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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의 길 (욘 3:1-5, 막 1:14-20, 고전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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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욘 3:1-5, 막 1:14-20, 고전 7:29-31)

<유앙겔리온이신 예수>

오늘은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정과 중에서 마가복음서 1: 14-20절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특히 12사도 중에 네 제자, 즉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제자로 불러주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네 제자를 불러주시기 전 마가복음 기자가 14절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먼저 봅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기서 중요한 말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福音)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지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뜻하는 헬라어 ‘Euangelion’이라는 말은 신약에만 76번이나 나올 정도로 널리 쓰인 말입니다. 고대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황제와 관련된 소식은 무엇이든지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황제의 탄생, 생일, 결혼, 즉위식, 그리고 군사적인 승리를 알리는 승전보 등은 유앙겔리온, 다 기쁘고도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와 관련해서 사용하던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이제 예수님이 쓰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이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이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일체의 말씀이 유앙겔리온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가 유앙겔리온이요 당신의 입에서부터 나온 일체의 말씀이 유앙겔리온인 예수님이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먼저 때가 찼다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간표에 따라 엄청난 일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실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영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실현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예정된 시간이 되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 역사 속에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농사를 비유로 한다면 파종기와 추수기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완성 사이에서, 즉 ‘Between Times’, 두 시간들 사이의 중간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을 때 현재 명령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믿는 행위가 일과성 행위가 아니라 일생 계속해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믿는 것은 천국문에 들어가기 위하여 딱 한번 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 일생 동안 되풀이해야 할 행위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이만이 복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오직 복음을 믿는 이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Metanoia’는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지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방향을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는 행위가 회개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까? 회개는 “제가 지금까지는 잘못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좀 더 잘 할게요!”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I can do better!” 만일 회개가 이다음에는 좀 더 잘 할 수 있다는 고백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나 도움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복음만 절대적으로 붙들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란 “I cannot do better!” “저는 더 이상 더 잘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 불완전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 인생을 우리 스스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지 않고 겸손히 오직 하나님께만 위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 불완전함을 절감하는 사람만이 복음을 믿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부터 요구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로 불러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로 초청하시는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공항 터미널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확성기를 통해서 수많은 안내 방송들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분주하게 제 갈 길을 갈 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타야 할 비행기에 대한 방송일 때에는 놓쳐서 안 됩니다. 무시해서 안 됩니다.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청을 부리다가는 비행기를 못 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하여 탑승해야 할 안내방송과 같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죄악과 무능함과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회개합시오! 그리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제 16-20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네 제자를 불러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먼저 시몬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물고기 잡는 어부 형제를 제자로 불러주신 것이지요. 그 다음에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불러주셨습니다. 네 명의 제자는 모두 물고기 잡는 어부입니다. 

막 1: 29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이 없었던 것으로 볼 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결코 가난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봉독한 20절에 보면 두 형제는 품꾼들을 고용할 정도로 어업(漁業)의 호경기를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이들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가하게 놀거나 쓸데없이 빈둥거릴 때 제자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우리의 맡은 바 책임을 감당할 바로 그 때에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결코 가난해서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고기 잡는 일이 잘 되었고 자기 직업에 만족했고 오순도순 가족 간에 정이나 사랑이 넘쳐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다시 말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곧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18절). 

야고보와 요한 형제 역시 그 아버지 세베대와 품꾼들을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네 명은 어떻게 예수님이 불러주시자 마자 즉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을까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실히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직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직 어떤 확고한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이들을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끌어들이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때문에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말이지요.

이제 예수님의 남다른 권세와 능력과 관련해서 중요한 말이 “나를 따라오라”(17절)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17절)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본다면 “나를 따라오라”는 말은 영어로 “follow me”, 즉 단순히 “나를 따르라”는 말이 아니고 “come behind me”, 즉 “내 뒤에 쫓아오라”는 뜻입니다. “Come behind me”, 이것은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나머지는 다 두 번째, 세 번째 중요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follow me!”, 당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come behind me!”, 너희에게 아무리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두 번째, 세 번째로 놓고 내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형체는 쉬 사라지나니>

이와 관련해서 고전 7: 29-31절 말씀을 봅시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 교훈입니다. 예수께서 오늘이나 내일 금방 재림하셔서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처신을 보여야 할까요? 

