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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와 용서 (창 3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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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용서 (창 31:43-55)


I. 불편한 진실

한 부인이 수첩에 항상 남편의 사진을 넣고 다녔습니다. 친구들이 그 이유을 묻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때마다 이 사진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토록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이 사진을 볼때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금방 해결된다”고 했습니다. 

한 집에서 한 솥밥 먹고 살면서도 원수처럼 남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한 척 대화를 하지만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는 가식적 대화와 관계를 말합니다. 

라반과 야곱은 장인과 사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 서로 속고 속이는 불편한 진실관계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앞에서는 그리고 겉으로는 친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갈등하고 서로 미워합니다.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 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서로 비난할 말이 많습니다. 또 문제의 책임은 항상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이런 「불편한 진실」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라반 모르게 야반 도주합니다. 그러나 곧 라반에게 추적당해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라반은 야곱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지만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 즉, 서로 잘 잘못을 따지지 말고 용서하라고 명합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개입에 무릎을 꿇습니다. 
야곱이 한없이 미웠으나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정합니다. 
43절을 보십시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상황이 제대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시니 야곱은 적대시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사위이며 가족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야곱이 자기 가족이요 사위라는 사실을 왜 20년 동안이나 잊고 있었을까요? 야곱에게 속한 것, 즉 야곱의 아내는 라반의 딸들이며 야곱의 자식들은 라반의 손자들이었고 야곱의 양 떼들도 모두 라반이 약속대로 품삯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시니 이 가족개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원수가 보입니까? 사탄이 내 눈에 있는 겁니까? 
사랑이 보이고 친구가 보이고 가족이 보입니까? 성령님이 내 눈에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 신령한 눈을 뜨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미워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있는 대상들은 다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서로 싸우고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원수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바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말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라반은 화해의 몸짓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언약을 세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합니다. 야곱도 이 시점에서는 갈등을 멈추고 싶었는데 마침 라반이 그런 제안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화해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먼저 말하지 못해서 화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용덕 씨의 “내가 먼저”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와 사소한 의견차이로 서로 상처를 주고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어느날 밤 성령님이 이 사실을 아프게 하셨습니다. 그날밤 친구를 찾아가 화해하고 친구와 함께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1.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채로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채로 

II. 두 개의 돌기둥

45-46절을 보십시오.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야곱은 즉시로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고 해서 큰 돌무더기를 세웁니다. 그들이 돌무더기를 다 만들어 놓고 ‘먹었더라’는 이야기는 그들이 온전히 화해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가족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운 이 돌기둥은 그의 생애에 있어 두 번째 세우는 돌기둥입니다. 
그가 첫 번째로 세운 돌기둥은 창세기 28잘 18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도망하던 중 들녘에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고는 잠에서 깨어나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세운 첫 번째 돌기둥입니다. 

첫 번째 돌기둥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면 
두 번째로 세운 돌기둥은 인간끼리의 화해의 언약으로 세워졌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두 개의 돌기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돌기둥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세워지는 화해의 돌기둥입니다. 

오래전 상영된 영화 「밀양」은 하나님과의 화해 돌기둥은 세웠는데 두 번째 돌기둥 즉 사람과의 화해와 용서라는 돌기둥을 세우지 못한 고뇌와 아픔을 그린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남을 용서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나 동료, 가족과 다투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 용서를 하면 마음에 평강과 안정을 되찾게 되지만, 용서하지 못하면 분노로 괴로워하거나, 복수를 위해 고민하기도 하고, 한 평생 원수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사람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아파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쥐약은 자기가 먹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요.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용서 프로젝트’의 설립자이자, ‘용서학’ 교수인 프레드러스킨(Pred Ruskin) 박사는 수년동안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시킨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용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라고 했습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용서로 치유받는 최초의 그리고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이다... 진실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풀어 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독한 화살에 맞을 때가 있지요. 친구에게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사기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심한 모욕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화살 맞은 사람입니다. 
이때 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떤 놈이 화살을 쏘았어. 저 놈이 내게 활을 쏘아!” 
그리고는 원수를 찾아 다닙니다. 원수를 독과 함께 품고 삽니다. 
결국 자기가 죽습니다. 바보같은 사람들입니다. 

