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과 마음과 뜻이 같은 교회 (고전 1:10-17)

첨부 1


말과 마음과 뜻이 같은 교회 (고전 1:10-17)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본론 중 첫 번째 부분입니다. 여시서 사도 바울이 다루는 첫 번째 문제는 고린도교회 안의 당파와 분쟁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서 쓰기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했습니다.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외에 여러 다른 교제들로 나뉜 것입니다.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신앙공동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성별, 나이, 성격이나 취향의 유사성, 사는 동네 등에 따라 보다 친밀한 교제관계가 여기저기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비난받을 일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이니까 모든 사람이 그 누구와도 특별히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엄격한 등거리 교제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으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모두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 차이가 어떠하든 다 존중할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교우들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교제관계들이 교회 안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들린 소식은 고린도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본문 11절).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가 세운 교회 안에 당파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무엇보다도 그를 안타깝게 만들고 염려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이 분쟁의 문제를 제기하며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 대한 권면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지칭하며 “형제들아” 합니다. 11절에서도 한 번 더 “내 형제들아” 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이라 한 말은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즉 형제자매들을 의미하며 사용된 말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데 사용한 가장 표준적인 용어입니다. 이 단어가 바울서신에서 나오는 회수의 29%가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분쟁으로 갈라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가족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권면에서 교회는 분쟁이 없어야 하며 온전히 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라고 합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모두가 앵무새나 녹음기같이 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과 표현의 차이 때문에 당파를 지어 싸움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동체 전체의 조화를 꾀하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합창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합창단원 전체가 같은 곡을 부르지만 거기에는 여러 성부가 있습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고 때로는 제1소프라노, 제2소프라노도 있고 제1테너, 제2테너도 있으며 바리톤도 있습니다. 서로 다 다르게 부르지만 그것이 함께 한 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르게 부르느냐?”고 야단치고 싸운다면 무슨 합창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또 좋은 합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단원이 각자가 속한 성부의 악보를 바로 읽고 정확한 음정으로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화음이 잘 되어 아름다운 합창으로 들려집니다. 음을 틀리게 소리 내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합창은 망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음이 잘 되는 음끼리도 어느 음은 소리가 조금 더 크고 어느 음은 소리가 보다 작아야 화음이 더 절묘하게 들립니다. 아무리 음정이 정확해도 작게 소리 내야 할 때 크게 소리 내면 음악이 깨집니다. 반대로 큰 소리를 내주어야 할 때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내면 맥 빠진 합창이 되고 맙니다. 곡의 같은 부분에서도 어느 파트는 큰 소리로 부르고 다른 파트는 작은 소리로 불러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소프라노 파트에서 크게 부른다고 우리가 질 세냐 하고 베이스 파트에서 경쟁하듯 큰 소리로 부르면 그건 합창이 아닙니다. 

연주 끝나고 나서 연주가 잘 안 된 책임을 서로 다른 파트에 돌리며 원망하고 패싸움을 한다면 그게 합창단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다른 이들의 할 일과 책임을 존중하며 자기의 자리에서 맡겨진 책임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은 제 때 정확하게 바로 하고 조용히 할 일은 조용히 해야 합니다. 옳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말을 큰 소리로 떠들고 다니면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란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각 제직부서가 부서이기주의에 빠져 서로 경쟁적으로 예산 많이 따내려 싸우는가 하면 할 일은 타 부서 소관이라고 탁구 치듯이 상대방에 자꾸 보내버리기만 계속한다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한 사람의 몸에서 손과 발이 서로 싸우는 일이 있습니까? 코가 할 일을 귀가 하겠다고 하고 귀가 할 일을 입이 하겠다고 하는 일 있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지체 안에는 조화가 있는 법입니다. 서로 할 일을 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의 의욕이 지나쳐서 자기 일도 아닌 온갖 일에 일일이 다 간섭하며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는 것만 못합니다. 

