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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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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1:12-14)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비난한 내용에 대한 첫 번째의 변증의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은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을 비난하여 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편지내용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보잘 것 없는 자로 편지를 통해서 볼 때는 힘이 있고 능력이 넘치는데, 실제로 만나 보면 외모도, 말주변도 없고 약한 존재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회에서 위임장도, 추천서도 없는 무자격자라고 비난하면서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자랑할 것이 참으로 많다고 주장하면서 외적인 자랑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혈통과 출신을 자랑했습니다. 외적인 능력과 강함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은사 많음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은 사도회에서 위임장을 받은 진정한 사도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으로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거짓교사들의 속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 대해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도 엉텅리 복음으로 변질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마음에 안타까움과 심각성을 가지고 이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바울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해명의 내용입니다.  

12절 말씀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서 대적자들과 이에 동조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하는데 대해서 바울은 해명하기를 자신은 고린도 교회를 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하였다고 분명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덧붙여서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육체의 지혜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랑은 대적자들의 자랑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교사들의 자랑은 인간적이고 외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랑은 철저히 신앙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낮아짐으로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되고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남에게는 없는 것,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랑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입니다. 

두 아이가 골목에서 놀고 있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두 개나 있어. 또 우리 집에는 냉장고도 큰 게 두 개나 있지. 그리고 컴퓨터도 아빠 방에 있고 내 방에도 한대가 있어. 너희 집에는 다 한 개 밖에 없지?’ 이 말을 들던 아이가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웃기지마! 나는 엄마가 둘이야.’  

그런데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자랑하는 것보다 ‘무엇을 자랑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무엇을 자랑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자랑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식이 제일 중요합니다. 물질을 자랑하는 사람은 물질이, 명예를 자랑하는 사람에 명예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떻습니까? 신앙인이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부를 자랑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권력을 좇아가고 부를 좇아갑니다. 성도들에게도 부는 자랑일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남보다 좋은 대학 나오고, 남이 오르지 못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이것이 자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랑은 참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서 파괴되어 무너졌습니다. 세계무역센터인 쌍둥이빌딩은 유태인이 소유주로서 유태인의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유태인들이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을 매입하려고 했을 때 소유자가 유태인에게는 이 빌딩을 매각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이에 화가 나서 유태인 상공조합이 협력하여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를 보여 주기 위해 한 채가 아닌 두 채를 건축한 것이 바로 세계 무역센터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빌딩은 중동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의 부의 상징으로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빌딩이 세워진 목적을 보면 유대인들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빌딩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대부호 알치비아데스라는 사람이 하루는 소크라테스 앞에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가 매우 많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때에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세계지도를 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어느 정도인지 이 지도에 표시해 보십시오.’ 그러자 그는 당황하며 ‘그런 농담은 마십시오. 내 토지가 아무리 많기로서니 세계지도에 그릴 수야 있겠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세상적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자랑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빌 3:5-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최고의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이스라엘 족속이었고, 베냐민 지파였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이었고, 교회를 핍박하던 열심있는 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존귀와 영화를 자랑거리로 삼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로 볼 때에는 전혀 자랑스럽지 않은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고상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갈 6: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영생이 있고, 십자가에 자유가 있고, 십자가에 무한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율법주의로 살았지만, 결코 인간이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평생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사도 바울은 유일한 자랑의 근거로 삼았고,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롬 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강조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의 강조형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종으로 살아도 좋다고 할 만큼 그의 인생을 삼켜버린 복음, 자신의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요, 평생 사력을 다해 일하도록 만든 바로 그 복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멋진 자랑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고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좋은 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누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에 십자가는 아주 흉측한 사형틀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을 처단하는 처형 틀이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너무나 가혹한 형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정복민들이나 하류층의 흉악범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로마인들이 생각할 때는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요, 수치스러움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무에 달려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저주받아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바보취급 받기도 하고 수많은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끼리 '형제' 혹은 '자매'라 불렀기 때문에 동성연애자들로 오해도 받았습니다. 성만찬식 때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였기 때문에 인육을 먹는 자들이라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과정에서 유아살해의 혐의도 받았고, 돌아올 천국을 말하다가 허무맹랑한 신앙에 빠진 자들이라며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 복음은 일반적으로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자세 때문에, 온갖 박해를 당했습니다. 온갖 조롱을 다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고후 12: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라”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환경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로마의 황제를 향해 반역을 하는 행위였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믿음은 금보다 더 빛났으며,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신앙을 지키게 된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그의 헌신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든지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리도 무모한 짓을 합니까?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위해 죽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이며, 자랑거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붙잡혀서 매를 맞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당했을 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매를 맞으면 더 좋아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찬송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복음의 능력이 식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하고, 손해보고,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삶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들처럼, 사도 바울처럼, 히브리서에 소개된 믿음의 선진들처럼, 예수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돈이나, 명예, 권력, 자식자랑, 외모 자랑, 환경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자랑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이러한 허탄한 자랑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어떤 외적인 화려함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가 사도 바울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복음 안에서 굳게 서는 것이 사도 바울의 자랑이요, 소망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하며, 이런 삶을 자랑으로 여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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