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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 (막 2: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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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 (막 2:23-28)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으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학문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좋아합니다. 혁명가 예수, 사랑의 실천가 예수, 율법 교사 예수, 묵시적 환상가 예수 등이 그렇습니다. 여러 정의가 있지만 최근에 각광받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의는 ‘전복(顚覆)적인 지혜 교사’로서의 모습입니다. 전복적인 지혜라는 것은 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관념, 세계관 등을 깨고 뒤집어엎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등장함으로써 가장 곤란해지고 흔들렸던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여지없이 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당시 사회에서는 의인과 죄인에 대한 기준이 있고 죄인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하며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렸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위선자요 그 속에 교만이 가득하다고 비판했으며 오히려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가 진실되며 하나님께 열납된다고 하였습니다.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마음속에 가득한 탐심과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진정한 정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생각이나 선입관을 흔드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오랜 세월 살다보면 자신의 원칙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나 기준이 생깁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인지라 생각이 질서가 잡혀야 그 존재가 평안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틀이 오래되고 너무 단단해지면 마치 길가 밭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너무 단단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다른 진실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마음 밭을 부지런히 일구어야 합니다. 옥토처럼 부드러워야 하나님 말씀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반석을 쳐서 부수는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또한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틀을 여지없이 깨뜨립니다. 그것은 안식일과 관련된 교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할례, 정결법, 안식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 지켰다.” 실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주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일하고 바쁘게 사는 날에 유대인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배드리며 경건하게 그 날을 지켰습니다. 예전에 신앙인들을 구분하던 표지중 하나가 “주일은 쉽니다”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전이 무너지고 공간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자기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임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소중히 지키기 위해서 여러 조항들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무려 39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35:3)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현대의 경건한 유태인들은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나 집안의 등불조차 키지 않습니다. 대신 자동으로 전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하거나 가정부를 통해서 대신 불을 키게 만든다고 합니다. 

자동차도 운전하지 않습니다. 시동을 거는 것은 엔진에 불을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군사들이 칼을 드는 것은 일이라 하여 전쟁조차 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전쟁에 큰 피해를 입었고 나중에 공격 받을 때는 방어할 수 있도록 그 조항을 고쳤을 정도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실로 대단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엄격한 안식일 규정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 계명 중 네 가지를 범한 셈이 됩니다. 23절에 보면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마태복음에서는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마12:1)라 전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눅6:1)라 하였습니다. 밀 이삭을 땄으므로 추수하는 행위를 범했고, 밀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탈곡하는 행위를 범했고, 손으로 비빈 후 쭉정이를 입으로 훅 불었을 것이므로 키질하는 행위를 했으며, 마지막으로 그것을 먹었으니 음식을 만든 행위를 범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하고 항의합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안식일 계명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범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죽음에 해당하는 범죄였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안식일과 관련한 율법을 해석하는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첫째, 율법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율법을 범한 제자들을 변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든 사례는 다윗의 경우였습니다. 2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달아나다 놉에 있는 성막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아비아달 대제사장의 아버지인 아히멜렉이었습니다. 

다윗과 일행들이 배가 고파서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때 아히멜렉이 하나님의 전에 진설되어 있는 빵을 내어놓았습니다. 이 빵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올려놓은 열두 덩이의 빵으로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24장 8, 9절입니다.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 거룩한 떡을 먹었으므로 다윗과 그 일행은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라 하여 그것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들고 있습니다. 제의적인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고 이 때문에 작은 율법은 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굶어죽을지언정 진설병에는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단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는 우리 실생활 중에 실제 많이 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선의의 거짓말이란 것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큰 위협이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살인자가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온 도망자를 찾는 경우 정직하게 그 사람이 자기 집에 있다고 밝혀야 됩니까? 아니면 거짓말로 둘러대야 합니까? 

