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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바다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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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막 7:31-37)

(막7: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 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 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1. 오른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야기로 꾸민 <에바다 이야기>를 먼저 보겠습니다.

<나는 10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데가볼리지방에서 살고 있었지요. 눈을 뜨면 맑은 햇살과 고운 새들을 보았지만 이 세상의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 없었지요.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도, 형제들의 고운 노래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요.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었을 때 비록 귀 멀고 벙어리였지만 무엇이든 해야 쓸모 있는 놈이 된다는 어머님 말씀에 마침 나무를 베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듣고 벌목하는 일을 하였죠. 자유롭게 산에 올라가 새의 노래 소리를 그리며 상큼한 풀내음을 맡으며 매일 매일 나무를 베는 일은 참 즐거웠어요. 점심에 동생은 잘 구운 빵과 익힌 고기 싱싱한 나물을 무쳐왔답니다. 듣지 못해도 말하지 못해도 늘 기쁨이었죠. 

어느 봄날 아침 그 날도 일찍 연장을 챙기고 산에 올라 나무를 찍고 있었지요. 유난히 큰 아름드리 나무라서 “그 놈 참 좋은 재목인 걸” 혼자 속으로 말하며 나무를 찍고 있었지요. 낮 한 때가 되어 점심 식사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한번 만 더 내려치자하고 도끼를 들었지요. 누이가 산을 올라 오다가 그런데 무엇을 보았어요. 나무가 꺾어 쓰러지면 부서질지도 모를 작은 집한 채가 산등성이 밑에 있었어요.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요? 늘 산을 올랐지만 반대편은 보지 못한 것이었죠. 누이가 저를 불렀어요. “오빠. 오빠. 그 나무를 찍지 마세요. 그 밑 산 아래에 집이 있어요. 사람이 살고 있어요. 오빠!” 

나의 귀는 막혀있었고 나의 귀는 닫혀있었고 미처 누이가 내게 와서 말하기 전 나무의 밑둥치는 잘려 쓰러졌지요. 100년의 고독의 나무는 100년의 슬픔을 사람들에게 전해줬지요. “이놈의 귀, 왜 들을 수 없어. 왜 말할 수 없어. 왜!” 그날부터 난 나무를 벨 수도 없었고 베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더욱 심히 놀려댔고 난 방구석 햇빛 안드는 방에 쭈그리고 앉아 나의 귀를, 나의 부모를, 나의 누이를 원망했지요. 그렇게 나의 삶은 절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 오던 날,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지요.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지요. 친구가 이렇게 손으로 말했지요. “너도 말을 할 수 있어 너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거야. 들을 수가 있어 들을 수 있어!” “들을 수 있다고? 미친 놈들, 말할 수 있다고? 나를 놀리는 거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랬어! 나는 병신이야! 제발, 나를 그냥 나줘!!” 그 때 내 눈 안에 누군가를 볼 수 있었지요.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좋은 옷을 입고 훌륭한 가문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러나 무엇인지 힘이 있어 보였지요. 막연히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 이분이 내 귀를 열고 내 입을 열어 주실지 몰라” 그 분은 나를 보시자 마자 나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조용히 아무도 몰래 왼 손을 들어 나의 귀를 막으셨읍니다. 어떠한 따스함이 일었어요.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침을 묻히시고 내 혀에 그 손을 대셨지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지요.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이 닫힌 세상이여, 이 막힌 사람들이여, 사랑치 못한 사람들이여, 답답한 형제들이여, 귀가 있어도 말씀을 못 들으며, 입이 있어도 전하며 찬양치 못하는 자들이여, 닫힌 마음을, 닫힌 가슴을, 닫힌 입을 열어라” “에바다” ..... 천지가 깜깜해지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귀의 막힌 것이 열리고 입이 맺힌 것이 풀렸지요. “아! 아! 아!” 나의 말은 탄식을 토해놓고 그렇게 그리던 말을 하며 그렇게 그리던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할렐루야! 위대하고 전능하신 주!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2.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 B.C.690년경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지도자들을 두고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이사야56:10-11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다 소경이요 무지하여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와 같으며 누워서 꿈이나 꾸고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타락한 지도자들을 ‘소경’으로 비유했습니다. 선과 악, 정과 사(正邪)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진실된 요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마치 소경이 소경을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이렇게 소경같은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을 두고 ‘짓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비유했습니다. 사회가 어려움과 혼란, 위기에 빠졌을 때 비겁하게 입을 다무는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 위기와 역경을 해소하거나 알려 줄 능력이 없는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이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개와 같은 지도자들은 탐욕스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 타락한 지도자들을 두고 ‘소경’, ‘벙어리 개’로 표현한 것은 그들이 심각한 정신적, 영적 장애자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한, 거의 언어를 잃어버린 벙어리였습니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 통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그래서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유명한 말씀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에바다” ‘열리라’는 이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또 혀가 풀려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입니다. 이 극적인 기적이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곳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35절) 

