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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 : 실패한 나실인 (삿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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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 실패한 나실인 (삿 14:1-4) 
 
 
❚진짜 신앙인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이 좋은지 아닌지,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떤 때 드러날까요? 평소에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참 신앙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평상시에는 정말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교회 안 빠지고 꼬박꼬박 나오고, 예배생활, 헌금생활도 잘 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또 가끔 전도도 하면 우리는 “아, 저 사람 신앙이 참 좋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평상시에는 잘 안 드러나는 신앙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맙니다. 정말 저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떤 순간에 드러나느냐? 세 가지 순간에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 어떤 책에도 안 나오고, 어떤 설교에도 안 나옵니다. 바로 지난주부터 살펴보기 시작한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해 제가 발견한 세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 가지 순간에 우리의 참된 신앙이 드러나게 되느냐? 첫째,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입니다. 둘째, 힘이 있을 때입니다. 셋째, 분노했을 때입니다. 삼손은 이 세 가지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인생에 이 세 가지 상황이 닥쳐왔을 때 신앙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그는 실패한 나실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 가지 경우가 닥쳐왔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신앙이 아닌 참된 신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

첫째가 어떤 순간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잘 안 드러나지만 저 사람이 진짜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지 보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를테면, 신앙은 어떤 신앙을 가질 것인가? 교회를 갈까? 아니면 절에 갈까? 성당에 갈까? 교회를 간다면 어떤 교회를 갈까? 대학은 어떤 대학, 어떤 학과에 갈 것인가? 

취직은 어떤 회사에 할까 등등 너무 많지요. 그런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대학이야 4년만 다니면 되는 것이고, 직장도 여기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회사 가면 되지만 결혼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평생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결혼을 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 결혼할 상대를 결정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아주 정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자신뿐 아니라 자녀를 시집 장가보낼 때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지 보면 그 사람 신앙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결혼정보회사 선우가 4131명의 미혼남녀에게 ‘배우자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혼 남성이 꼽은 1, 2, 3위는 무엇일까요? ‘남성’들의 1위는 외모, 2위는 성격, 3위는 직업이었습니다. 반면 미혼 여성은 직업을 1위로 꼽았고, 2위가 성격, 경제력이 3위였습니다. 남녀의 기준이 확실히 다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다를까요? 지금부터 우리 좀 솔직해 지도록 합시다. 마음속으로만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이 결혼할 때, 또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 배우자를 고르는 여러분은 기준은 무엇입니까? 1위는 무엇인가요? 2위는? 3위는 무엇입니까? 제가 분명히 솔직해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대답한 1위가 무엇입니까? 직업? 외모? 성격? 집안? 다 좋습니다.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몇 번째 조건입니까? 한 번 솔직히 ‘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미혼인 경우) 혹은 ‘사위나 며느리 감을 고르는 기준’(기혼인 경우)을 말해봅시다. 신앙은 도대체 몇 위에 들어갑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의 신앙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결혼 문제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바로 여기서 실패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나오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 실패한 원인이 됩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의 배우자 선택 기준은 이 ‘보고’였습니다. 성인이 된 삼손은 고향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블레셋 동네 딤나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갔을까요? 4절은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다”고 하는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론 그런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진짜 목적은 딴 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네 아가씨들을 살펴보려고 간 것입니다. 삼손 눈에 촌스러운 자기 동네 이스라엘 여인들보다 선진국 도시에 사는 세련된 블레셋 여인들이 얼마나 예쁘게 보였겠습니까?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처음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제일 놀란 것이 서울 여자들은 왜 그렇게 한 결 같이 예쁘고 세련된지였답니다. 촌놈 삼손 눈에도 그렇게 보였겠지요.