철학자 칸트는 이럴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칸트는 정언 명령이라고 하여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순간에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 앞에서도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거짓을 말하기 싫다면 회피할 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칸트는 회피의 방법을 취했습니다. 칸트가 쓴 책들이 당시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비방이라 생각하고 다시는 그 주제에 대해서 다루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칸트는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합니다.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 종교에 관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이 서약 이후 얼마 못가서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종교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에 대해서 칸트는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라는 전제가 무효가 되었으니 이 서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꼼수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꼼수를 부리는 것이 오히려 노골적으로 거짓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버젓이 거짓말을 했던 신부가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구원했던 신부입니다. 장발장은 성당에서 신부의 친절로 하룻밤을 묵었지만 성당의 은수저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붙잡혀 그 신부 앞으로 끌려옵니다. 경찰이 훔친 물건이 맞느냐고 묻자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장발장, 내가 어제 자네에게 은촛대도 가져가라고 했는데 왜 은수저만 가져가고 촛대는 안 가져갔나?” 그렇게 해서 장발장은 풀려났고 왜 자기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냐는 질문에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사네.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사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드리네. 그러니 이제 그 절망과 증오에서 자유하게.”

이 신부님의 행동을 옳은 것입니까? 거짓말이라는 작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잘못된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옳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물론 둘 다 모두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또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작은 것 때문에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과 관계된 작은 계명들보다는 사람의 삶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안식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꼼수다”가 인기입니다. 팟 캐스트라 하여 사람들이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에서 자발적으로 다운을 받아 보는 시사 프로그램입니다. 전세계의 유수한 언론들을 제치고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는 꼼수다’에 대해서 교회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습니다. 이 분은 “나는 꼼수다”의 모든 내용들은 좋고 인정하지만 그들이 하는 욕이나 비아냥대는 태도가 싫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실제 욕도 많고 현 정부를 조롱하는 것들이 많아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 좋아하기도 합니다. 예의를 갖추어 비판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좋은 하나의 의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뜩이나 요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심한데 목사님이 이런 식의 글을 올리니 역시 기독교는 어쩔 수 없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논쟁을 보면서 이런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욕설이나 조롱 이면에 담긴 현 정부에 대한 분노,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갈망을 읽을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 분노에 비하면 욕설은 지극히 사소합니다. 오죽했으면 『정의란 무엇인가?』란 되게 어려운 책이 작년 한 해에 백만 부 판매를 돌파할 정도로 정의에 대한 갈증이 심했겠습니까? 둘 다를 지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작은 것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잠잠히 있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입니다.

둘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일은 복된 날이고 기쁜 날입니다. 하나님이 쉬셨던 것처럼 편안하게 쉬는 날입니다. 

이 날은 그 종이나 짐승도 쉬어야 하는 날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지쳤던 이들에게 안식일은 정말 즐거운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된 날이 되었습니다. 39가지 계명으로 옥죄는 불편한 날이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걸어가면 될 것을 대략 1km 이상을 걷는 것은 일이라 하여 더 이상 걷지를 못합니다. 피치 못해 걸어야 할 경우는 1km 쯤 걷고 앉아서 쉽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서부터 1km를 걷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금지됩니다. 그것은 의사가 행하는 노동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위급할 경우도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예외 조항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생명이 위험할 때는 병 고침이 허락이 됩니다. 코와 목이 아플 때도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정도만 해야 하지 더 낫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에 붕대는 감을 수는 있지만 치료제로 쓰이는 기름을 발라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솜은 아픈 귀에 꽂을 수 있지만 약을 바른 솜은 안 됩니다. 이러니 안식일이 복된 날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 짓기 쉬운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을 범한 것은 우발적인 그런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안식을 범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거나 그것을 먹었던 행동은 그들의 부주의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주님이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칩니다. 손 마른 사람은 급한 병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침으로써 안식일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게 해주십니다. 안식일은 복되고 즐거운 날인데 하루라도 손 마른 사람의 고통을 연장시켜야 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는 제도와 사람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제도나 법은 실상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반대로 인간이 제도와 법의 수단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법과 제도를 왜 만들었는지 물어야 됩니다. 

셋째,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 인자는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이제는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주님이 부활했던 주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단은 여전히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날을 안식일로 지키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논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롬14:5-6) 이제는 모든 날이 다 주님의 날입니다. 어떤 날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날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안식은 주님이 주인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고 예배라는 형식이나 제도나 교제나 우리 욕심이나 생각이 주인이 될 때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진정 주인으로 임하실 때 우리에게는 온전한 안식이 주어집니다. 파스칼은 인간 안에는 빈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곳을 무언가로 채워야 만족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곳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이 무한한 심연의 바다는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찬송가 495장은 모두가 좋아하는 찬양인데 가사 중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 안에 모신 사람에게 임한 평화와 안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도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사도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에 걸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참된 안식이 주어지지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모시는 안식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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