요한계시록2:29에 보면, “(계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성령의 권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장애가 없는 성도를 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B.C.586년경,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 성령에 이끌려 골짜기 한 가운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아주 바짝 마른 뼈들이 가득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이 “주 하나님, 주께서는 아십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代言)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노라.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노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니라.’”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명령받은 대로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하노라.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라.’”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명령받은 대로 대언했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니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노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니라.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니라. 나 주의 말이니라.’”(겔37:1-14) 

한 마디로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를 ‘골짜기에 쌓인 마른 뼈들’로 비유했습니다. 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가 대언되자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온전히 회복해주셨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했던 그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주께서는 이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바다”, “열리라” 그리고 그는 열렸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그 사람 앞에 닫혔던 세상이 활짝 열렸습니다. ‘에바다’, 한 마디 말씀으로 그 사람의 삶이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지난해 전국대학 교수들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엄이도종(掩耳盜鐘)’이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했습니다. ‘엄이도종(掩耳盜鐘)’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춘추시대 진나라 범무자의 후손이 다스리던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어느 한 백성이 혼란(混亂)을 틈타 범무자의 종을 짊어지고 도망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짊어지고 가기에는 종이 너무 크고 무거웠습니다. 망치로 깨서 가져가려고 종을 치니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 백성은 다른 사람이 종소리를 듣고 와서 종을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 자신의 귀를 막고 종을 깼다고 합니다.” ‘나쁜 일을 하고 남의 비난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 ‘소통의 부재’ 모습을 꼬집은 것입니다. 

한 가정의 비극, 학원 폭력, 정치.경제.사회의 각종 비리들과 부패 등은 모두가 다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소통부재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현실을 잠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자녀를 위한 부모 희생이 유독 심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엄마들의 손길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정작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부모의 사랑과 희생이 일방통행으로 가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한다면 아이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부모의 생각과 신념이 옳다고 믿고 부모가 상상한 아이의 미래 모습을 강요한다. 이 강요는 '다 널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합리화된다. 부모의 욕심이 무의식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다....엄마는 사소한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른 채 잔소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이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좌절하거나 분노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엄마를 죽이고 시신을 8개월간 방치한 엽기적인 사건이 잊히기도 전에 유사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성적 때문에 부모가 무시하자 유일한 안식처인 아이팟을 함께 묻어 달라던 중 2 대훈이(14·가명), 섭식장애로 친구마저 잃어버린 영주(16·가명), 스마트폰 때문에 생긴 사소한 싸움으로 상처받은 기석이(17·가명)의 극단적인 선택은 자살이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현재 60여 개의 ‘자살사이트’가 존재한다. 자살을 암시하며 ‘살고 싶다’는 마지막 구조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4개국 청소년 건강실태 국제비교조사’ 보고서 결과는 우리 아이들의 학업스트레스가 살인적 수준임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 ‘최근 1년 사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답한 비율은 한국(87.8%)이 가장 높았으며, 스트레스의 원인 1순위는 학업스트레스였다.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의 상담결과에 의하면 부모가 아이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이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쏟고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공부도 힘들지만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 때문에 아이들은 더 힘들어한다.... 부모 스스로 귀와 눈을 가리면 아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진정 아이를 위한다면 소통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자.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정의 90%가 대화 부족으로 의사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다고 한다.(부산닷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영적 장애가 심각한 우리들 가정과 사회를 보여주는 사실들입니다.  


