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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막 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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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막 1:12-20)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내용이 간결하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어떤 시험을 받았고, 또 어떻게 시험을 이겼는지 설명하지만,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만 기록할 뿐, 다른 복음서에 있는 내용들을, 생략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해 기록되었고, 로마인들은 박진감 있는 행동을 중시했기에, 보다 간결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를 했다. 그러면 마가복음은 왜 본문과 같이, 세 가지 서로 다른 내용들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는가? 이는 왕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보여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 침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이루셨다. 사람과 연합하셨다. 그 직후에 하나님은 친히 예수님을, 만백성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왔다(10).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으로, 기름부음이 되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하며, 왕으로 공포하셨다. 본문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여준다. 왕의 권세를 가지고, 실제로 행하는 장면이다. 왕이신 예수님은 세 가지 영역에서 행하셨는데, 자신의 권세를 보이셨다. 

(1) 사탄에 대한 권세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사탄에 대한 권세가 있음을 보이셨다. (2) 죄에 대한 권세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죄에 대한 권세가 있음을 보이셨다. (3) 죄인에 대한 권세다. 죄인을 불러 제자를 삼으심으로, 죄인들에 대한 권세가 있으심을 보이셨다. 

1.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세상의 왕들은 세움을 받으면, 곧이어 성대한 축하예식이 거행되지만, 예수님이 왕으로 세움 받으실 때에는, 나팔소리도 없었고, 천사들의 노랫소리도 없었다. 

이는 예수님이 섬김 받으러 오신,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섬기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이 세상 왕들이 하는 축하행사도 없이, 성령님은 곧바로, 광야로 몰아내셨다.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 목적은 마귀에게 시험받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안에서 시험하였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 광야로 떠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성령님은 광야로, 예수님을 몰아내셨나? 

예루살렘에서는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꼭대기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하였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이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사탄을 이기는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겨야 했다. 

(벧후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 우리 인간들은 마귀의 시험에 빠져, 마귀에게 진 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긴 자가 되어, 마귀는 예수님에게 패하고 말았다.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는 예수님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이, 홀로 시험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결과는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수종들더라’는 수행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왕이지만, 섬김 받으려고, 세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왕으로 세움을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광야로 가서, 고난 가운데 시험을 받으셨다.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다. (마4:2)을 보면, 예수님은 그 기간 동안 금식하셨다. 물론 40일의 금식이,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 행해진 것은 아니다. 모세도(출34:28), 엘리야도(왕상19:8), 사십 일을 금식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금식하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가장 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셨다. 그러나 왕이기에, 이렇게 힘든 상태에서도, 사탄의 시험을 이기셔야만 했다. 그러면 사탄은 예수님을 어떻게 시험했나? 사탄은 세 가지로 시험했다. 
그런데 세 가지 모두, 사탄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낮추는 시험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사탄은 예수님이 낮아지지 못하도록, 높이는 시험을 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로, 만백성의 왕이지 않느냐? 그러니 굶어서는 안 되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너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너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어라. 너는 왕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하니, 내게 엎드려 경배해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 이처럼 사탄은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왕의 권세를 행사하도록 유도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궁극적 목적은, 앞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사탄의 시험에 대해 예수님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인용하셨다. 예수님은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해, 사탄의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셨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들이라는 뜻이다. 계명을 자세히 설명하며, 순종하라는 책이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의 상황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들짐승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 산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되어, 홀로 시험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신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광야는 불뱀이 있고, 전갈이 있는 곳이다. 이리와 표범이 있고, 사자와 곰이 사는 곳이다(사11:6-7). 

