 그 지체된 각 영혼들을 위한 염려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이었습니다.
정말 거짓 그리스도의 일꾼들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말해 주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실로 불가해하면서도 신비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고통이 느껴져야만 저와 여러분도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경상비가 하나님 앞에서 정해 놓은 한 해의 예산을 달성하지 못할 때에 그것 때문에 내 집의 가계부가 적자가 날 때처럼 염려가 되십니까?
매주일 오후에 모이는 '청지기 기도회'를 통하여 함께 서원하고 기도하고 있는 목표가 주중에도 늘 생각나면서 자신의 심령에 영적인 짐이 되고 있습니까? 
바로 그런 염려를 함께 할 줄 아는 성도가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인 것입니다.

그런 영적 고통은 교회의 지체된 각 영혼들을 생각할 때 역시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일예배 때마다 진정 진실한 신앙고백으로부터 공명되어 나오는 찬양을 드리고 있는지를 걱정하면서 찬양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지휘자나 찬양대장이 계십니까? 
주일학교에서 자기가 맡은 반의 학생들이 정말 확실한 구원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염려가 되어서 새벽마다 그 이름들을 하나 하나 빠짐없이 부르면서 그들의 부모보다도 더 간절히 그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애태우며 기도드리는 주일학교 교사가 계십니까?
  
자기가 맡은 교구 안에서 가장 시험을 잘 일으키는 교인을 두고서도 욕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약한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은 속에 감추면서 한 번이라도 더 자주 심방하여 어찌하든지 그를 회복시키려고 노심초사하는 교역자가 계십니까? 
아니 다른 성도로부터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찾아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며 그들의 어려움을 같이 나눌 줄 아는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숨은 성도가 계십니까? 누가 뭐래도 바로 그런 성도들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약한 교우에 대한 염려는 절대로 목사나 전도사만 해야 할 염려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걱정은 장로나 집사나 권사 같은 직분자들만 해야 하는 걱정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 된 성도라면 한 몸 안에서 절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 이 차원 높은 고통, '교회와 그 속한 성도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이 영적 고통을 함께 느끼고 나눔으로써 진정 '머리 되신 주님을 같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임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두 가지 고통,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기꺼이 당했던 '육체적 고통'과 날마다 느낄 수밖에 없었던 '영적 고통'이 있었던 까닭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체험적인 증거 때문에 그는 그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나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오늘날도 난무하고 있는 이 '거짓 그리스도의 일군'들 앞에서 그 같은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 된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은 나의 육신적 배경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모태신앙이라는 사실, 내가 교회생활을 몇 십 년 했다는 경력, 우리 경향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의 교단이라는 배경 -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결코 우리 각자가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증거를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가장 기본적으로 우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종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필연적으로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늘 마음고생을 할 줄 아는' 성도인 것입니다.
약간의 피곤이나 육체적 고통은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지고 가셨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이겨내고, 교회의 어려운 일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약한 교우들을 염려하며 피차 섬김으로써 진정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나도 그러하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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