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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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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주님의 모습 (요1:14-18)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옆 사람에게 “은혜 받으세요.” 인사합시다, 

요즘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신문 방송, 온 매스컴의 관심사였습니다. 저도 중학교 무렵인가 하루 저녁 내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시청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미인인데 다른 사람이 미스코리아 진에 뽑히는 것을 봤습니다. 

요즘은 워낙 성형 기술이 발달되어 인조 미인들이 선발되기에 그런지 시들해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옛날 모나리자가 오늘날 미인선발대회에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예선 탈락했을 것입니다. 미인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대학가에서도 미인 선발대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인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외모만을 가지고 미인이다 아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아름다음의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생김새가지고 일반화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래도 당분간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계속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은 우주도 아니고 지구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있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인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무서운 존재, 가장 추악하고 두려운 존재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이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18절의 말씀을 보세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표현하고 있나요?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고 표현한 첫째 표현은   

1.“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데 육신이 되어 사람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라는 단어는 "flesh" 로서 우리의 몸 덩어리, 고기 덩어리, 인간의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고기 덩어리를 입고 사람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무한(無限)하시고 전능(全能)하시어 시공을 초원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신비(神秘)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적 표현으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고 너무나도 황송하고 송구스럽다 보니 사도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榮光)”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것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 사건은 우리 인류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고 가장 위대한 날입니다. 그야말로 인류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이날을 기점으로 주전(主前) 주후(主後)가 생기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역사를 BC, AD로 나누지요? 이 뜻이 뭡니까? 우리는 흔히 기원전(紀元前) 기원후(紀元後)라고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Before Christ, 주전(主前)입니다. 그리고 AD는 “Anno Domini”라는 단어의 약자로 주후(主後)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때를 기점입니다. 그날로 세계 역사는 바뀐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십니까? 모든 우주는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처럼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있는 것입니다. 참 신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우리가 그분을 보매 영광스러운 모습인데 그것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구원의 직품이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영광중에 계신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영광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 도전했습니다. 그러다 추방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언약을 받은 아담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이고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분의 영광은 찬란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사람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도 여러분! 
제발 그분이 우리 주님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내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거 어느날 교회 봉고차를 끌고 모임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배 목사님 한분이 우리 교회차를 보더니 “와~ 아직도 교회 이름을 붙이고 다니시네요.” 하더군요. 무슨 소리냐 했더니 요즘은 교회 차들이 다 교회 이름을 떼고 다닌답니다. 신호를 어기거나 교통법규를 어기면 욕을 먹기에 안 붙이고 다닌답니다. 교회 망신이라는 것이지요.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러면 안붙이면 신호 어겨도 좋은가요? 하나님이 좋아하실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내가 믿는 사람, 믿는 장로, 권사, 집사 된 것을 당당하게 들어내 놓고 살아야 합니다. 욕먹는다고 감추지 마세요. 우리가 주님을 부끄러워하거나 교회를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두 번째 표현은 


2.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했습니다. 

요1:14절 하반 절을 보세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요1:17절을 보세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1절). 
둘째, 창조의 주인이시다(2절). 
셋째, 생명의 주인이시다(4절).
넷째는 그분은 참빛이시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은혜와 진리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와 ‘진리’가 뭘까요? ‘은혜’란 헬라오로 ‘카리스’라는 단어로 쓰는데 그 뜻은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진리’는 ‘알레데이아’라는 단어로 쓰는데 ‘진실 되고 정의로운 온전한 길’을 말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은혜”란 사람에게 어떤 이유나 조건 없이 베푸는 혜택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은혜란 영적으로 죽은 인생들이지만, 당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주시는 영생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또 ‘진리’는 곧 예수를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14절). 예수께서도 친히 자신을 두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증거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진리’란 곧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은 우리 인생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살기 힘드시지요? 아멘을 안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참 힘든 세상입니다. 살기가 힘들어지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말세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1) 사람들의 마음이 메마르고 강퍅해집니다. 

내가 살기가 힘드니 누구를 도와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 거칠고 행동도 거칠어집니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 건들면 폭발합니다. 

저는 요즘 밤만 되면 교회 앞에 모여 밤새 떠는 청소년들 보면 안타깝습니다. 분명 학생들 같은데 담배 피우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 들어와 술도 먹고 토해 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놈들” 하고 야단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사람들 모습이 그렇습니다. 

전철에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욕을 해대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옵니다. 최근 문제되는 학교 폭력, 심각하잖아요. 그만큼 우리 시대가 은혜가 없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2) 거짓말이 난무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정치, 경제, 교육, 그 어디에도 속임수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보이스 피싱에 넘어가는 사람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당합니다. 정치인들 보세요.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합니까? 

그런데다가 이단의 미혹에 성도들도 넘어갑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들의 거짓말과 속임수도 교묘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시대가 악한 시대요. 메마른 시대라는 증거입니다. 

왜 이럴까요? 원인이 뭔가요? 우리 심령 속에 은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고갈된 것입니다. 그러니 메마르고 목마른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야 합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넘쳐납니다. 이 은혜와 진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학문에도 없고 철학에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했습니다. 

여기에서 ‘충만’의 의미는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말합니다. 

물이 샘에서 넘쳐흐르듯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풍성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디서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은혜도 넘치고 진리도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도 약속하셨습니다. 요 7: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습니다. 이 생수는 ‘성령’을 말하고 또한 그 성령을 통해서 체험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목마르십니까? 주님께로 오세요. 

메말라 있습니까? 말씀이신 주님께로 나오세요. 그러면 모든 목마름과 갈증이 해결 될 것입니다. 세상 물로 갈증을 해결하려 마시지 마세요. 돈으로 안 됩니다. 권력으로 안 됩니다. 그것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목마름이 해결이 안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주께로 나오시면 다 해결됩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 표현은 

3. "은혜위에 은혜"라 했습니다. 

요 1:16을 보세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에서 ‘충만’의 의미는 ‘차고 넘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이신 주님께로 나오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었이냐? 

“은혜 위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번 받은 은혜가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고 또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곱빼기만 아니라 늘 연속되는 은혜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단어를 하나만 가지고 안 되기에 은혜 위에 은혜라 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은혜를 넘치게 벋은 자들입니다. 

창6:8절을 보세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했습니다. 
노아가 노아된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이 부분이 오해를 살만합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입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의인이기에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만약 의인이기에 은혜를 입은 것이라면 노아도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기 이전에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은혜일까요? 
어떤 목사님이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주님을 만나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지금은 목회도 하시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질문을 한답니다. 

“목사님은 변호사하시다가 목사가 되었으니 아주 특별한 체험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특별한 체험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그것이 믿어지는 것이 큰 은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부자가 되는 것일까요? 대통령 되는 것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은혜 중에 은혜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 주시는 것이 믿어지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특별한 체험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 체험만으로도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분을 믿을 때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육신의 사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의 성탄 사건,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신비, 그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사람의 몸을 입으신 독생자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이 나를 지금도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찬양과 존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1:14절을 다시 읽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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