III. 용서

그러나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서 풀풀 끓여 봅니다. 그러면 마지막 엑기스 한 방울이 똑하고 떨어지면서 “용서”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누구나 다 교회에 처음 찾아나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문 앞에서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용서받았느냐? 그리고 모두를 용서하고 여기 왔느냐?”

이 강단은 하나님의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곳입니다.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주님 전에 찾아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1. 왜 그렇게 용서가 중요합니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몸으로 기적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다가 이웃들에게 오해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평안도 천국도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 그리고 사탄과 영혼이 묶여 살아가는 Soul-Tie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2. 어떻게 용서가 가능해 질까요?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나 혼자 상처를 받은 것 아닙니다. 나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가슴으로 보십시오.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이해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듯이 그 사람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는 권면이 아닙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나의 성품을 나누어 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용서의 씨앗을, 용서의 권능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었노라. 너희는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따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있을 때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기분과 느낌이 있을 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의지를 따라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노력으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따라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시옵소서. 지금까지 모진 세월 살아오면서 내게 아픔을 남겼던 저사람에게 벼락을 내리시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못난 사람들이지요.

신약성경에서 “용서하다”란 동사를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 순종하겠습니다.” 일뿐입니다. 

순종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이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동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용서하라고 사랑해라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게 됩니다. 

4. 용서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깨끗하게 용서받고 누군가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죽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USA투데이지에 “용서 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대게 잔병이 많은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장수의 삶을 살게 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사 MGM(Metro Goldwin Mayer)의 설립자 메이어는 어렸을 적에 친구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그럴때마다 메이어는 집으로 돌아와서 화를 내며 그 친구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메이어를 산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친구 욕을 실컷 하라고 했습니다. 메이어는 산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못된 놈아.” 그런데 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10배의 큰 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메이어는 겁이 났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제 친구를 축복하며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신다”고 외쳐보라고 했습니다. 메이어가 그렇게 말하자, 동일하게 메아리가 자신에게 10배의 큰 축복의 말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때 메이어는 ‘남을 향해 한번의 욕을 하면 그것이 10배로 돌아오고, 남을 한번 축복하면 10배로 축복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떤 사람이든지 비판하지 않고 칭찬하고 축복했습니다. 그 결과 매년 매출 12억 달러(1조2천억원)의 세계적인 MGM 영화사를 설립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유없이 가끔 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대게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손과 발이 마비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병이 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세포가 꾸준히 생성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 갈등의 문제,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경통, 위궤양, 밥만 먹으면 이유없이 설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IV. 용서의 장애물

우리가 화해를 할때에 제일 큰 장애물은 자존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과하면 나도 화해하겠다.” 
자신은 절대로 먼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존심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조금 창피를 당해야 합니다. 명분이 상처를 받아야 합니다. 

갈등과 미움을 버리고 화해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장애물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협상은 하겠다. 그러나 손해는 보지 않겠다”라고 다짐합니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화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다 죽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면 오히려 더 이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사실인 줄 알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감정과 자존심에 손해를 보십시요.

화해를 하려면 두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존심과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야곱과 라반이 화해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또 하나 발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를 하셔야 합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화합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쪽을 치유해 주시고 복을 주셔야 화해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본문 5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함께 제사를 드리고 떡을 나누고 밤을 샜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55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전날 밤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입니다. 라반은 밤새도록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회포를 풀고 딸을 부탁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헤어집니다. 라반의 눈에 눈물이 고였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의 가정에 있기를 원합니다. 부모, 부부, 또는 직장에서의 갈등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와 소공동체안에 이런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조였던 손양원목사님의 딸 손동희권사님(부산대연교회)은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비가 없어서 낮에는 신문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 1937년 7월14일에 나병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 했는데, 그때 나병 환자 수는 1200명 이었습니다. 