예수님은 이처럼 위험하고 외로운 광야에서, 사탄에게 사십 일 동안 시험 받았다. 시험 받으셨을 때의 상황은, 첫 사람 아담이 시험 받았을 때와는 너무 달랐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그들은 에덴동산에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빠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하고,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 계셨다. 사십 일을 주리셨기에,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상태에 있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시험을 이겼다. 환경이 좋다고,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붙들고, 순종할 때 이기게 된다.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자,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 수종들게 했다.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을 기뻐했다는 뜻이다. (마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난 뒤에,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수종들게 했다. 아마도 천사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전하면서, 그 동안 주린 예수님이 드실, 양식도 제공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탄이 제안한 유혹의 떡을 물리치고, 천사들이 전하는, 신령한 양식을 드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이 제안한, 그릇된 공명심 대신, 천사들의 보필을 받았다. 예수님은 사탄이 제공하는 헛된 영광 대신에, 천사들의 경배를 받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인 사탄을 이기셨다. 그리함으로 왕이신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권세가 있음을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자기 백성들을, 사탄에게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탄의 시험을 이겨야한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얼마든지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며, 물리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2.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셨다(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요한은, 침례요한을 말한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침례를 베풀고 난 후에도, 한 동안 계속 사역했다. 그러다가 헤롯왕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결국 헤롯왕에 의하여, 목 베임을 당했다. 그 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침례요한은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왕의 사자였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태양이 떠오르면, 밤하늘의 별들은,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왕의 사자로서 해야 할 사역을 완수했다. 
요한의 죽음으로, 그의 사역은 끝났다. 그는 쇠하여졌다. 이제 예수님이 흥해져야 했다.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자기 뒤에 오실 것임을 밝혔다(7). 그의 말대로,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오신 장소가 “갈릴리”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나 유대에 머물지 않고, 갈릴리에 오셨는가? 

헤롯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다. (마4:14-16)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부패하고 타락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에 의한 복음의 빛은, 먼저 이방의 갈릴리에 비치도록 되었기에,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셨다.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이는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복음만을, 그대로 전했다.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인지 분석해서, 가려운 귀를 긁어주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만을, 순수하게 전파하셨다. 예수님이 전파한 내용은 무엇인가? (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전파한 말씀은 두 가지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 먼저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드디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다. 

왕이 임하면, 왕이 다스리는 나라도 임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당연히 하나님 나라도 가까이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만 한다.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곧 죄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란 ‘돌이킴, 방향전환’을 말한다. 범죄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벗어남을 말한다. 누구도 죄에 대한 자각과, 죄로부터의 돌이킴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마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또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베드로는 말했다. 

다른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행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신앙의 입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 곧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 대한 권세가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 (막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하셨다. 

지은 죄로 고통을 당하는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바란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지은 죄를 가지고 괴로워하지 말고, 죄 사함 받아, 자유 함을 누리기 바란다. 예수님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복음만을 전파하셨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하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말씀을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다 죽는다. 강단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전하게 전해져야 한다. 그것이 모두 사는 길이다. 

3.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다(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요1장)을 보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 했을 때, 침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침례요한의 말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다. 그로부터 여러 달이 지났다. 그들은 어부였기에,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던 예수님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를 따라오라.’명령하셨다. 
이는 왕이신 예수님만이 내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독특한 명령이다. 과거 그 어떠한 선지자들도, 그 어떠한 랍비들도,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을 따르라’ 또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은,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내리실 수 있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말씀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되, 지금까지 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르셨다.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에,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어리석게 보이는가? 그러면 이들이 멍청하고 얼빠진 사람들이었나? 아니다. (눅5:3) 말씀처럼, 그들은 자기 배를 가지고 있을 만큼, 당당한 어부였다. 

(눅5:10) 말씀처럼, 세배대의 두 아들과 동업할 만큼,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나? 예수님의 권세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대한 권세가 있기에, 죄인들을 불러서 그들을 변화시키며, 그의 나라를 위해, 귀한 일꾼으로 쓰신다. 이 사실은 곧바로, 세배대의 두 아들을 부르신 장면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19-20)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었다(막3:17). 한 마디로 성깔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아무에게나, 호락호락 쉽게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 때 그들의 아버지 세배대는, 몹시 황당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감히, 왕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권세 앞에 모든 사람은, 그대로 순복할 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누구나 다 순종할 따름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권세가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그들을 사용하여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신다. 하늘의 천사들이 아니라, 변화 받은 죄인들을 통해, 계속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되, 혼자 감당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적절한 사람들을 택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겼다.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진리를 전했다. 

디모데는 자기가 들은 진리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했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들은 진리를 그대로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 든든하게 세워져 나갈 것이다. 요점은 혼자서만 일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동역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팀워크의 중요성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신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의 삶과 사역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 내가, 주님을 잘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내가 과연 사람을 낚아 왔는지 돌아보라. 또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을 했는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섬긴다면,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은, 사탄에게 승리하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실 사람을 만드는 일이었다. 바로 우리가 할 일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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