그러다가 삼손은 눈에 확 띄는 여인 하나를 발견합니다. 삼손은 그 여인의 외모를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합니다. 삼손이 여인을 ‘보고’ 선택했다는 것은 외모를 결혼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았다는 뜻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실인이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택함 받은 사람이 이것이 첫 번째 기준이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우리도 여성 혹은 남성의 외적인 조건(외모, 학벌, 직업, 집안 등)만 ‘보고’ 배우자감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과 동떨어진 기준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준이 좀 달라야 합니다. 삼손은 그녀와 대화 한 번 나누어보지 않고 단순히 ‘보고’ 육체적인 안목으로 여인을 선택했다가 실패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단순히 육체적인 안목이 아닌 그 사람의 내면, 심성과 인격, 무엇보다 영적인 조건들을 보아야 합니다. 자녀들 시집 장가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달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그래도 처음에는 이방인인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3절에 보면 네 동족 중에서 결혼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들이 떼를 쓰며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3절) 하고 고집을 부리자 마지못해 블레셋 며느리를 맞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요? 자식이 떼를 쓰니 부모도 마지못해 자식 소원 들어줍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삼손의 결혼은 실패합니다. 

인생 전체가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그래도 자식 이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니까 웬만한 것은 다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내 자식의 일생을 좌우할 문제를 결정할 때는 아닙니다. 자식에게 이겨야 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부모가 종종 있습니다. 부모 자신은 신앙생활 잘 하는데 자식에게만은 신앙적으로 지나치게 관대해서 “이제 다 컸는데 신앙도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하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식의 태도가 진정 자식을 망치고 영적으로 죽이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된 기준으로 결혼을 택할 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 인생 전체를 좌우할 결정을 할 때 부모가 마지못해 자식 생각대로 하면 안 됩니다. 부모는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결정을 해줘야 합니다. 부모들이여, 잘 기억하십시오!

❚힘이 있을 때

우리의 참된 신앙이 드러나는 순간은 둘째로 어떤 때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힘이 있을 때입니다. 가난할 때, 가진 것이 없을 때는 사실 죄 지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잠언 30: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8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는 일하느라 바빠서 죄 지을 겨를도 별로 없고 기껏해야 먹고 살려고 도적질 죄밖에 짓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조심해야 할 때는 바로 부유해졌을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유해지면 교만해서 죄 지을 일이 정말 많아집니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줄 알고 하나님이 누구냐, 다 필요 없다고 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좀 성공하고 여유가 생길 때, 뭔가를 가지고 힘이 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한때 그렇게 고생하고 전쟁터를 돌던 그는 왕이 되고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자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혼자 궁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어 하나님께 큰 죄를 짓게 됩니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죄짓고 싶은 유혹이 들고, 권력이 있으면 권력을 남용해 죄짓고 싶은 유혹이 들고, 건강이 있으면 그 건강 가지고 죄짓고 싶은 유혹이 드는 법입니다. 가졌을 때 조심하세요.

삼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절을 보면 삼손은 부모를 졸라 딤나 여인과 결혼을 허락받고 결혼식장으로 가던 중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나 맨손으로 찢어 죽입니다. 정말 엄청난 괴력이지요. 그런데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해서” 이런 힘이 생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손에게 이런 엄청난 힘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블레셋을 쳐부수라고 주신 것인데 삼손은 결혼식장에 가서 의기양양하게 거기 온 하객들(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아마 어지간히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니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고 여인에게 자랑거리로, 결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거리 정도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힘과 건강, 물질이나 지위 모든 것은 그 원천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것은 분명 쓸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힘과 능력, 소유를 하니님이 주신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고 삼손처럼 나의 정욕이나 자랑거리로 전락시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도로 거두어 가시게 됩니다. 

삼손도 이 수수께끼를 냈다가 아내가 그 답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 바람에 큰 낭패를 당합니다. 가정이 깨집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은 나중에 머리털이 밀리고 힘도 잃고 눈도 뽑힙니다. 그러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가 힘과 능력, 소유로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잘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더 크고 놀라운 선물로 더 많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분노했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 드러나는 순간은 셋째로 어떤 때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분노했을 때입니다. 삼손이 결혼식 하객들에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 게 뭐냐? 맞추면 좋은 명품 옷을 상으로 주겠다”고 수수께끼를 내자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꼬여 답을 알아내게 합니다. 이 때문에 분노한 삼손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19~20절을 보실까요?

