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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향, 어딥니까? (느 3: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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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어딥니까? (느 3:1-6,32)


(1절)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절)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절) 어문은 하스니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절)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절)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6절)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32절)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민족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가족들이 모처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 참 보기 좋은 풍경입니다. 사실 고향, 어머니란 단어만큼 따뜻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단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향이 어디든, 어떤 곳이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습 3:17). 

지금까지 우리 역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經濟力), 권력(位置), 학력(實力), 군중(數, 人脈), 건강(美, 長壽) 등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정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혜자는 지혜를. 용사는 용맹을, 부자는 부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렘 9:23). 쉬 쇠하여집니다. 점점 사라집니다. 바꿔 타십시오. 독수리이신 하나님의 등에 얹히십시오(출 19:4).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그게 힘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확인했습니다. 말씀순종, 성전사모, 기도, 회개, 약한 자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은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처한 삶의 현장, 그가 매일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결국 얼마나 영적으로 민감한가의 문제입니다. 

영적 민감한 자가 되기 원합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분의 눈물이 고인 곳에, 그분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도 함께하면 영적으로 민감해집니다. 말씀, 성전, 기도, 회개, 약한 자, 이 다섯 가지에 온전히 집중해 보십시오. 자세히 보면, 두 부류로 나뉩니다. 말씀, 기도, 회개는 지금 여기서, 나 혼자서도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전사모, 약한 자와 함께하는 것은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즉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나아가 그곳에 있는 약한 자들과 함께 하길 원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그래서 수산궁을 떠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약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느헤미야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산궁은 곧 느헤미야의 고향입니다. 이곳을 떠났다는 것은 곧 고향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고향을 떠나라는 음성을 몇 번이나 들었건만 얼마나 주저하고, 방황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년 살았던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얼마나 더디었으면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나 걸렸을까요? 얼마나 사연이 많았기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빼꼭히 기록했을까요? 고향을 떠나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어떠했습니까?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느 2:11). 그 긴 여정을 간단하게 한 절로 처리해 버립니다.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삼상 6:12). 다시 페르시아의 수산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페르시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곳 낯설고 물선 예루살렘을 나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그곳에 온 정성을 다하며, 혼신의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의 어느 부분에 제일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느헤미야 3장을 읽어나가다 보면 여러 문들이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살피면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모두 열두 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열두 문들은 한결같이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 10:9).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문들 중에서 제일 먼저 손댄 것이 양문이었습니다(느 3:1). 그리고 마무리도 양문으로 끝냅니다(느 3:32). 이 양문을 제일 먼저 수축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장 우선시했다는 뜻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와 바알선지자들이 겨루었던 그 유명한 갈멜산 대결현장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제일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였습니다(왕상 18:30). 그러자 그 현장에 하늘에서 불이 내렸고, 제물을 태웠습니다(왕상 18:38). 갈멜산 현장에 여호와 하나님이 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엘리야와 백성들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 힘이니라’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말씀, 성전, 기도, 회개, 약한 자, 이 다섯 가지에 심혈을 기울이십시오. 성전사모는 고향을 떠날 때 가능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합니다(창 12:2).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분명 힘이 되실 것입니다. 

지난 주 교역자 수련회를 통영에서 가졌는데, 잠시 짬을 내어 인근에 있는 ‘외도(外島)’라는 섬으로 갔습니다. 1969년 이창호라는 분이 바다낚시 중 이 섬으로 풍랑을 피하면서 인연을 맺어 ‘내 고향이 평남순천인데, 이곳을 나의 제2고향으로 생각하고, 한번 정성을 쏟아보자’는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척박한 섬이 지금은 지중해의 해변을 옮겨놓은 듯한 작은 천국과 같은 아름다운 섬으로 변했습니다. 

제일 인상 깊었던 장소는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운 가슴시린 비문(碑文)이었습니다. 저들은 평남순천-서울-외도-그리고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향을 어디로 생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저의 생가(生家)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 부모님의 산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련한 추억들을 뒤로하고 수련회를 끝낸 후, 목요일 저녁 교회로 돌아와 금요일 아침 교회에 출근하기에 앞서 일산동구청으로 갔습니다. 저의 본적지, ‘경남 거제시 삼거동 590번지’를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722번지’로 바꾸어 신고했습니다. 고향을 바꾸었습니다. 사실 여기 이 땅에는 제 눈물과 땀과 젊음, 물질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이곳을 본적지로 바꾸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어디를 진정한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온바 고향, 즉 내 육신의 고향을 떠나 ‘더 나은 본향’, 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히 11:15-16). 그 천국의 그림자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즉 오늘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일에 한 마음이 됩시다. 손에 손을 잡고, 온 정성을 쏟아봅시다.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정녕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힘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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