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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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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롬 1:16-17)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100 사람에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를 묻는다면 그럭저럭, 마지못해, 죽지 못해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태반일 겁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잘 살기를 원하면서도, 그리고 잘 살기 위하여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도 잘 사는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잘 사는 것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친구 집을 다녀왔습니다. 그러더니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친구 집에 갔다왔는데 되게 잘 살아요’ 자가용이 두 대나 되고 (당시는 자가용 한 대만 있어도 부자였던 때였습니다.) 집에 풀장이 있는 집을 다녀와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아이가 ‘잘 산다’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가용이 두 대나 있는 집을 보고 와서 우리 아이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어야 옳았습니다. ‘되게 부자에요’ 우리 아이는 부자로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삽니다. 가난을 못 사는 것으로 부요함을 잘 사는 것으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못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부자는 행복해야 할 것이 아니냐 물으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부자는 없습니다. 다 가난뱅이들입니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절대적 빈곤층이고 절대적 빈곤층을 제외한 대부분 아니 모두는 다 상대적 빈곤층입니다.

아무리 부요해도 자기보다 부요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빈곤을 느끼고 그 때문에 힘들어하고 불행해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부요한 사람을 따라잡기 위하여, 다시 말해 그 상대적 빈곤으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죽기 살기로 더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부자가 되려고 노력만 할 뿐 자신의 부를 누릴 줄도 즐길 줄도 잘 모르고 그냥 돈만 벌다 죽습니다. 그 때문에 절대적 빈곤층이 더 생겨납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저는 동물들을 좋아하여 동물의 왕국같은 프로를 잘 봅니다. 그런데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제일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사냥하여 잡아 먹는 장면을 보는 것입니다. 약한 동물이 강한 동물에게 잡혀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게 싫어서 그 때는 잠시 딴데를 보곤 합니다.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의 능력 차이는 아이들 말로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한 동물이 멸절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동물에게는 상대적 빈곤감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동물들에게 우리 인간에게처럼 상대적 빈곤감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동물의 세계도 우리 인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엉망이 되었을 겁니다. 사자와 같은 동물이 약한 동물을 사냥하는 이유는 심플합니다. 배가 고파서 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입니다. 사냥하여 배부른 사자는 다시 배가 고플 때까지 사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약한 동물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자가 우리처럼 상대적 빈곤감을 느낀다면, 그 상대적 빈곤감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자와 경쟁적으로 약한 동물을 사냥한다면 약한 동물은 멸절하였을 겁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고 부자도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한 사실 모든 사람은 다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떻게하면 세상과 사람들을 이 절대적 빈곤과 어리석은 상대적 빈곤으로부터 구원을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잘못된 구조를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상대적인 빈곤이든 절대적 빈곤이든 그런 불평등과 차별이 생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신뢰하고 무한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면 그것의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과 시장을 바로 잡아갈 것이라고 보는 낙관적이고도 보수적인 자본주의가 요즘 바로 그런 심각한 구조를 양산하고 있는 범인 중에 하나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진보 측에서만 그런 주장을 하였었는데 요즘은 보수자본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다보스 포럼에서 조차 스스로 회개하며 반성하는 입장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낭만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면 결국 또 똑같은 결과에 봉착하게 되고 말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회주의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의 문제에 관한한 자본주의보다 탁월해 보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의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보편적 빈곤으로 상대적으로 상대적인 빈곤의 문제가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사회주의를 바로 하지 못했서 그렇다고 말을 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빈곤의 문제와 차별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구조 때문에 생기지만 결과적으로 결국 그 구조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다 나은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연구와 시도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려고 할 때 사람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시궁창에 빠진 아이를 씻지 않고 그냥 옷만 바꿔 입히는 꼴이 되어 어떤 옷을 입혀도 다시 냄새나고 더러워 질 겁니다.

성경은 모든 사망과 실패의 원인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모든 문제는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불신에 있습니다. 결국 믿음 없음이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또 성경은 모든 사망과 실패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아무리 고민을 해도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부자가 진짜로 예수를 믿으면, 아니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부자만이라도 진짜로 예수를 믿는다면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의의 병기처럼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부자들도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많지 않지만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부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부요함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로 생각하고 그 부요함을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낌없이 쓰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희망이 부자의 거듭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자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저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리고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성령으로 거듭나 세상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의의 병기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말입니다.

저는 부함과 강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늘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소위 청부론과 고지론입니다. 제가 부함과 강함 혹은 높음을 부인하지 않는 까닭은 저들도 거듭날 수 있고, 저들이 거듭나면 그 부함과 강함과 높음이 그 전 까지는 세상을 어렵게 하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데 사용되었을찌라도 이제부터는 반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세상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부자와 강한 자들이 그냥 건성으로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성령 받았다고 말만하지 말고 그 삶이 정말 거듭난 사람의 삶이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구조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믿음이 생긴다면, 진짜 믿음이 생긴다면 세상과 구조가 다 바뀌기 전에 그보다 훨씬 먼저 당당해 지고, 자유로워지고, 훌륭해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진짜 믿음이 생기면 죄로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죄의 뿌리가 되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상대적 빈곤감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상대적 빈곤감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상대적 빈곤감으로부터 해방되게 되면 자족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자족할 수 있는 정말 기막힌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진짜 믿음을 갖기 전에는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어떤 구조와 시스템으로도, 어떤 정치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탈북자들에게 교회 재산을 다 팔아 자립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워주고 또 자립에 성공한다고 하여도, 말라위 그물리라를 자립마을로 성공적으로 만든다고 하여도 결국 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저들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후 더 심각한 상대적 빈곤에 빠지거나 상대적 빈곤을 유발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망가트릴 것이고 그 곳에서 함께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들의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우리의 예배당을 내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공장과 카페에서 일하는 탈북자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 믿기를 정말로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하지 않고 마음과 삶으로 저들에게 복음과 믿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블리스 앤 블래스 카페의 점장이 탈북청년입니다. 늘 마음에 두고 예수 믿기를 기대하고 교회에 나가기를 기대했지만 좀처럼 그러질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작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높은 뜻 푸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 페이스 북에 그 아이가 짧은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자기는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성격인데 탈북한 이후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것을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버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가 바로 하나님이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2011년도에 제일 잘한 일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너무 기뻤습니다. 정말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사랑의 교회에서 몇 년째 주중에 모여 통일을 위하여 철야기도를 하고 있는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사랑의 교회 본당이 꽉 찼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는데 청중 석에 눈에 익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공장의 직원이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철야기도를 나올만큼 그것도 통일을 위한 철야기도회에 나올만큼 믿음이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엉뚱한 사회사업을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을 갈아야 하는 것이라고. 탈북자 사역이든 말라위 사역이든 그것을 결국 믿음과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한 밭 갈음입니다.

<오직 믿음 !>이라는 단순한 성경 말씀 앞에 두 손 들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진짜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를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어리석고 추한 부함이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모나고 삐둘어진 가난이 거듭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일에 생명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짜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나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자신도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병들고 상처투성인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나가는데 의의 병기처럼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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