3. 이처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신 귀먹고 어눌한 자는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의 귀와 양심의 혀가 각각 마비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심령의 귀먹은 자와, 의와 진실을 말해야 함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해 침묵하는 마비된 양심의 혀를 가진 자를 뜻합니다. 실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외면하고 자기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곧 오늘 이 세상이 겪어야만 하는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비겁하게 침묵하는 혀가 많은 것이 곧 오늘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2천년 전 귀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에바다’ 한 말씀으로 치유하신 예수는 ‘그리스도’ 곧 구세주, 메시야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십니다.

(계 10:6)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지금 이 시대에도, 소통부재의 비극과 고통의 이 시대에도 세세토록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피차에 새롭게 되어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엡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그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사, 영적으로 닫힌 우리의 귀와 입을 여시기 위해 ‘에바다’를 명하시고 계십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데려와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 정신적, 영적 장애들이 온전히 치유되어 진실을 말하고 듣게 되어 온전한 소통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벙어리되고 귀 먹은 자들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복음 증거하게 됩니다. 기도와 찬양에 귀 멀고 벙어리된 귀와 혀가 열려 하나님과 소통되는 기도, 하나님께 소통되는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막힌 귀와 닫힌 입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안수를 받으시고 ‘에바다’, 모든 것이 치유되어 삶이 새롭게 열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귀 멀고 벙어리된 이 사람이 어떻게 치유되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按手)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먼저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시고 이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은 자신의 귀와 혀에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이 고요한 침묵과 고독 속에 닫혀 있던 귀, 그리고 소리를 내기는 낼지라도 한 마디 단어조차 말하지 못하는 쓸모가 없었던 그의 혀에 예수님의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어떠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 1장에 보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라 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둠에 처한 인생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9-12입니다.

(요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이 말씀대로 참 빛이 되시는 예수께서 ‘각 사람’ 다시 말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의 빛으로 다가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예수께서는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그 아픔과 고통, 절망과 슬픔을 아시고 각 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 예수께서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요한복음10:1-5입니다.

(요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가 되시는 예수께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아픔, 외로움과 슬픔을 아시는 목자되시는 예수께서 여러분의 각자 이름을 부르시어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십니다. ‘귀 먹고 벙어리된 자’,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의 귀와 양심의 혀가 각각 마비된 자들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참 빛, 생명의 빛이 되시며 인생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닫힌 것들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에바다’, ‘열리라.’는 말씀 한 마디를 듣게 하는 것뿐입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영육간에 닫혀 있는 것들이 활짝 열리는 치유를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부모 자녀간에 닫혀 있고, 부부관계에 닫혀 있고, 인간관계에 닫혀 있는 것들이 활짝 열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에바다’ 한 마디 말씀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을 부르시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여기 ‘탄식’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애정의 탄식입니다.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쏟아내는 탄식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픔, 말을 할 수 없는 고통,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아픔, 견딜 수 없는 그의 고독과 소외, 그의 단절의 아픔, 그 아픔들을 자기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사야53:4-5입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므로 인류의 모든 아픔과 고통이 치유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화평을 이루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는 화평케 하시는 거룩한 보혈(寶血)입니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해 ‘에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닫힌 폐쇄된 공간에서 외롭고, 괴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인간관계가 막히고 닫힌 사람들을 예수께서 다 아십니다. 그들을 향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에바다’, ‘열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데려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들의 닫힌 귀와 굳어버린 혀를 어루만지시어 열린 세상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35:5-6을 보겠습니다.

(사35:5-6)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세상의 모습,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는”, 치유된 온전하고 화평한 세상의 모습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막히고 닫힌 것들이 치유되도록 예수 앞에 나오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가정을 위해 지금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막히고 닫힌 것들이 온전히 치유되어 온전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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