합창할 때도 보면 자기 파트 악보에 쉼표가 길게 있으면 숨 고르며 조용히 있어야지 고 사이에 다른 파트, 그것도 여성 파트의 악보를 같이 따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이스 목소리 가지고 소프라노로 갔다 알토로 갔다 왔다갔다 분주하게 노래하면 아무리 봉사 많이 해도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입니다. 여성의 소리가 들려야 할 데서 남성 소리가 나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친교봉사부에서 식사 나눠주어야 할 시간에 의료선교부에 가서 진료 잘 하나 안 하나 감시하며 참견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남선교회 소속인 사람이 시간 남는다고 여전도회 모임에 들어가서 기웃거리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교회에 속한 이들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 그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그의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서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각각 하는 말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 엉뚱한 어느 인간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교회가 분쟁이 없이 온전히 합해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같은 뜻”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같은 “뜻”은 같은 “목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같은 목적에로 부르신 이들의 무리이고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같은 뜻과 목적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자기 개인의 나라를 구축하고 자기 자신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진실하고 순수한 교인들과 같은 말을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분란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고 자기 출세를 꾀하려는 자들이나 세상에서 맺힌 한을 교회에서 풀려 하고 세상에서 휘둘러보지 못한 권력을 교회에서 휘두르고 싶은 뜻에서 교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인들과 같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당파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며 당파를 이루고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분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답게 같은 말을 하며,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당파도 분쟁도 없이 온전히 하나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을 통해 고린도교회에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와 그리스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각각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본문 12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사도 바울은 통탄하며 세 가지 질문으로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밝힙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신데 그의 몸 된 교회에 어떻게 당파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강한 질책입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바울에게 속하고 아볼로에게 속하며 게바에게 속했다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하는 질문도 교회 안에 여러 당파와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교회를 이룬 무리인데 그리스도 외에 다른 소속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당파는 거론도 하지 않고 자기 이름이 붙은 당파를 거명하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질책합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 세례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에 의해서만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세례를 주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든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 교회 안에서 같은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당파를 이루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며 주도권 다툼을 한다면 이 얼마나 해괴하고 한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교인들을 따로 따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목사파와 장로파가 있다든가, 아무개 장로파와 또 다른 아무개 장로파가 있어 대립하여 싸운다든가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아예 교회도 아닙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와 그리스도파가 있다는 것이 아주 잘못된 일임을 밝힌 사도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그런 당파와 분쟁이 일어나 원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의 일부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의 하나가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였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고 따르는 추종자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과연 어떻게 사도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쉽게 접지 못하고 그가 행한 세례의 유효성 문제나 교회 안에서의 그의 권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반바울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의식하고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든 복음을 바르게 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역설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말일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그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평가하며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10:10)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후11:6)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인 아볼로가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데다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님에 관해 자세히 가르쳐서(행18:24-25)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성경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을 이기는 사람이었기에(행18:27-28) 고린도교회에서 많은 지지자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시원치 않은 바울보다 언변이 좋은 아볼로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이 파당을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 잘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웅변술과 수사학적 기교에 너무 의존하면 복음의 진리 그 자체를 놓치기 쉽고 언변이 좋으면 설교자 자신이 돋보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잊어지기 쉬움을 안 사도 바울이 언변 좋은 사람 따라 당파가 이루어지는 일의 위험을 지적하기 위하여 한 말이 자기는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가르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귀에 즐거운 이야기 듣기만을 원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재미난 이야기 들려주는 것이 교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입니다. 게바파는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 모교회의 수장이라는 권위 때문에 그를 바울보다 더 크게 여기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 형성된 파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고파는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교회 안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하는 것이 있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에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서 이룬 당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 어떤 파당을 만들고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모두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로 부르심을 받은 백성답게 온 교우가 같은 말을 하며 같은 마음과 뜻을 품고 온전히 합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앞당겨 살아가는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