이와 같이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와 관계된 말씀이 31절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세상의 마지막이 오면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이제 바울은 이렇게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 때 그리스도인이 보여야 할 다섯 가지 처신을 언급합니다. 

첫째,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넷째, 매매한 사람, 즉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들은 다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처신은 한마디로 “detached involvement”, 즉 세상일에 관여하되 초연한 자세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일을 열심히 하되 그것이 전부인양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회개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주실 때 “come behind me!”, 모든 것을 예수님보다 뒤에 두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마당에 이 세상 모든 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므로 세상일이 전부인양 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여기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come behind me!” 그동안 세상에서 최고로 가치 있게 여기던 것을 두 번째, 세 번째로 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이지요. 보화와 진주의 비유가 가르치듯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보화와 진주에 넋을 잃고 그동안 가장 귀하게 여겨오던 것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가치의 대역전, 여기에 제자도(弟子道)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 형체도 없이 사라질 세상의 그 어떤 귀한 것도 예수님보다 더 귀할 수 없다는 가치의 역전, 삶의 우선순위의 재정렬, 이것이 선행될 때 진정한 제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지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낚을 때 미끼를 매달아 한 마리 두 마리 물고기를 낚는 낚시법이 아니라,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왕창 한꺼번에 낚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다면, 물고기는 미끼를 물고 안 물고의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그물에 딸려들어가 배위로 끌려올라갈 뿐이지요. 

사람을 낚는 어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전도할 때 쓰는 미끼를 입에 물거나 내뱉거나 해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그물에 사로잡혀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코가 꿰여서 하나님의 나라로 끌려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 고기잡이 비유는 특히 “심판”과 “가르침”을 나타낼 때 쓰는 상징적 비유였습니다. 물고기를 낚는다는 비유는 세상 끝 날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의로운 재판관 앞에 세운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또한 무지 속에서 살던 이들을 지혜로 이끌어낼 때 고기잡이의 비유를 썼습니다. 구약 성경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거나 사악한 부자 위에 임할 심판을 경고할 때 물고기 잡이 비유를 적용했습니다(렘 16:16; 겔 29:4f; 암 4:2; 합 1:14-17). 주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단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뿐 아니라 삶의 모든 가치가 재정돈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물에 딸려 올라가게 될 때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이 뒤로 밀려나고 가장 하찮게 여기던 것이 꼭대기에 서는 가치의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살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물밖으로 나가면 죽게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그물에 딸려올라간 사람마다 옛사람, 육의 사람은 죽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물에 딸려올라가 진짜 죽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New Being”, “New Creature”,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전혀 새로운 가치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니느웨에서 일어난 일망타진의 기적>

이제 결론으로서 요나서 3: 1-5절 말씀을 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명령을 들은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싫었습니다. 쫄딱 망해도 시원찮을 원수 나라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니요, 너무 싫었기에 항구 도시 욥바에서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요나는 바다 속에 빠져 큰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밤을 있다가 다시 육지로 나옵니다. 

그런 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니느웨 성은 사흘 길은 걸어야 할 정도로 큰 지역이었는데 겨우 하루정도 외쳤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임금에서부터 가장 낮은 천민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대대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외쳤더니 큰 그물에 온갖 물고기가 한꺼번에 걸려든 일망타진(一網打盡)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지요! 선민을 괴롭히던 원수 나라의 임금으로부터 일반 백성,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회개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언제나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영원토록 저주받을 백성으로 예정된 민족이 아니라 선지자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했을 때 구원받은 백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인간의 회개와 결단이 하나님의 결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하지만 요나서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모습입니다. 요나가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come behind me!”,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고 자기의 뜻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하자 큰그물에 엄청난 숫자의 물고기들이 一網打盡, 한꺼번에 걸려들었습니다. 요나가 던진 그물은 죄로 가득 찬 옛사람은 죽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새롭게 살리는 그물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그물을 세상에 던져 세상을 살리는 예수님의 제자들,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들은 스스로 제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랍비에게 찾아와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찾아가 제자 삼아주셨을 뿐입니다. 이제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도 제자 삼기 원하십니다. 이제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읍시다! 주님이 불러주실 때 주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두 번째 세 번째로 여기고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그물을 세상에 던져 수많은 영혼들을 전혀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는, 사람 낚는 어부의 직분을 다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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