19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분노한 삼손은 아스글론에 가서 블레셋 사람 30명을 때려죽이고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줍니다. 그리고는 아내를 버리고 자기 집으로 가버리는데 장인은 기다렸다는 듯 딸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얼마 후 분노가 좀 풀린 삼손은 화해의 선물로 염소 새끼(귀한 재산)를 가지고 아내를 찾으러 가는데 장인은 딸을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답니다. 

그러자 삼손은 더 분노해 여우 300마리를 붙들어 꼬리를 서로 붙들어 매고 횃불을 꼬리 사이에 매달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아 다 불태워 버립니다. 이에 당황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사건의 원인이 삼손의 장인과 딸에게 있음을 알고 두 사람을 불살라 죽여 버립니다. 그러자 또 삼손은 더 분노해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다음 도주하여 숨습니다(15:7~8).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삼손의 행동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이 깨지고 삼손은 복수하고, 장인과 아내가 비참하게 죽고 삼손은 더 끔찍한 복수를 하고, 이 모든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삼손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분노와 복수심에만 불타 폭력을 휘두르고 피의 복수를 합니다. 게다가 삼손의 행패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이자 삼손이 더 큰 복수를 하는 것을 보면, 복수는 반드시 복수를 부르고, 분노는 반드시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보세요. 힘만 세면 됩니까? 능력이나 재능만으로 됩니까?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됩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분노했다고 해서, 속상하다고 해서 분노를 쉽사리 드러내고, 나한테 한 짓을 되갚아준다며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면 반드시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절제하고 잘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복수는 내 단계에서 끊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성령의 지배가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참고 견디기가, 용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만약 자신에게 임한 성령님의 지배를 받았다면 그는 그렇게 함부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혹시 속상하고 분한 일이 생겨도 잘 참고 절제했겠지요. 그래야 지도자 자격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해서 훨씬 더 불행하고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다 성령의 법 대신 육신의 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가 191장에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즉 성령님이 내게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 모든 욕망과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즉 그 모든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 진짜 신앙은 화났을 때, 속상할 때 다 나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화날 때, 내 생각과 안 맞을 때, 속상할 때 잘 절제하고 끊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따르면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한 나실인, 실패한 나실인

말씀 맺습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나실인이 나옵니다. 사무엘 같은 성공한 나실인과 삼손으로 대표되는 실패한 나실인입니다. 사무엘도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 한나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지기로 서원된 나실인인데 태어난 후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를 도우며 심부름을 하고 성전 문 여닫는 일을 합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교회 관리집사 노릇을 한 것인데 이렇게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첫 선지자로서 사사 시대를 마감하고 선지자 시대를 연 위대한 인물로 사용되며 한 마디로 한 평생 한 번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만 섬긴 성공한 나실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같은 나실인이라도 끊임없이 세상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구하며 삽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빠져서, 때로는 질투와 분노의 화신이 되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며 방황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죽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고 세상 즐거움이나 쾌락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비록 옥토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가시떨기(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씨앗처럼 말입니다(마 13:22).

여러분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실인이 되어야 할까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나실인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왕이면 삼손보다는 사무엘 같은 나실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평생 딴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만 위해 산 사무엘 같은 나실인이 되어야지 실컷 방탕한 데서 딴 짓만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정신 차리는 삼손 같은 실패한 나실인, 아쉬운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주 거창한 데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결정을 할 때 말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 되기 바랍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내 맘대로 살고, 내 기준으로 결정하는 삼손 같은 성도가 아니라 사무엘처럼 나실인다운 삶을 한평생 살아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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