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주님 앞에서 누구인가? (요 1:19-28)

첨부 1


나는 주님 앞에서 누구인가? (요 1:19-28)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가 어느 날 복잡한 길에 나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갔습니다. 그래서 누가 지나가는지 누가 오는지, 그런 것은 생각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던 중에 앞에서 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쾅” 부딪쳤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사람이 화를 버럭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당신 누구요?” 
그러자 그 철학자가 “글쎄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중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죽은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발견하시길 축원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대하던 메시야의 임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광야에서 세례요한이 나타나 설교도하고 세례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은 진상을 밝히고자 조사단을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보냈습니다. 19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세례요한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요한이 제사장의 아들이고 레위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찾아와서 “너는 누구냐?” 물었습니다. 이때 세례요한은 들어내어 놓고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은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세례요한은 세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그 세 가지 대답은 무엇일까요? 
이 대답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에 세례요한의 대답은 뭘까요?   

1.“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20절을 보세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세례요한은 자신의 신분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고 분명하게 밝힌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대답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인기가 올라가고 사람이 자기 주변으로 몰려들어도 결코 메시야로 위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정직하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존경 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 유혹을 극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요즘 시끄럽습니다.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한기총)도 그렇고 감리교도 그렇고 장로교도 그렇고 교단과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자기 자신의 역할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가르침은 안중에 없고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내세웁니다. 그러기에 이런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이 고백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말은 “나는 그분의 종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원 이전의 우리 신분은 죄의 종이었고,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주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노릇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닐 앤더슨이란 신학자가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닐 앤더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오, 그것은 당신 이름입니다.” 라고 할 것이다. 
“아, 나는 신학교 교수입니다” “아니오, 그것은 당신의 직업입니다” 
“아, 나는 키가 173cm이고, 몸무게는 약 68kg입니다” “아니요, 그것은 당신의 겉모습이요” 라고 할 것이다. 
앤더슨 교수는 그 책에서 외모나 이름과 직업이 진정한 내가 아님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나를 뭐라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세례요한을 통해서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례요한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우물쭈물 대답할 것도 아닙니다. 법정에서 증언하듯이 확실하게 대답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나는 그분의 종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너는 누구냐? 그때 분명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세요.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했기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자기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요 3:29절에 세례요한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은 신랑친구이지 신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처럼 드러내어 놓고 말하고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이단들이 극성입니다. 그런데 이단은 처음부터 이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자꾸 추켜세웁니다. 그러다보니 교만하여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 착각합니다. 나중에는 자칭 하나님, 성령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는 자기숭배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나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지 않고 내가 누릴 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은혜도 없고 결국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그것, 그리고 자기를 들어내려는 그것이 우리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노릇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나를 높여도 물리쳐야 합니다.   

사도행전14:12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 도착하여 걸어 다니지 못하는 장애인을 치유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추앙합니다. 당시 헬라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제우스의 대변자, 헤르메스라고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은 옷을 찢고 소리치며 우리는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복음을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삶이되시길 축원합니다.    


2. “나는 사명자다”라고 대답합니다. 

23절 보세요.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사명의식이 분명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다만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약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입니다. 

사40:3절을 보세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우리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밀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대로 진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700년 전에 약속하신대로 때가 되매 세례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다.” 
이것은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통해 갖게 된 사명의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알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쉽게 그것을 찾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과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신 종들을 보세요. 하루아침에 충성된 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사명자로 만들기 위해서 무서운 연단과 훈련을 하십니다. 큰일에 쓸 사람은 크게 훈련시킵니다. 작은 일에 쓰실 사람은 짧게 연단합니다. 

보세요. 모세를 보세요. 광야로 먼저 보내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40년 훈련시켜 40년 쓰십니다.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10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훈련시킵니다.   

왜 이렇게 혹독한 훈련을 하시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이 되게 하시려고 광야의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세례요한도 광야로 갑니다. 그가 언제부터 광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음식으로 메뚜기와 들 꿀을 먹었습니다. 의복은 낙타털 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가족과도 떨어져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 중요도 지금 광야를 걷고 계신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광야가 힘들고 어려운 길이나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축복이 됩니다. 
광야는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희망의 장소인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입니다.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광야는 있습니다. 그것이 광야인지 몰라서 그렇지 수많은 광야 연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명자로 이끄는 훈련인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그 훈련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119: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큰소리치는데 오히려 주의 길을 방해합니다. 요한 당시에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장로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됩시다. 내가 사명자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적당히 살다 적당히 가려는 생각 버리세요.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신 이는 거룩한 사명도 주어서 보내신 줄 믿고 그 사명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되시길 바랍니다. 
  

3.“나는 종이다”라고 대답합니다. 

27절을 보세요.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명자의 자세의 겸손의 모습입니다.   

실상 세례 요한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사의 수태고지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가문도 제사장 가문으로 좋은 가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주님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흙먼지 투성이의 주인의 신발 끈을 허리 굽혀 푸는 일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은 아무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던 요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요 심판자로 오심을 알았기에 그분 앞에서 자기는 가장 낮은 종노릇할 자격조차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아니 신발 끈을 만질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출생한 자들이고 마땅히 심판 받을 자였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그 은혜에 감동하여 감사드리며 그 은혜의 해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을 만방에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일지라도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유 1:1).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의 종들로 살았습니다. 벌레보다 못한 자로 여기고 작은 자로 여기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엇이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상전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 덕분에 한 밑천 잡으려는 식은 아닙니까?   

우리 주위에 예수님 이름을 팔아 자기를 추켜세우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한몫 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뭘까요? 주님이 받드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면 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주의 종” “주의 종” 이런 말을 들을 때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내가 어떻게 주의 종이 됩니까? 
마땅히 영원한 심판 속에 형벌 받을 나를 종삼아 주신 그 은혜, 이것을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주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은 낮추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기억하고 그를 높이도록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발 끈을 만질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높이높이 세우십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요한복음15:15절에 보세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실상 종이지만 영원히 종이 아닌 친구로 대해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누구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확신에 찬 대답이 오늘날의 세례요한인 우리의 대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최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