나환자를 너무 사랑한 아버지는 "오 주여! 이들을 사랑하되 내 처자식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와 나환자들은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서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9월25일(수)) 일본 형사들 둘이 들이 닥쳐 아버지를 체포하여 갔습니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였습니다. 아버지가 첫 감옥에 끌려 가셨을 때 나이는 39살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감옥의 한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발이 얼고 얼다가 또 얼고 이것이 반복 되다가 나중에 열 개 손톱과 발톱이 짓물러서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출소일이 되어서 어머니께서 형무소에 가셨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이럴 수 없다며 통곡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형무소 소장과의 면담에서 소장이 "신사참배하면 될텐데 당신은 헛 수고 했소"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헛수고는 당신이 했소. 신사 참배 할 것 같으면 내가 왜 감옥 생활을 했겠소.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하오. 그래서 일본도 망할것이요"라고 답변하자, 다시 재판해서 종신형을 언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큰 오빠가 군대를 가야한다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가정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군대는 신사 참배가 의무화 되어 있었으며, 만약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총살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7식구는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만주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은 남해 깊은 산골짜기로, 그리고 나와 또 어린 동생은 고아원으로, 오빠들은 나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고생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한국에 복음을 전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했던 일본 정부는 전쟁패전의 원인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목사 때문이라 하여,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을 전부 죽이기로 결정 했는데, 그 날짜가 바로 8월 17일 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 아버지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되었고, 그토록 그립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던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와서, 한 가족이 오랜만에 한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 내 나이 16세 되던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공산주의사상에 물든 청년들이 여수, 순천에서 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폭동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간 죽은 사망자 숫자는 3500명이며, 500명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 큰오빠 나이는 25살 작은 오빠는 19살 이었는데, 난데없이 오빠의 같은 학교 학우들인 좌익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두 오빠를 끄집어내어 땅바닥에 엎어 놓고는 얼굴이고 머리고 닥치는 대로 짓밟았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두 오빠를 끌고 사형집행장인 순천경찰서로 갔습니다. 

오빠들은 소위 ‘인민 재판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예수쟁이’와 큰 오빠가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고 해서 ‘미제국주의 앞잡이’였습니다. 순천 경찰서 뒤들에 사형대를 설치 해놓고 오빠들을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사상 뽑아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드려. 우리와 같이 협력 할 수 있으면 살려준다 어떻게 할 테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큰 오빠의 대답은 "그건 할 수 없다. 왜 같은 동족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 너희들도 이러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이 나라가 복을 받는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하자 누군가 ‘할 수 없군’ 하며 큰오빠의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린 후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큰 오빠는 찬송을 한곡 부르고 죽겠다하며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부르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하는 순간 날아오는 총알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 오빠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큰오빠 시체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대성통곡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익 학생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입니까? 나도 내형이 간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형님의 신앙과 같다."하며 양팔을 펴들고 "자 총을 맞을 테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쏠 테면 쏘아라!" 하고 외치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와서 작은 오빠마저 큰오빠 곁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두 오빠의 시체는 애양원 나환자촌에 운반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오빠의 시체를 끌어 안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울다가 울다가 결국 기절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온 애향원 나환자들도 두 오빠 시체를 앞에 놓고 애향원이 떠나가도록 통곡 하였습니다

두 오빠 장례식에서 우리 아버지 손양원목사님은 모든 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장례식 답사를 통해 9가지 감사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神愛)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주일에 감사헌금을 1만원이나 드렸습니다. 당시에 목사님 생활비는 80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오빠의 장례식이 마치고 1주일이 지났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오빠들을 죽인 사람을 잡았다는 소문이 들려 왔고, 그 범인은 마침내 오빠와 같은 학교 3학년 학생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따르려고 하셨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전 아버지 뜻에 크게 반발하고, 펄펄 뛰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아버지는 항상 별난 에수를 믿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저를 설득하며 말했습니다. 
"동희야! 날 쳐다보아라. 내 어차피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 시켰는데,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되,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단 말을 듣고는 이대로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째서 저 명령은 순종하고 이 명령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모순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 만일 안 지킬 것 같으면, 과거 5년간 감옥살이 헛살았고, 너희들 5년간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 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아버지는 최고 악성으로 분류되어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그 학생을 극적으로 구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어이 내 오빠가 되었습니다. 

화해하십시오. 
자존심을 버리고 손해 보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화해를 신청하십시오. 
용서를 구하십시오. 함께 식사를 나누며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먼저 찾아가십시오. 
전화 오기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먼저 전화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손해를 보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는 화해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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