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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산에 오릅시다 (엡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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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산에 오릅시다 (엡 1:15-19)


산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이 있어서.., 산이 좋아서.., 건강을 위해서.., 인천대공원 안에 관모산(162m)을 오르는데 높지는 않지만 올라가면 멀리 서해 바다도 보이고, 인천 부천도 보인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는 호수 공원을 돌고 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올라야 할 산이 있다. 그 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려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1)자연인(the man without the Spirit) - 신령한 산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2)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는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3)육신에 속한 자(worldly - mere infants in Christ) - 적당한 곳에 눌러 앉아 노는 사람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을 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가?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러분,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같다. 신령한 산에 올라야 한다. 왜 올라야 하는가? 성도들을 향하신 크고도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산에 오르는 자는 그의 삶이 풍성해지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신령한 산에 오를 수 있는가? 오늘 본문, 사도 바울의 기도 속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1.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1)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 - 자연계시 -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
2)하나님이 알려 주셔서 아는 방법 - 특별계시 -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에 요청했다. “선생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요 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육체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오늘날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간구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박윤선목사,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반 영적 지식에서 더 밝은 영적지식을 구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복의 가치는 세상적인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을 누리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 비례한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깊이 알 때 우리는 더욱 더 높고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방법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게 하옵소서.”
원하는 마음,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찬송가 5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마음의 눈을 밝혀 주소서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 말 속담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더럽고 추한 것만 보게 된다. ‘마음의 눈’은 영안이다. 영안이 밝으면 신령한 산에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예비하신 신령한 은혜를 보게 된다. 

1)부르심의 소망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사 불러내시고 불러 내신 자에게 주실 미래적 소망을 뜻하는 것이다.

때때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에 들어 있는 교우들을 보게 된다. 이유인즉 하나님께서 해도 너무 하신다는 것이다. 작정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까지 했는데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부르심의 소망”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주신 소망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다. 유한한 이세상에서 부귀영화 누리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소망을 주시기 부르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1:3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디도는 딛2:13, “복스러운 소망”, 골1:27, 영광스러운 소망이라고 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망 사이에 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그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능히 감당하고도 남게 되는 것이다.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찬송가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기도해야 한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도록 기도해야 한다. 

2)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영안이 밝으면 장차 성도가 받을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알게 된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업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증거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토록 살 그 영광을 생각할 때 그 앞에 놓인 고난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다. 

빌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생각하면 빨리 가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물론 성도가 받을 기업이 꼭 미래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의 삶을 사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도 즐겁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들이 받을 기업을 바라보고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님, 내 마음 눈을 밝혀 주옵소서, 내 영안을 맑게 하여 주옵소서!’

3.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알게 하소서

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향하여 -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빌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폴레옹과 소년병, 탈영하다 붙잡힌 소년병의 이름이 보나빠르뜨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소년의 멱살을 잡고, ‘용기를 내든지 아니면 네 이름을 바꿔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패잔병 같은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머리 잘린 삼손과 같이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난 주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행8장의 빌립 집사 - 사마리아성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십자가의 깃발을 꼽는데 성공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의 두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들의 씨뿌림을 인하여 이 땅의 방방곡곡에 우상의 전적이 무너지고 교회가 세워졌다. 

사도 바울은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게 하옵소서.” 그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오래 전의 이야기다. 시골 마을 외딴 곳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외아들은 미국으로 유학가서 성공했다. 그러나 할머니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병들어 눕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아들을 욕했다. 의사가 왕진을 왔다가 벽에 붙여 놓은 이상한 종이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들에게서 매달 꼬박꼬박 부쳐온 수표였다. 할머니는 이상한 쪽지가 수표인 것을 알지 못하고 아들을 원망하면서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불행하고 안타까운 현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고도 그 복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 아래서 안주하면서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교회, 

엡 1: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에베소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도록 기도로 요청한 것이다. 
1)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게 하소서.
2)마음 눈 밝히사, 성도 안에서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에게 주신 기업의 영광과 풍성을 알게 하옵소서.
3)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가 어떠한지 알게 하소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듣고 은혜 받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를 영적인 산, 신령한 산에 오르기를 촉구하고 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올해는 영적인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한다.

2%, 하루에 2%, 24시간, 1440분의 2%. 28.8분, 하루 30분, 신령한 산에 오르는 방법, 기도하기를 결단하는 것이다. 낮은 곳에서 안주하지 말고 한 번 용기를 내서 신령한 산에 올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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